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64화
1199화
그레센에도 뱀파이어는 있다.
다만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다. 거기다 인간과 마족, 그리고 몬스터의 경계에 한 발씩을 걸치고 있어 어느 한쪽으로 정의하기도 매우 어려웠다.
불사에 가까운 만큼 살해당하거나, 자살하지 않으면 지독히도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
대신 약점도 온 세상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심지어 대륙엔 뱀파이어에 치명적인 신성력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 숫자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긴 수명과 강력한 생명력을 선망하는 멍청이는 많았다.
그들 중 일부는 뱀파이어를 두고 인간의 형태를 한 드래곤이라 칭했는데, 덕분에 심기가 거슬린 한 드래곤에 의해 뱀파이어의 숫자가 크게 줄어드는 웃지 못할 사고도 있었다.
조용히 살아가던 뱀파이어 입장에선 실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으리라.
그들은 그 대부분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드물게 이종족이나 특이한 몬스터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이런 뱀파이어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신성력과 태양, 그리고 오리하르콘이다.
그야말로 언데드 청소 도구 3종 세트라고 할까.
저 중 가장 선호되는 것은 오리하르콘이다. 신관을 모실 필요도 없고, 해가 뜰 아침을 기다릴 필요도 없으니. 오로지 오리하르콘과 뱀파이어를 찌를 실력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치이이익!!
지금처럼 오리하르콘이 박힌 부분을 중심으로, 그 주변이 타들어 가는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네. 도대체 정체가 뭐야?”
뱀파이어 나무라니.
그레이드론의 지식을 통틀어도, 듣도 보도 못한 경우다. 애초에 피를 빨 입도 없는 뱀파이어가 세상에 어딨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정말 뱀파이어라도 그렇다.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서 대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초장기 간헐적 단식이라도 하나?
‘설마 그래서 이 고목이랑 미라 영감이 저렇게 바짝 말라비틀어진 건가?”
심지어 상상력은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덕분에 알아차리는 것이 조금 늦고 말았다.
스파팟!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뚫고, 불쑥 치솟아 오르는 어두운 빛줄기를.
깊게 박힌 검신을 밀어내려는 듯 사방으로 요란하게 뿜어지고, 그중 하나가 이드의 가슴을 때렸다.
콰릉!
천둥소리를 닮은 강력한 소리와 함께 이드가 뒤로 튕겨 나갔다.
“어이쿠, 깜짝이야.”
한참을 밀려난 이드가 민망함에 너스레를 떨며 손을 털었다.
다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불시에 일어난 기습 아닌 기습보다 이드의 방어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 철황기로 감싼 손으로 어두운 빛을 막아 낸 것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제법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끼아아아아-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목은 온몸을 흔들며 계속해서 광선을 뿜어냈다. 무극신기에 근간을 둔 검강의 유지 시간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길긴 하지만, 영원할 순 없다. 이미 미라 영감과 고목을 봉인하고 있던 강기의 절반이 스러진 상태.
그 때문일까,
한층 강력해진 기운에 더욱 빠른 속도로 밀려난 일라이져는. 티잉!
밀려나던 힘에 의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직후 강기가 사라지며 자유로워진 가지 하나가 미라 영감의 머리를 주워 목에 가져다 붙였다.
“느어는 무엇이냐!”
목이 붙은 미라 영감은 노란 안광을 번뜩이며 한층 분명해진 발음으로 소리 질렀다. 그런 미라 영감의 앞으로는 검은 육망성이 떠올랐다. 대형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그 속도 또한 앞서에 비하면 매우 빨랐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 봤자 검보다 빠를 수 있을까.
이드는 죽여도 죽지 않는 미라 영감과 고목을 다시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 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이 공간에서의 전투는 피해야 한다.
지금까지 괜찮았다고 앞으로도 괜찮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
“영감이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럼 내 소개를 먼저 하지. 내 이름은.
이드는 두 손의 검결지로 하늘과 땅을 가리켰다.
스파파파파팟!
검은 공간에 희미한 향이 먼저 흐르고, 그 뒤를 따라 이드의 몸에서 하얀 꽃잎이 쏟아져 나왔다.
수중무검 심중유검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난화이십이식의 화령인!
하얀 꽃잎이 다시 꿈틀거리는 검은 나뭇가지를 휘감아 나갔다. 흑과 백의 싸움은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같다.
그렇게 나뭇가지를 처리한 이드는 그 사이 허공을 디딘 상태였다. 그 발끝에는 일라이져가 닿아 있었다.
“이드다!”
빠앙!!
찰나의 접촉이지만 일라이져를 채우긴 충분했다. 발과 일라이져 사이에서 일어난 내공의 반발에 총소리 같은 파열음이 나고, 일라이져는 즉시 음속을 넘었다.
공기의 벽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총소리와 겹쳤다.
퍼억!
이드의 발끝에서 사라지듯 날아간 일라이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조금 전 일라이져가 뽑혀 나온 바로 그 자리였다.
그 앞에는 고목이 다시 가져다 붙인 미라 영감의 머리가 있었지만, 이젠 없다. 중간 길목을 막고 있던 미라 영감의 머리는 이미 지나가는 과정에서 산산조각 나 터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라이져가 다시 박혔다. 이번에는 검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그뿐만 아니라 일라이져에 충전된 내력이 고목 내부로 쏟아지며 주변을 파괴했고, 동시에 갈고리가 되어 검을 고정시켰다.
곧이어 내력에 의해 증폭된 오리하르콘의 힘이 더욱 강력하게 고목을 태웠다.
끼아아아아아
고목은 굵은 나뭇가지를 움직여 일라이져를 뽑으려 했다.
서걱.
하지만 나뭇가지는 일라이져에 닿기도 전, 어느새 다가선 이드에 의해 잘려 나갔다. 그런 이드의 손에는 미끈한 검신을 자랑하는 검이 들려 있었다. 게다가 그 한 자루가 다가 아니었다.
스르릉, 스르르릉.
마치 골골대는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는 십여 자루의 검이 이드의 등 뒤에 떠 있었다. 모양도 무게도 다른 이 검들의 공통점은 하나.
바로 모두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초대 선물인데, 거절은 거절하지!”
이드가 검결지로 고목을 가리키자, 둥실 떠 있던 검들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지며 고목을 향해 쏘아졌다.
화령인을 막던 나뭇가지가 움직이기엔 늦었다.
부글부글.
그러자 머리가 사라진 미라 영감의 목에서 피거품이 올라왔다. 폐에서 공기가 뿜어진 것이다. 있지도 않은 입이 주문을 외우기라도 하는 양, 그와 함께 미라 영감의 팔이 넓게 벌려지고,
비즈즈즈.
그 사이에 있던 검은 육망성이 길게 늘어나며 고목을 노리는 검을 막아 갔다. 하지만 즉석에서 변형된 마법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오리하르콘은 그 자체로 파마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드가 검을 조종하는 수법은 이기어검에 기반한다. 그 속에 깃든 무리는 어지간한 고위 마법에 맞먹는다. 어설픈 비검술 따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쨍그랑!
십여 자루의 검은 제 길을 가로막는 검은 마법을 우습게 부숴 버리고는, 그대로 고목의 뿌리부터 줄기까지 곳곳에 깊게 박혀 들었다. 치이이이이익!
끼아아아아아아~
나무 타는 소리가 꼭 고기 굽는 소리 같다.
고목의 비명이 어느 때보다 크다. 길게 늘어나 독사처럼 꿈틀거리던 나뭇가지가 화살이라도 맞은 듯 바르르 떨어 댄다.
이드는 그중 몇 개가 움직이는 모습에 수도를 휘둘렀고, 날카로운 수강에 고목의 가지가 후드득 잘려 나갔다.
그러자 새로운 나뭇가지가 느릿하게 솟아나 제 몸에 박힌 검을 뽑으려 했다.
그것은 몸체만 남은 미라 영감 또한 마찬가지. 검게 물든 손을 따라, 보이지 않는 힘이 검을 뽑으려 했다.
“쯧쯧, 구질구질하기는.”
퍼퍽.
이드는 마법을 조합하는 미라 영감의 두 팔을 날려 버리고는 허공을 잡은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뿌득! 뿌드드득!!
그러자 검들이 고목 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쯔저저저적!
사방에서 조이는 힘이 계속해서 강해지자 급기야 고목이 아래위로 길게 갈라지려 했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에서 발끝에 이르기까지 금이 간 격이랄까.
그야말로 치명상이었다. 결국 고목의 비명이 멈추고, 가지는 힘없이 늘어졌다.
대신 미라 영감의 몸뚱이가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몸을 중심으로 검은 마법진이 번뜩였다.
“흐허느 흐허 흐햐.”
먼저 재생된 뼈에 겨우 근육 몇 개가 붙은 입이 달그락거렸다.
이드는 어느덧 완성되려는 검은 마법을 호조를 이용해 긁어내듯 파괴했다.
도대체 미라 영감과 고목의 관계는 무엇일까. 고목이 본체인 줄 알았는데,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본체가 힘을 쓰지 못하는 중에 미라 영감이 이렇게 빠르게 복구되는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하지만 자신이 지척에 있음에도 떨어지지 못하는 걸 보면 아주 관계가 없는 건 또 아니고.
어쩌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말이 통할 상대도 아니지 않은가. 마음을 굳힌 이드는 즉시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콰지지직!
떠어어어엉!
온전히 말아 쥔 이드의 손을 따라 기가 움직이고, 나무 파편이 튀며 검이 깊이 박혀 들어갔다. 몇 개는 손잡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들은 모두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났다.
그렇게 십여 자루의 검극이 마주치는 순간. 거기서 일어난 파동이 묵직한 종소리를 만들어 냈다. 소리는 또 다른 파동이 되어 번져 나가며 고목의 몸체를 조각조각 부서트렸다. 그리고 소리의 파동이 온전히 고목 밖으로 뿜어질 때.
퍼서서석.
껍질이 몽땅 떨어져 나간 고목의 몸뚱이엔 거미줄 같은 잔금이 셀 수 없이 생겨 있었다. 마치 조금만 힘을 주면 바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 “이것도 쉽게 안 죽네.’
그렇지만 이드는 고목이 그런 상태에서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기로 이어진 검들이 그렇게 전해 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산산이 조각났지만, 외부로부터 쉬지 않고 흘러들어 오는 기운에 서서히 회복하려는 고목.
어쩌면 리치처럼 외부에 라이프 베슬 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간단하게 몽땅 날려 버려? 아니면 지금이라도 라미아를 부를까?”
과연 가루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도 부활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진짜 불사신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경지까지 아닌 모양이었다.
죽음이 코앞에 왔다는 걸 느끼기라도 한듯.
두 팔과 허리 아래가 뜯겨 나가는 중에 겨우 혀와 성대를 온전히 복구에 성공한 미라 영감의 입이 힘겹게 움직였다.
“나아는……무엇이냐!”
“…..영감, 지금 뭐라고 했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던 미라 영감의 입에서, 드디어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희번덕.
그와 함께 미라 영감의 노란 눈동자가 이드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