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731화


1166화

생각 같아서는 모른 척하고서 가게를 나가고 싶었지만,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당신이 에단이오?”

한참 노려보기만 하더니, 기어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과연 발라파루 귀족 중에 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부디 에단이 발라파루에 올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대답과 함께 돌아선 이드 앞에는 아들과 달리 뼈에 가죽만 덮은 것처럼 깡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살집이 없어서 그런지, 도드라진 광대뼈가 강퍅해 보이는 인상이다.

이름이 ‘톤’이라서 아들보다 푸짐한 인물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달라도 너무 달랐다. 본인이 너무 말라서 그 콤플렉스를 아들로 풀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힐끔.

대답을 들은 톤 자작의 눈이 순간적으로 라미아와 일리나를 스쳤다.

멍청한 아들과 달리 추잡한 욕심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감탄에 더해 알 듯 모를 듯한 납득의 끄덕거림이 있었다.

아비로서 아들이 왜 되지도 않는 심통을 부렸는지 깨달은 것이리라.

“나는 톤 수칵 자작이오.’

“그러시군요. 수칵 자작님. 악수가 필요합니까?”

이드는 제 이름만 툭 던지는 톤 자작을 모른 척했다.

발라파루에 발을 들였으니 당연히 자신을 알 거라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눈에 거슬렸다.

과연 부자지간. 외형은 달라도 저 태도는 정말이지 똑 닮지 않았는가.

“…!”

그러자 자작의 등 뒤, 가게 안 여기저기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렴 상대가 누군지 알려 줬음에도 이드가 이런 대답을 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더구나 상대는 백작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힘 좋은 자작이지 않던가.

하지만 이런 반응에도 톤 자작은 살짝 눈썹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이전 파티에서 내 아들이 귀하에게 실례했다고 들었소.”

“혹시 결투 결과에 불만이 있으신 겁니까?”

“설마. 그 결투가 정당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렇지요. 결투의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도 정당했지요. 그날 있었던 일은 온전히 귀댁 공자의 잘못이었습니다.”

설마 면전에다 대놓고 그쪽 자식 잘못이라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이드는 어느새 매서운 눈빛을 한 톤 자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만들어지는 걸 보고 만족했다.

‘그러게 가만있는 사람을 왜 귀찮게 잡아 세우냔 말이야.’

하지만 이런 도발에도 톤 자작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굳었던 얼굴이 풀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상대를 내려다보던 오만한 자세를 보면 이렇게 금세 태도를 바꾸는 게 신기할 정도지만, 그가 하는 일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수칵 상단의 주인.’

카논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대 상단이 바로 톤 자작의 든든한 배경이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돈 앞에서는 백작이라는 작위도 초라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부분은 뒤로하고,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쓸데없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요.”

“그날 일에 오해는 없습니다.”

“그럼 오해가 아니라 관계라고 해 둡시다. 나는 바벨이라는 중요한 고객을 잃고 싶지 않소.”

과연 장사치, 자기에게 불리한 부분은 스리슬쩍 넘기는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약자의 입장인 자작이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참고 있는 양 보일 거다. 

‘뭐, 일정 부분이 사실인 것도 맞네.’

수칵 상단이 아무리 대단해도 바벨에 비빌 수는 없는 일이니까.

“바벨이 그런 부당한 짓을 할 것 같습니까?”

“어디까지나 내 노파심이오. 그런 의미에서, 괜찮다면 그날 일과 엮였던 분들을 초대하고 싶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톤 자작 뒤에 있던 시종이 초대장을 내밀었다. 마치 금으로 만든 듯 휘황찬란한 모양새. 하나 이드는 그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까 말했지만, 파티에서 일어났던 일은 그곳에서 다 풀었습니다.”

정말 바벨을 의식해서이건 다른 꿍꿍이가 있건 상관없다. 이드는 굳이 이런 초대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명단에 있는 사람 중 아직 절반도 보지 못했다.

“스윔 남작과 두 기사는 이미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와 주셨으면 좋겠소?”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아무래도 그날 파티에서 스윔 남작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이드가 그들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여겼나 보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결투에 나선 당사자들이니, 파티에 있었던 일을 해결하자면 스윔 남작 일행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인간…… 내가 가지 않으면 스윔 남작 일행을 어떻게 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직접 무어라 언급한 건 아니지만, 뉘앙스가 그랬다. 정말 관계를 개선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걸까.

본격적으로 자세가 삐딱해지려던 이드는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발라파루에서 손꼽히는 유명인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초대받은 사람이 나와 스윔 남작 일행뿐인 겁니까?”

“아니오. 그날 파티에 참석한 분들을 포함해서, 더 많은 인사를 모셨소.”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소문을 잠재우겠다는 의도가 투명하게 보였다. 물론 이드는 그의 목적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귀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많은 인사를 모신다’는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그 초대장, 받도록 하죠.”

어쩌면 이날, 명단에 올라 있지 않은 카논무파를 마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높은 작위의 인물일수록 만나기 힘든데, 톤 자작의 초대라면 그런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 아닌가.

“좋은 결정이오.”

“그럼 그날 보도록 하시죠. 저희는 급한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드는 그대로 돌아서 가게를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을 안중에 두지 않는 듯한 태도에 톤 자작의 숨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무슨 상관인가.

보일런에게 주먹을 날린 피터와 마찬가지로, 이드 역시 이번 일만 끝나면 발라파루를 떠날 텐데.

이드는 마차에 올라탄 후 피터 앞에 명단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자 중에 톤 자작의 초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은 우선 빼죠.”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셋은 제외해도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적은 수다. 하지만 카논무파가 주로 ‘무시 받던 사람들 사이에 퍼진 걸 보면, 그리 적은 것만도 아니다.

“그리고, 명단에 들지는 않았어도 의심된 사람들 있죠? 그들에 대해서도 따로 준비 부탁해요.”

“고위 귀족들 중심으로 말씀이시지요?”

“역시 피터 씨, 말이 잘 통해요.”

“하하하. 이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부장 직함을 내놔야지요.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받아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사람을 보러 가죠.”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퉁퉁.

피터가 앉은 채로 마차 벽을 두드리자 찬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줄어든 덕분일까. 대로를 달리는 마차 속도에도 여유가 생겼다.

톤 자작을 만나고 이틀 뒤, 초대장에 적힌 날짜가 되었다. 그사이 이드는 새롭게 명단에 추가된 용의자 열 명을 더 만났다.

중간중간 남는 시간에 카논 관광을 계획했었지만, 포기했다. 유명한 관광지에 들를 때면 최소한 한둘 이상이 아는 척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상대할 바에야 저택에서 편히 쉬는 편이 나았다.

모습을 바꾸는 등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대신 피터가 추천한 야시장은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특히 평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이다 보니, 이드 가족을 알아보고 귀찮게 할 사람이 없다는 점도 상당히 좋았다.

물론 이렇게 놀 수 있었던 건 그들뿐이었다.

피터는 이드를 통해 카논무파로 확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맥 지도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인맥 라인에서 겹치는 인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아무리 서로를 감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만남은 자연적으로 흔적을 남기게 된다. 무공은 첩자들처럼 쪽지나 수정구를 이용한 연락만으로 익힐 수 있을 만큼 쉬운 게 아니니까.

애초에 그 정도의 난이도라면 다들 집에서 통신 교육을 하지, 소드 팰러스로 모여들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조사에 정신없는 상황이었지만, 오늘만은 피터와 마리도 일에서 손을 놔야 했다. 두 사람 역시 톤 자작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동에는 명단 속 인물들을 찾아다닐 때 사용했던 대형 마차를 사용했다.

마차를 탔음에도 톤 자작의 저택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아나크렌도 그렇지만, 제국의 수도는 정말이지 거대했다.

‘이 안에 사는 사람들은 마법사들에게 감사해야 해.’

그렇게 달려 도착한 목적지에는 그야말로 고래 등 같이 커다란 저택이 웅장한 위압감을 뿜어 대고 있었다.

“일개 자작의 저택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겁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기가 황궁인 줄 알겠네.”

공후 정도의 고위 귀족이라면 또 모를까, 자작이 머물기엔 지나치게 화려했다.

자작이라고 대저택에 살지 말라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보통은 각자의 급을 지켰다. 그 저변에는 괜히 설치다가 미움받기 싫다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저택을 세우기 전부터 여기저기 기름칠을 잔뜩 해 뒀다고 합니다. 완공된 후에도 잡음 하나 없었을 정도로요.’

모르긴 몰라도 저택 건축비보다 그 비용이 더 들었을 거라며 피터가 말을 더했다.

과연 그만하니 발라파루의 많고 많은 귀족 중에서도 힘깨나 쓴다는 말을 듣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금방 들어가진 못하겠네요. 마차가 너무 많아요.”

이드의 어깨 너머로 마차 밖을 살핀 라미아가 말했다. 톤 자작의 저택 앞에는 한꺼번에 모여든 마차로 인해 교통 정체가 일어난 상황이었다. 

“차라리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편이 빠를 것 같아요.”

“그럼 그럴까요?”

그리고 뒤이어진 일리나의 말에 이드가 혹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렴 이 답답한 마차에 계속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그러나 피터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리고 나섰다.

“그・ 좀 참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귀족들 입에서 품위 없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라.”

뭐 그딴 사소한 일을 가지고 품위를 따질까 싶지만, 귀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바로 그 ‘아무래도 좋은’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니만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상관없네요. 전 귀족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저기, 마중도 나오고 있잖아요.”

말과 함께 이드의 시선이 이동했다. 그런 그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과연 그들이 탄 마차를 향해 다가오는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악취미로군요.”

피터는 상대의 얼굴을 단숨에 알아봤다. 지난날 결투에 나섰던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땐 드레스를 입었다면, 지금은 메이드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기사에게 드레스와 메이드복이라니. 피터의 말대로 실로 고약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