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60화
1195화
그 너머 지하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1층에서 번진 빛이 몇 개의 계단을 비출 뿐이었다.
그렇게 몇 칸이나 내려갔을까.
찰칵.
앞서가던 콘펌 남작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팟. 파팟. 파파파팟.
직후 끝도 없을 듯 깊어 보이던 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어둠을 밀어냈다. 뒤이어 벽에 박힌 수정구까지 연달아 밝혀지며 지하 공간을 완전히 환하게 밝혔다.
“마법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저건 누가 봐도 마법이다.
“마나 파장의 영향권을 벗어난 아래쪽에만 있습니다. 아무렴, 지하에서 연기를 피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뭐, 그걸 떠나서 편리함을 포기하기 힘든 면도 있고요.’
“그렇군요.”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초 마법인 라이트 정도라면 마나 파장도 작으니까. 하지만 입구에 저런 장치를 하고서, 굳이 다시 마법을 사용한 까닭.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콘펌 남작이 마지막에 말한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한번 편안함을 맛본 인간은 이전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다.
더욱이 온갖 것이 다 갖춰진 곳에서 생활하던 황궁의 사람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세 사람은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입구에서 바닥까지 약 사십 미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의외로 특유의 꿉꿉한 냄새는 없었다. 심지어 징그러운 곤충도 없었다.
바닥은 흙이 아닌 돌이 깔려 있었다. 매끄럽진 않지만 평평하게 생긴 것이, 공이 든 흔적이 가득하다. 그건 사방의 벽도 마찬가지. 보기에 따라 지상의 첨탑을 땅속에 거꾸로 박아 놓은 듯 보이기도 했다.
귀한 황세손을 위한 할아버지의 세심함이 엿보이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 통로가 넷 있었다.
“저곳이 보물고인 모양이군요.”
이드는 그중 하나를 골라 말했다. 안쪽까지 환하게 밝아진 다른 곳들과 다르게, 중간에 묵직한 문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티가 나지요? 다른 것들은 각각 황세손 전하의 침전, 시종과 호위들이 쉴 공간, 그리고 식량창고 등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럼 여기도 원래는 달리 쓰였겠군요. 아마도 무기고?”
“정답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무기고는 아니었습니다. 이 공간이 적에게 발각될 경우, 옥쇄할 수 있는 최후의 한 수를 보관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황세손도 함께 말입니까?”
말이 좋아 옥쇄지, 남이 볼 땐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자살행위일 뿐이다.
이드는 놀란 이유기도 했다.
전장이나 귀족 간의 전투에서는 옥쇄를 드물게나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황족이, 그것도 황세손이 그런 선택지를 고르는 경우는 없다.
황제 직계의 죽음은 곧 나라의 멸망과도 같기 때문이다. 즉, 재기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역시 놀라시는군요.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수치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라. 초대 황제 폐하의 지론 중 하나입니다.”
“・・・・・・ 여러모로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저 말뿐이 아니었다. 황세손의 궁을 설계하면서, 그 안에 황세손의 무덤까지 직접 만들었으니까.
본인의 발언에 책임을 질 줄 안다고 해야 할지, 독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사람이다.
“초대 황제 폐하의 일대기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무기고의 통제는 철저했습니다. 누가 실수로라도 손을 대서는 안 되니까요.”
물론 그런 경우는 없겠지만, 누군가 실수로 이 깊은 지하에 들어와 무기고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러다 옥쇄를 위해 준비한 장비에 손을 대기라도 한다면?
그 위에 살고 있던 황세손은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건 혼란을 피해서 이곳 지하로 몸을 숨겼을 때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리 설명한 콘펌 남작은 다른 덴 크게 볼 것이 없다고 말하고는, 보물고였던 곳의 두꺼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좁았던 시야가 트이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엔 비어 버린 진열장이 가득했다.
“넓군요.”
“원래는 요만했습니다만, 보물고로 쓰기 위해 확장했습니다.”
“하긴, 제국의 보물을 두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죠.”
과연 이 안을 채웠던 보물들은 어떤 가치가 있었을까. 대략 그 양만 가늠해 보아도 라일로시드가의 레어에 있던 보물고보다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지금은 비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이드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애써 그렇지 않은 척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야? 이 안에 금지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보물고 안을 천천히 살피고 있을 때였다.
가장 깊은 안쪽. 장식장으로 가려진 곳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보였다.
‘빙고’
보물고 안에 또 다른 문이라니?
심지어 누가 매일 열심히 닦아 놓은 것처럼 반질반질하니, 탐욕을 자극하며 반짝이는 황금 재질이었다.
그걸 찾은 이드가 뒤를 돌아보자 콘펌 남작과 톤 자작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찾으라고 숨겨 둔 물건을 잘 발견한 아이를 보는 부모 같은 눈길이었다.
“역시 발견하셨군요.”
“……못 볼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보물고는 옮겼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옮겼습니다.”
“그럼 저 문은 뭐죠? 제가 보기엔 통짜 금인 것 같은데. 저것만 해도 엄청나게 값나갈 것 같은데요.”
작긴 하지만, 그래도 성인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다.
높이 이 미터, 넓이 일 미터에 조금 모자란 직사각형. 두께가 아무리 얇다 한들, 얼마나 많은 금이 쓰였을까. 더욱이 그 표면엔 작은 글씨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몇 줄 읽어 보니 카논 제국의 건국 역사다.
보물고 안에, 또 다른 방을 막고 있는 황금 문. 그리고 거기 적힌 건국 역사.
단순히 금이라는 귀금속으로서의 가치를 떠나, 카논 제국에 있어 매우 의미 깊어 보이는 문짝이다.
보물고를 옮겼다면 당연히 같이 떼 갔어야 할 문짝.
“아까 말씀드렸었지요. 사정이 있어서 보물고를 옮겨야 했다고. 그것이 바로 저 문 뒤에 있는 것 때문입니다.”
“어디 저주받은 마검이라도 봉인시켜 놓은 겁니까?”
“그런 좋은 이야깃거리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합니다.”
숨길 줄 알았는데. 콘펌 남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말을 정리하는 것 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전, 저희 제국에 위대한 마법사가 한 분 계셨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마법과 제국에 바친 분이시죠. 그분은 죽음 직전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마도의 정수를 탄생시켰고, 그것을 제국에 남기셨죠.”
“묘하게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하하. 아이들이 좋아하는 내용이긴 하지요. 평생을 마법에 바친 분이시기에 아마도 그런 낭만이 남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분이 남긴 정수를 당시 황제께선 다음 대의 황궁 마법사에게 전하려 하셨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남긴 정수가 너무나 뛰어났던 탓이지요.”
간단히 말해서 당시 황궁 마법사의 실력이 전 황궁 마법사보다 많이 딸렸다는 것이다.
물론 저 말이 진실일 때의 이야기지만,
“그런 사태가 반복되고, 그분이 남기신 정수는 먼지와 마나만 쌓여 그 힘의 파동만으로도 황궁의 마법에 혼란을 만들 정도가 되었지요. 그에 황제께서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어쩔 수 없이 그분의 흔적을 이 지하로 옮겨 두게 된 것입니다.”
“마치 동화같이・・・・・・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이 안에 있다면, 어떤 의미에선 보물고만큼이나 중요한 곳이 아닙니까? 혹여 이후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지?”
“괜찮습니다. 마지막 도전이 벌써 수십 년 전입니다. 지금은 모두 포기했습니다. 일각에선 정수를 남긴 분께서 자신의 마법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대가 끝없이 마법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아니셨을까 하는 소리까지 나왔습니다. 그 정도로 오래된 것이지요.”
즉, 이젠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조금 더 이어진 말에 따르면, 역대 황궁 마법사가 연전연패하자 도전 대상을 확대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실패했다나? 사실인지는 몰라도 제법 흥미가 돋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콘펌 남작이 꾸민 이야기라면 그는 이야기꾼으로서 상당히 재능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은 감찰관에게 보여 드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다 덜컥 제가 선택이라도 받는다면요?”
“바벨과 제국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겠지요? 감찰관이 우리 카논의 사람이 되기라도 한다면 더욱 기쁜 일일 것이고요.”
“톤 자작님은 도전해 보셨습니까?”
“난 마법사가 아니다.”
“그 말은 이곳이 처음이라는 말씀인데 어째 반응이 너무 덤덤하십니다?”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톤 자작이 입술을 실룩였다.
“……평민이나 겨우 이런 것에 놀라는 것이다.”
“그렇군요.”
반응은 여전히 좋지 않다. 여기까지 왔다면 어떻게든 금지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사탕발림이라도 할 만한데, 그런 것도 없다.
한번 깔보기 시작한 대상은 끝까지 깔본다는 것일까. 좋지 않은 쪽으로 초지일관인 사람이다. 도대체 이 인간이 사람을 보는 기준은 무엇일까. 돈? 작위?
“자, 자. 여기까지 왔으니, 감찰관도 도전해 보시오.”
반대로 콘펌 남작은 마음이 급했나 보다. 권하는 것을 넘어 강매 수준의 태도를 보인다.
그는 이드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가장 먼저 눈이 간 것은, 한 뼘이 넘는 문의 두께다. 저 문짝 하나면 영지 하나는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갈 때 떼어 갈까.
그 뒤를 이은 것은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쏟아지는 진한 마나였다. 무형무색의 마나가 얼마나 쌓였는지, 지하에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살랑거릴 정도다.
황금 문 너머 방은 작았다.
장정 스물이 들어서면 자리가 없을 것 같은 네모진 방의 중앙에는 사람의 손을 형상으로 한 돌 제단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투명한 수정구가 있었다.
수정구는 정말 티 한 점 없이 맑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드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맑은데? 이게 금지라고?’
방금 쏟아진 마나는 아무런 성질을 띠지 않은 무속성이었다. 수정구 역시 탁한 마나는 한점도 끼어 있지 않았다.
금지라고 할 정도로 흉흉한 어떤 기색도 찾을 수 없었다는 소리다.
혹시 여긴 금지로 가는 중간 단계이고, 아까 콘펌 남작이 했던 소리가 모두 사실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스칠 때였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콘펌 남작이 이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걸 보면 또 아닌 건 아닌 것 같고.’
콘펌 남작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없다. 그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따로 무어 있을까.
“하하. 이렇게 권하시니, 도전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과연 저것이 무엇인지. 진짜 궁금해진 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