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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66화


1201화

이드는 본인이 카논의 기사가 아님에도 미라 영감의 오해를 풀지 않았다.

어차피 잠깐 연기하는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다.

거기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미라 영감이 바라는 일이 아닌가. 사람이 측은지심이 있어야지.

물론 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측은지심 다 나가 죽었냐고 할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 막 정신을 회복해 이런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살필 겨를도 없던 미라 영감의 눈에는 그저 젊은 기사에 대한 우려와 대견함만이 가득했다.

그는 재차 이드의 안전을 입에 담았다.

“옳다. 이 상황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그러니 카논의 기사여, 그대는 당장 손을 거두고 이곳을 떠나라. 이곳은 그대에게 매우 위험하다.”

“그거야 알지만 말이오. 떠나라고 해도 이곳에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닌지라, 돌아갈 방법을 모르오. 도대체 이곳은 어디요?”

“여긴…… 별이 눕는 자리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레이드론의 지식에도 없으니, 최소한 그레센 대륙 위에 있는 장소는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별이 눕는 자리? 내가 있던 곳은 요만한 크기의 작은 방이었소.”

“좁은 방? 백악궁이 아니라?”

“그 방이 백악궁 지하에 있기는 하오. 지금은 옮겨진 보물고 한쪽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이오. 모르시오?”

“내가 알기로는 백악궁의 중심에 있었다고 들었네. 그사이 옮겨진 모양이군.”

과거를 떠올리는 걸까.

미라 영감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말하는 투나 눈빛을 보아 좋은 기억은 아닌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꼴을 봐서는 그 과거가 결코 편치 않았을 것 같으니 말이다. 더욱이 이드가 들어섰던 그 방이 원래는 백악궁 중심이 있었다는 사실도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다’는 뉘앙스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미 그걸 듣는 시점에서 여기, 별이 눕는 자리에 갇혀 있었다는 것인데.

‘콘펌 남작도 몰랐던 모양이군.’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안쪽으로 들여보내기 전까지의 태도로 보아 아마 알았다면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의 옛날 역사까지 빠삭한 그가 모른다면, 꽤 오래전에 옮겨졌다는 말인데.

아무도 손에 넣지 못했다는 말은 거짓이었을까? 대체 여길 옮긴 이는 누굴까?

‘황궁에 만들어진 금지. 이게 함정이라고 생각하면 혼돈의 파편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생각이 뻗어 나가는 중에 이드는 문득 미라 영감을 다시 살폈다.

그는 여전히 우묵한 눈을 한 채로 말이 없다.

어찌 보면 참으로 불쌍한 인물이다. 과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나무의 노예가 되어 마법 지팡이처럼 부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라 영감을 향한 이드의 눈에는 티끌만 한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냉혈한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공격한 적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서로 죽이기 위한 전투 중이라면 응당 냉정히 싸웠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승패가 갈려 이드의 손에 생사가 달린 상태다.

더욱이 평소의 이드라면 그 싸움이 당사자가 원한 바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충분히 그 사정을 헤아려 줄 아량이 있었다.

그럼에도 미라 영감을 향한 이드의 눈길이 곱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 장소가 콘펌 남작과 톤 자작이 자신을 밀어 넣은 함정이라는 점. 둘째, 그 둘이 혼돈의 파편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함정도 혼돈의 파편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세 가지 이유에 더해 콘펌 남작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과거 카논을 위해 자신을 바쳤던 마법사의 정수를 남겨 둔 방이라는 발언 말이다.

과연 그 마법사가 누구일까. 이드가 카논의 역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천년이 넘어가는 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름을 떨친 위대한 마법사가 한둘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혼돈의 파편이 관련될 이유가 있을까?

더욱이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마법사’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을 수밖에 없다.

‘・・・・・・게르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터무니없는 해석일 수도 있다.

콘펌 남작은 이 방에서 많은 마법사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미라 영감도 그렇게 사라진 마법사 중 하나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처음엔 이 공간에 고목뿐이었고, 이후 고목을 이기지 못한 마법사들이 노예로 부려졌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예감이란 놈의 말은 달랐다. 예감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가끔은 예지에 가까운 이드의 감은 이미 미라 영감의 이마에다 게르만이라는 이름표를 못 박아 둔 상태였다.

이드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말했다.

“그보다, 마법사의 이름은 무엇이오? 어째서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이오?”

상대가 게르만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무겁다.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미라 영감의 눈이 이드를 향했다.

“이미 역사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 이름은 전혀 중요할 것이 없다.”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하오.’

“허허허. 이해한다. 젊음이란 본래 그런 것이지. 하지만 젊은 기사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명예를 버렸다.”

“혹시 이름을 밝히지 못할 죄라도 지었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불쑥 들이민 추궁에 미라 영감이 회한이 가득 찬 숨을 힘껏 내뱉었다.

“그럼 지금 이 꼴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벌이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요?”

“글쎄. 자네 말대로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일 수도 있겠지. 아니, 벌이야. 그런데 벌이 너무 가벼워 아쉽다네.”

누가 봐도 끔찍한 꼴을 하고서, 이마저도 가볍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온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은 그 모습에 이드는 불쑥 입을 열어 그 이름을 말했다.

“게르만.”

“….”

미라 영감이 질끈 눈을 감았다.

“마법사의 이름이 게르만이오?”

“・・・・・…실로 오랜만에 그 이름으로 불리는군.”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지만, 긍정이나 다름없는 반응이다.

“역시 당신이었어.”

“인사할 필요는 없다. 카논의 기사여.”

“인사는 개뿔. 잘 만났다. 이 개자식아!”

“크억! 갑자기 무슨 짓인가!”

이드는 여태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미라 영감, 아니. 만악의 근원 게르만의 목을 틀어쥐었다. 온몸이 말라비틀어져 미라와 같은 그의 목은 단숨에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대로 손에 힘만 주면 꺾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금방 재생할 목, 꺾어 봐야 무슨 소용일까. 무엇보다 이 인간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다.

꺾어도 나중에 꺾고, 태워도 나중에 태워야 한다.

그런 와중에 이드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게르만은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

상대가 카논의 기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논 제국 황궁의 심처에 있는 백악궁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기사라면 응당 카논의 사람일 테니.

그로서는 그 작은 방으로 인해 백악궁의 지하가 금지가 되고, 그로 인해 백악궁이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버려진 궁이 되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거기에 더해서 카논의 귀족이 설마 상대를 죽일 목적으로 외부인을 백악궁으로 안내하고, 금지까지 밀어 넣을 줄은 전혀 모를 터였다. “무슨 짓? 무슨 짓은 이런 짓이지!”

드드드득!

서늘한 웃음을 입가에 띤 이드가 게르만의 목을 당겼다. 그러자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며 게르만이 온몸을 퍼득거렸다. 가만히 있던 이드가 강하게 힘을 쓰자, 게르만과 고목 사이를 이어 주고 있던 통로가 무더기로 파괴되며 소리가 난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황궁 마법사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당장 멈춰라. 멈추라니까!”

“이젠 황궁 마법사도 아니면서, 무슨 황궁 마법사 타령이야!”

“옳다. 하지만 평생을 카논을 위해 몸 바친 내 권위를 무시할 참이냐!”

“권위는 개뿔. 어차피 난 카논의 기사도 아니거든? 카논의 권위는 카논 기사를 붙잡고 찾아보든가!”

드득. 드드득!

“무어…… 외부인이 어떻게? 아니, 외부인이라도 좋다. 멈춰라. 지금 멈추지 않으면 넌 그대로 죽는다.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말이다!”

다급하기보단 차라리 간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게르만이 소리쳤다.

그에 이드는 게르만이라는 이름에 끓어올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당기던 것을 잠시 멈췄다.

경고를 경계해서가 아니었다. 급히 떼어 내려다 행여나 그가 죽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혼돈의 파편을 깨워 세상에 멸망이라는 절대 위기를 가져온 만악의 근원. 수만 번 죽여도 모자라지만, 그전에 저 입으로 들어야 할 것이 많다. 혼돈의 파편이 말했던 그와의 ‘계약’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혼돈의 파편을 풀어 준 그가 왜 이곳에 이런 꼴로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이드의 행동을 게르만은 달리 해석한 모양이었다.

해서 그는 엄중한 경고를 담아 말했다.

“외부인이 어찌 이곳에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대는 즉시 이곳을 나가라. 카논의 황궁은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흥, 카논의 황궁이 뭐라고? 날 그 방까지 안내해 준 자가 누구일 것 같아서? 무엇보다 내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게르만.”

이드는 게르만을 향한 적대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으니까. 대신 말과 함께 거칠게 뜯어 낸 통로를 살피고, 게르만을 온전히 떼어 낼 방법을 궁리했다.

“그건 내가 해결해 주겠다. 손을 떼고 물러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그러면 그대는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꼴을 하고 있는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그럴 능력이 있다면 본인부터 구하는 게 어때?”

“・・・…그대는 애초에 그 방에서 옮겨진 적이 없다. 이 공간은 그 방에 덧씌워진 것. 그대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실로 씁쓸하구나.”

“왜, 억울하다고 할 참인가?”

“최소한 내 기억으로 그대에게 원한을 산 일은 없다.”

이드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르만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는 진한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죄인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분위기는 있는 대로 잡더니. 결국 혓바닥만 나불댔던 것이군. 그래, 이런 인간일 것 같았다.”

“나를 계속 조롱할 참인가?”

“혼돈의 파편. 그들에 대해 모른다 말하지는 않겠지?”

“……”

이드의 입에서 나온 다섯 글자.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게르만의 호흡이 멈췄다. 원래도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었지만, 이젠 완전히 멈췄다.

그에 더해 검게 죽어 있던 피부가 눈에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 갔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기 때문일까.

게르만의 눈이 초점을 잃고 낙엽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기를 한참.

그의 입술이 어렵게 다시 열렸다.

“그…… 그대가 어떻게………… 혼돈의 파편을 나를.”

“아느냐고? 그야 알 수밖에 없지. 세상 누구보다 혼돈의 파편 때문에 제일 큰 고생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나거든! 바로 당신 덕분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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