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34화
1169화
충격이 크리라.
어릴 때 거두어져 지금까지 의지하고 산 만큼, 단순히 주군에게 버림받은 것 이상의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고아에서 시작해 당당한 기사가 되는 일 역시 보통의 정신력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그걸 증명하듯 바인과 해쉬는 금방 마음을 수습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탁자 아래에선 한쪽 손을 마주 잡은 것도 느껴졌다.
이드는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진짜 자매가 따로 없네. 거기다 충격이 컸을 텐데 당장 확인하겠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는 걸 보면 눈치나 생각도 쓸만한 수준인 것 같고.’
아닌 말로, 흥분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톤 자작이 정말 돈 대신 두 기사를 내놓을 작정이라면, 두 사람이 달려가 매달려 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가문의 기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한 사안임에도 그리 결정했다.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것 같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으리라. 이드가 말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지요.”
그 말을 들은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당사자의 마음을 있는 대로 흔들어 놓고는 발을 빼려 하다니.
“아니요. 에단 님 말씀대로 될 것 같습니다. 저희 주군 되시는 자작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만한 분이니까요.”
해쉬가 조곤조곤 답했다.
방금 자신의 발언처럼 이드의 말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조용한 목소리에 톤 자작에 대한 팩트 폭행이 담겼다.
뒤이어 해쉬가 이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에단 님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당신들 인생에 관련된 문제를 말입니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당장 저희는 자작님의 기사입니다. 그분이 명령한다면 따라야 합니다. 즉, 지금 당장은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본인의 일임에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해쉬였다. 그런 그녀의 말에 스윔 남작은 물론, 피터의 고개도 끄덕여졌다.
‘실력은 아직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 저 정도 침착함이라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사다.’
‘탐나는 인재로군. 자작이 숨은 진주를 몰라봤네.’
“분명 에단 님께서 지금 이런 말씀을 꺼내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해쉬가 고개를 숙였다.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있는 기사는 전형적인 내유외강형의 인간으로 보였다.
“그럼, 내 이야기를 듣기 전에 우선 스윔 남작의 생각부터 들어 보지요.”
“저・・・・・・ 말입니까?”
어떤 대화가 이어질까 조심조심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스윔 남작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나 이드는 되레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보일런 공자의 몸값을 받을 당사자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만에 하나 받게 되더라도 여기의 모두와 나눌 생각이었습니다. 보일런 공자의 무례는 저뿐 아니라, 우리 전부를 향한 것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직접 결투에 나선 이는 네이탠 경이었지 않습니까. 한데 어떻게 제가 그걸 혼자 독차지하겠습니까.”
자신은 그렇게 경우 없는 인간이 아니다. 주위 눈이 무서워서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스윔 남작은 말과 함께 그런 뜻을 온몸으로 표현해 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물 한 잔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두 기사를 감당하기엔 재정적인 여건이 좋지 못합니다. 절대 바인 경과 해쉬 경이 눈에 차지 않아 이러는 것이 아니니, 오해는 말아 주게.”
“오해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누가 사람들 앞에서 본인이 가난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라도 수치스러운 일인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명예에 죽고 사는 귀족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진실을 밝힌 스윔 남작이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사안임에도 둘을 위해 꾸밈없이 사실을 알려 주자, 바인과 해쉬가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덕분에 둘의 거취가 붕 뜨고 말았다.
“그럼 톤 자작님이 바인 경과 해쉬 경을 내놓았을 때, 이쪽에서 사양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끙끙거리던 네이탠이 의견을 냈지만 외면받았다.
주인은 가치 없다고 내놓고, 심지어 거기에 가성비가 나쁘다고 가져가는 사람도 없다? 이건 돈 대신 내놓인 상황 자체보다 더한 수치가 아닐까.
“제발 말하기 전에 입장 바꿔 생각해 보고 말해라. 입으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라고, 이 자식아!”
“미, 미안.”
이를 악문 친구의 말에 네이탠은 조용히 찌그러졌다.
이드가 어쩐지 익숙한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피터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허락하신다면, 저 두 사람을 저희 쪽에서 데려가고 싶습니다만.”
“피터 자작님이 아니라 그쪽 말이죠?”
어차피 현 자작 작위는 잠시 쓰고 버릴 껍데기다. 그런 상태에서 기사를 데려가서 어쩌겠나. 대신 ‘그쪽’, 바벨이라면 기사 둘 정도 품는 것은 일도 아닐 거다.
그만큼 피터가 두 기사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저희 쪽이라고 꼭 초인들만 있는 건 아니라서요. 기사도 적지 않습니다.”
이드가 턱을 쓸었다.
“추후라면 몰라도, 지금 시점에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결투의 공증인이었던 피터 자작님이 두 기사를 넘겨받게 된다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겁니다.”
‘공증인 매수’ 정도의 언급은 충분히 나올 만했다. 물론 많은 이가 그날의 결투를 지켜보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법했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기사가 바벨의 주류는 아니잖아.’
아무리 대우가 좋아도 셋방살이의 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천하의 바벨이라도 이방인보다는 내 집단이 우선일 테고. 분명 두 기사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지만, 여러 모로 이드의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두 기사를 이렇게 신경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작이 두 기사를 내치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이드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네이탠을 자극해서 결투에서 바인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면?
물론 그래도 가진 바 실력 차로 인해 결과가 뻔하긴 했다. 하나 바인이 좀 더 필사적으로 대항하고, 피땀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 후의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않겠나. 이드는 그 ‘만에 하나’라는 또 다른 미래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거기에 더해 고아 기사라는 점에서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그럼?”
이드는 그 외 방법이 있냐는 듯 의문을 가지는 피터를 뒤로하고, 두 여기사를 바라보았다.
“바인 경. 해쉬 경.”
“네.”
“들어서 알겠지만 스윔 남작님은 개인 사정으로, 피터 자작님은 입장 상 두 분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여러분께 세 가지 선택권을 드릴 테니 직접 선택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떤 것들인가요?”
일단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하려는 건지, 해쉬가 적극적으로 물었다. 관심을 보이기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그런데 들어서는 사람이 슬슬 많아지는데, 계속 이곳에서 대화를 나눠도 괜찮을까요?”
마리가 물었다.
아무렴 자신들이 나눈 이야기가 톤 자작의 귀에 들어가면 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건 괜찮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음파는 모두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단하고 있는 상태니까요..
“네? 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냥 들리는데요?”
“이런 파티장에서 귀를 닫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당연히 신경 써야죠.’
“……”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답한 말에 사람들이 놀랐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이드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생각한 선택지를 두 기사 앞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첫째는 두 분이 바벨 소속의 기사가 되는 겁니다. 제 추천이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바벨 소속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바벨이 아닌 제 기사가 되는 겁니다. 즉, 내 아래서 일하게 되는 거죠.”
“으음.”
옆에 있던 피터에게서 앓는 소리가 났다.
바벨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은근히 기대하던 눈빛이, 이드 본인의 기사가 되라는 권유에 사정없이 떨리는 중이다.
이드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려 제국 명예 후작의 기사가 되는 거다. 저 오만한 톤 자작도 조심 또 조심하는 ‘후작’ 말이다.
하나 사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타이틀과 비교하면 명예 후작이라는 작위도 별거 아니다.
대륙의 모든 기사가 어떻게든 티끌만 한 가르침이라도 받기를 바라는 존재의 밑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다.
모르긴 몰라도 세상 기사들의 부러움이란 부러움은 다 받게 될 터였다.
“그리고 둘 다 싫다면 내가 잘 알고 있는 기사단에 입단하는 겁니다. 마지막 선택지죠. 미리 말하지만, 이 기사단은 결코 이상한 곳이 아닙니다. 주군으로 모실 분의 인품도 뛰어나시고, 기사단 구성원도 모두 여기사입니다. 그런 만큼 적응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가 보면 알겠지만, 어느 정도 이름도 알려진 기사단입니다.”
“하하하하. 그렇지요. 좋은 기사단이지요.”
순간 더는 참지 못한 피터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그가 말하는 ‘여기사들로만 구성된 기사단’이 은색 기사단임을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무인이 아닌 기사의 입장에서는, 이드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간절히 원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겠지?’
그야말로 거름 수레에서 내려 황금 마차로 갈아탔다는 말이 딱 어울릴 상황이다.
지금 이 순간,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를 얻는 두 기사가 피터는 너무 부러웠다. 취향의 차이일 뿐,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실패할 수 없는 선택이니까. 스스로를 망가트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고아에서 시작해 기사 서임까지 받은 기사들이 이제 와서 그럴 리가 없었다.
“혹시 자작님께서는 에단 님이 말씀하신 기사단이 어떤 곳인지 아시는 건가요?”
그런 피터의 모습을 본 바인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에단 님이 밝히지 않는 걸 내가 먼저 밝힐 수는 없지. 다만 자네들이 선택해도 절대 후회는 없을 거네. 그건 어느 선택지를 골라도 마찬가지겠군.”
“아니, 두 분. 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안 해 주시는 거죠? 첫째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머지 선택지를 고르게 되면 카논을 떠나야 한다는 거요.”
피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미아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사실 톤 자작이 있는 카논보다는 다른 곳으로 가는 편이 더 좋잖아. 괜히 가까운 곳에 있으면 아무래도 서로 편할 것이 없다고.”
이런 이드의 말 때문일까.
바인과 해쉬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서로 말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그리고 저러다 입술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해쉬가 고개를 들었다.
“꼭 지금 대답을 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지요. 어느 선택지를 골라도 일단 내가 스윔 남작님으로부터 바인 경과 해쉬 경을 인계받은 후에 이뤄질 일이니까요. 다만 굳이 지금 이런 이야기와 함께 선택지를 내미는 것은, 그 전에 두 사람이 내 말을 따라 주었으면 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드의 말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작님께서 저희에 대한 기사 서임을 거둬 가신 뒤라면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끄덕.
해쉬의 말에 바인도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그에 이드는 미소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