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5화
512화
“케헥!”
마지막 남아 있던 호위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타르코지는 마치 자신의 혼이 베인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아…..으……”
타르코지는 턱이 떨려 차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나? 빌어먹을, 코시 놈이 빠질 때 같이 빠졌어야 했어. 이렇게 죽는 건가? 내 모지 상단을 두고? 아니,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그래, 기사단! 기사단 놈들은 왜 아직 오지 않는 거야! 부른 지가 언제인데. 아니야, 오는 중이겠지. 내가 타르고 놈을 어떻게 키웠는데, 내 이름도 내려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니………… 그래, 올 거야. 올 거야. 그러니 일단 버티면 된다. 이, 이걸로 버티면 돼!’
타르코지는 양 팔목에 걸려 있는 두 개의 팔찌를 생명줄처럼 꼭 잡았다.
자신이 상인이 되어 처음으로 상대의 물건을 노리도록 만든 보물이었다.
방패의 마라, 칼날의 바라. 각각 방어 마법과 공격 마법이 각인된 아티팩트였다.
‘마라. 바라. 마라. 바라. 마라. 바라.’
타르코지는 이드가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두 개의 주문을 끝없이 외우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다. 그런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던 상대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타르코지는 도저히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돌려 보다 크게 소리쳤다.
“이・・・・・・ 이리 와라, 타르고! 이자를 물리쳐라!”
마지막 호위를 처리한 이드가 일라이져를 휘둘러 검신에 묻은 피를 뿌렸다.
애초에 제작 의도가 검투용이 아니기는 하지만 신께 바쳐진 신검인 일라이져다. 따로 관리하지 않고 이렇게 전투 후에 털어 주는 것만으로도 검신에 묻은 피와 오물 정도는 깨끗이 떨어져 나간다.
이드는 무너질 듯 다리를 떨고 있는 타르코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슬금슬금 뒤로 빠진 인간을 제외하면, 이 인간만 남은 건가?”
코시라면 언제든 잡을 수 있었다. 그보다는 눈앞에 있는 타르코지의 처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물론 최종적으로 살려 줄 생각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두목은 가장 강하고, 가장 나쁜 놈이다. 그 아래 부하들을 죽였는데 가장 나쁜 놈인 두목을 살려 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드의 생각은 타르코지를 제국에 넘겨서 여죄를 추궁하고 정식으로 수사를 받게 만드느냐 자신의 선에서 처리를 하고 이 사실을 제국에 넘기느냐였다. 잠시 생각하던 이드가 결국 결정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하자. 상단주인 만큼 여기저기 로비도 해뒀을 테지. 괜히 질질 끌다가 혹여 풀려나기라도 하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일이냐.’
이드는 지구에서 사는 동안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특히 언론을 통해서 그런 일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분명 절대 풀려 날 수 없는 일로 잡혀 갔는데 시간이 흐르며 유야무야되는 경우를 말이다.
여기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특히 돈이 있는 인물을 놓아 주었다가는 이후 그 돈으로 청부다 뭐다 해서 귀찮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미 적이 된 상대라면 그 처리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무림의 생존법이었다. 괜히 어쭙잖은 자비심과 영웅심으로 상대를 용서해 줬다가 얼토당토않게 칼을 맞고 죽은 무림인의 이야기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았다.
‘자비도 상대를 봐 가면서 베푸는 거지, 지금 이 인물은 아니야.’
물건을 노리는 것도 그렇지만, 인간 자체를 노리는 놈은 희망이 없다.
그 생각에 다시 검을 들려던 이드는 수십 개의 규칙적인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타르코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검사를 숨겨 두고 있었나? 아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숨겨 두고 있었을 리는 없고, 늦은 지원병인가? 확실히 여기 호위들만으로는 강도짓하기에 너무 딸리기는 하지.’
사실 강도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인원이다.
이드는 잠시 후 서른 개의 기척이 마차 위로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방금 전 꼬리를 말았던 코시와 처음 보는 검사가 마차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타르코지가 그중 한 사람을 타르고라고 부르는 동시에 양손을 이드를 향해 내밀며 소리쳤다.
“울어라! 마라. 바라. 마라. 바라. 마랍, 바라. 마라. 밥라!”
부우웅-
퓨퓨퓽!
빠르게 외쳐 대는 타르코지의 시동어에 따라 연녹색 기운이 타르코지를 감싸며 깜빡이고, 그 사이로 두세 개가 되는 바람의 칼날이 연속적으로 이드를 향해 날아왔다. 개중에는 연속적으로 외치다 보니 시동어가 꼬여서 제대로 발동되지 않는 것도 있을 정도였다.
“피식!”
이드는 그 꼴에 웃음을 흘리며 철황기에 물든 손으로 바람의 칼날을 튕겨 냈다.
티팅. 따당. 티팅.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푸른빛이 사방으로 튀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 타르코지가 더 기겁해서는 시동어를 외웠고, 새로 등장한 타르고가 이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순식간에 타르코지와의 거리를 줄였다.
그리고 타르코지를 둘러싸고 있는 연녹색 방어막의 아랫부분을 차 올렸다.
퉁!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슬쩍 타르코지가 허공에 떴다.
“으악! 타, 타르고! 타르고! 날 살려라! 타르고!”
타르코지가 죽는다고 악을 썼다. 타르코지가 그렇게 불러 대는 이름의 주인으로 보이는 검사의 얼굴이 조급함과 다급함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이제는 타르코지의 앞 한 걸음까지 다가와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이드가 뒤집어진 타르코지의 머리 부위를 잡았다. 타르코지는 금방이라도 머리가 박살 날 것처럼 악을 썼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보호막에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르고가 한발 늦게 타르코지가 있던 허공을 잡는 순간 이드의 어깨가 금실거리며 파도쳤다. 그것은 그대로 회오리로 변해서 손끝까지 이어지며 이드가 잡고 있던 타르코지를 끌어당겼다.
휘리리릭-
다음 순간 타르코지가 바람개비의 날개처럼 회전하며 이드의 뒤로 날아가 일리나와 에단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허공을 잡은 타르고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주군!”
“주군? 상단주 아니었어?”
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타르고는 전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다급한 얼굴로 주먹을 휘둘러 왔다. 확실히 지켜야 할 사람이 상대편에게 잡힌 이상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말이다.
그 모습에 이드도 마주 주먹을 쳤다.
그런데 두 주먹이 마주치기 직전 타르고의 주먹이 살짝 꺾이자 그의 손등 위로 널찍하지만 짧은 검날 모양의 암기가 툭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이 한 수는 상대의 주먹과 손가락을 노린 것으로 지금까지 타르고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 비장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빴다. 아니, 지금까지 타르고의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수에 걸려들지 않을 진정한 실력자를 아직 만나지 않은 덕분이니까 말이다.
“흥, 얕은수를, 탁골조(擢滑爪)!”
이드는 상대의 암기와 함께 주먹을 부숴 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탁골조의 조법으로 암기의 칼끝 위에서 손을 회전시켜 손가락 사이에 칼날을 품고 척인력(斥引力)을 통해 순간적으로 타르고의 중심을 무너트리고 와류의 힘으로 그를 허공에 띄웠다.
타르고는 제어되지 않는 자신의 몸에 순간 위기를 느끼고 반대편 손을 들었지만 이드의 손이 더욱 빨랐다. 이드는 암기째로 그를 허공중에 던져 회전시키고 그의 등 부분을 강하게 끊어 치며 날려 버렸다.
퍼엉!
“커헉!”
단순해 보이는 끊어치기 한 수였지만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타르고는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과 함께 속이 뒤집어지는 충격을 받고는 입을 딱 벌린 채 한참을 날아가 코시의 발 앞에 얼굴을 처박았다.
“쿨럭! 크헉….하아, 하아!”
순간 기침 소리와 함께 타르고의 입에서 약간의 피와 거친 숨이 토해졌다.
“…꼴깍…….”
코시는 조심스럽게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도 꼼작할 수 없었던 인물이 뛰어나간 지 단 몇 초 만에 박살이 나서는 자신의 발 앞에 엎어져 있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빌어먹을 놈. 이럴 거면 자신 만만하게 나서지를 말든가. 아니, 아예 날 잡지를 말든가. 죽으려면 저 혼자 죽을 것이지.’
코시는 속으로 타르고를 수없이 욕했다. 하지만 곧 그 욕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충격을 삼킨 타르고가 몸을 일으킨 때문이었다. 그는 눈앞의 코시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쿨럭. 비겁한 놈!”
코시는 동시에 생각했다.
‘에라이, 미친놈아!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말이냐!”
코시는 이번에도 조용히 몸을 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드는 혹 자신이 저놈의 허리가 아니라 머리를 때린 게 아닐까 하고 순간 고민했다.
그리고 땅에 쓰러져 있는 호위들과 마치 위에 올라 타르고가 당한 모습에 긴장하고 있는 검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르고를 가리켜 보이고는 말했다.
“누가?”
눈이 삐지 않은 이상 누가 비겁한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타르고라는 인간이 가진 생각의 기준은 다른 듯했다.
“각자 가진 전력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상황에 맞는 말도 아니었다.
이드가 말했다.
“인질의 사용도 전술의 한 종류다.”
“인질은 전력이 아니다.”
“적에게 위력을 발휘하면 그건 전력이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핵심을 말해라!”
“…..주군을 넘겨라. 그렇다면 안전을 보장하고 놓아 주겠다.”
“불리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닌데?”
이드의 말에 타르고가 마차 지붕 위의 검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검사들이 각자 가진 화살을 당기고 단검을 쥐고, 갈고리가 걸린 로프를 돌리기 시작했다.
“마법의 보호를 받고 있으신 주군은 무사하실 테지만, 너희들은 아니다. 저 많은 화살과 단검들을 모두 피할 수는 없다.”
[헹, 누가?]
타르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미아가 움직였다. 그녀는 가볍게 일리나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에단이 누르고 있는 타르코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부리로 연록색 방어막을 콕 찍었다.
피시식-
순간 묘한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타르코지를 보호하던 마법이 사라졌다.
그리고 인질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듯이 한쪽 발톱을 커다랗게 키워 타르코지의 머리를 틀어잡았다. 날카로운 강철의 발톱 끝에 찔린 타르코지의 이마와 머리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는 김에 부정된 마나여, 세상의 흐름에 침몰하라!]
몇몇만이 들을 수 있는 라미아의 주문과 함께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 그녀의 날개가 한번 날갯짓하자 별다른 위력을 내보이지 못한 마나 고정 마법진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눈에 보인 것은 아니지만 막힌 숨을 내쉬듯 크게 출렁이는 마나의 흐름에 모두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드는 라미아를 바라보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잘했어. 라미아!”
[뭘요, 이 정도야 기본이죠. 호호호]
오랜만의 활약에 라미아가 도도한 웃음을 흘렸다.
이드가 다시 바라본 타르고는 입을 쩍 벌린 채 라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지금의 상황이 그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연하다. 방어막을 부리로 부수는 모습을 보았고, 작고 귀여운 발을 크게 만들어 타르코지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며, 밝게 빛나던 날개도 보았다.
하지만 도대체 정체를 예측할 수 없었다. 엘프와 정체도 모를 강철의 새, 그리고 자신으로서는 추측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닌 강자. 타르고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드가 말했다.
“이제 당신의 주군도 안전하지 못한 것 같은데. 거기다 우리 전력은 오른 것 같으니, 항복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살 수 있겠소?”
타르고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드는 일라이져를 납검했다. 서로의 전력은 확연하다. 승패의 결과는 이미 났다.
이드는 타르고의 눈에서 싸울 의욕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누가 말이오?”
“……주군이오.”
이드는 이미 눈을 꼭 감고 있는 타르코지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죽을 거요.”
“모지 상단을 내어 놓겠소.”
순간 타르코지가 눈을 부릅떴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상단이 중요해도 스스로의 목숨을 내어 놓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놓아서 어디다 쓰나. 이드가 고개를 저으려 할 때 슬그머니 에단이 다가왔다. 그는 타르코지에게 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죽으면 모지 상단이 그대로 후계자에게 넘어갈 수가 있었다. 상단이야 치명적인 오점으로 인해 망하겠지만 그 재산은 그대로 넘어간다.
잠시 생각하던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국에 넘기기로 하지.”
타르코지의 생사를 제국에 넘긴 것이다.
타르고가 타르코지를 바라보자 타르코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고가 숨기고 있던 암기와 검을 던졌다.
“항복하겠소!”
그 말과 함께 마차 위에 있던 검사들이 모두 땅으로 내려와 무기를 내려놓았다.
상단주로서의 타르코지의 능력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기사단 하나는 제대로 만든 것 같다고 이드는 생각했다.
이드는 그때까지 멀뚱히 서 있는 코시를 손짓해 불렀다.
“무, 무슨 명하실 일이라도.”
코시가 납작 엎드려 답했다.
이드가 타르코지를 비롯한 검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 묶어.”
“옙!”
코시는 재빠르게 움직여 타르코지와 타르고를 묶고 검사들을 묶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자신을 스스로 묶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제발 살려 주시오.”
코시는 실낱같은 희망 하나를 잡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