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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80화


1215화

말이 천벌이지, 두 사람의 죽음은 그야말로 인과응보다.

이드를 함정으로 밀어 넣은 톤 자작은 그 자리를 바로 떠나지 않았다.

사라진 감찰관을 찾기 위해 방문할 바벨에 내밀 변명거리를 준비하려면 미리 입을 맞춰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바로 떠나지 않은 까닭은 변명을 뒷받침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지체가 자신의 죽음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개자식들이 너무 편하게 죽었군요.”

보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그들의 마지막 그에 대한 피터의 감상이었다. 바벨은 죄 없는 초인을 희생시킨 자들에게 결코 편한 죽음을 내리지 않기에 나온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아깝기도 하고요.’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말에 이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벨에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톤 자작을 이용하자고 말해 놓고, 내 손으로 날려 버렸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애초에 이드 님이 아니셨다면 톤 자작이 줄기인 줄도 몰랐을 겁니다. 거기다 톤 자작이 없어도 이드 님께서 찾아 주신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놈들 꽁무니만 잘 쫓아도 결과는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이드를 탓하기엔 그의 도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톤 자작이나 오늘 밝혀진 콘펌 남작이라는 거물들이 사라진 게 전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런 거물까지 함께 엮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었다. 사건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고 그만큼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뒤를 캐 볼 놈도 아직 많이 남았다.

하지만 이드도 말로만 미안하다고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톤 자작을 잃은 건 아쉬울 만하죠. 그래서 말인데, 바벨에서 솔론 단장을 만나 보는 건 어떨까 싶어요.”

“톤 자작의 기사단장을 말입니까?”

“네 톤 자작과 같은 카논무파의 사람이면서, 급사해 버린 톤 자작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지 않습니까. 당장 톤 자작의 빈자리를 채우기에는 딱이지 싶은데요.”

톤 자작이 갑자기 죽어 버렸기에, 그가 하고 있던 일도 모두 멈춰 버린 상황이다.

그걸 언제까지고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누군가 톤 자작을 대신해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장 외부인을 넣어서는 상황 파악에만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 톤 자작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론 단장이라면 어떨까? 그라면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따로 시간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피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의 말대로, 자신이 카논무파의 수뇌라도 당장 외부인을 넣기보다는 솔론 단장으로 톤 자작의 빈자리를 채우게 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추후에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집어넣더라도 말이다.

“확실히….. 솔론 단장도 작위가 없다 뿐이지, 톤 자작의 기사로서 꽤 명성이 높기는 하지요. 운이 좋으면 아예 톤 자작의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겠고.”

“대외적으로 활동할 작위가 없긴 하지만, 작위야 내리면 그만이고요.”

평민들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얻고 싶어 하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이드와 피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게 또 사실이기도 했다.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갈망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작위이지만, 능력이 있고 쓸모가 인정된다면 또 너무나 쉽게 얻는 것이니까.

카논무파의 힘이라면 남작이나 자작의 작위쯤은 어렵지 않게 솔론 단장에게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솔론 단장이 카논무파에 인정을 받아야겠지만,

“솔론 단장을 유능한 인간으로 만드는 정도는 저희가 나서면 간단하지요. 흐흐흐.”

“그럴 겁니다. 해쉬와 바인의 일을 안타까워하던 걸 보면, 잘만 구슬린다면 충분히 바벨과도 손을 잡아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드 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더 믿음이 가는데요?”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믿지는 마시고요. 어디까지나 느낌이 그렇다는 거니까.”

잘만 하면 톤 자작을 파는 것보다 더 쉽게 카논무파를 살필 수도 있다.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길이 보인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문제라는 것도 바벨이 나서면 해결하지 못할 게 없다.

아무렴 솔론 단장도 어둠에 숨은 카논무파보다는 바벨이라는 초국가적 조직에 속하는 편이 더 안정적이지 않겠는가.

“이 일은 정리되는 대로 즉시 라울 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톤 자작과 콘펌 남작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지에 대한 관찰에, 솔론 단장과의 협력까지. 덕분에 일거리가 늘었습니다.

“라울에게도 슬쩍 언질을 해 뒀으니, 허가는 금방 나올 겁니다.”

“하하하. 다행입니다. 보고서의 양을 좀 줄여도 되겠어요.”

약한 소리를 하는 피터지만, 사실 엄살은 아니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허가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부를 납득할 만한 자료가 필요했다.

한데 이드의 말은 그 부분을 벌써 해결했다는 의미였다.

일거리가 많다는 것도 그렇다. 솔론 단장은 몰라도, 톤 자작과 콘펌 남작의 후임에 대해 살피는 건 분명 누구의 명령이 아니라 피터가 찾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고생을 찾아서 하는 격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차피 해야 할 업무이기는 했다.

일개 병사도 아니고, 황궁의 안팎에서 제법 주목받던 사람들의 후임이다. 아무리 점조직의 형태라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조직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고, 자연히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눈치 싸움이 없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콘펌 남작과 톤 자작의 공석은 그들에게 꽤 탐나는 자리일 테고.

자연히 욕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만간 벌어지는 갈등과 연관된 인간은 백이면 백, 카논무파일 게 뻔하다. 이러니 바벨에서 이번 기회를 그냥 단순히 보고 넘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명령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피터 자작에 일복이 터진 건 확실하니까. 나중에 라울을 통해서 외식비라도 좀 보내 줘야겠네.”

사실 이드가 피터 팀의 외식비를 챙길 이유는 없다.

이드가 아니라도 어차피 카논무파를 살피는 일은 바벨의 몫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도 일이지만, 이번 백악궁이 날아간 사건 때문이다.

워낙 대형 사고인 만큼 황궁에서도 조사를 나설 것이고, 이드를 포함해서 백악궁을 찾아 들어간 세 사람의 이름을 알아내는 건 금방일 터였다. 자연히 이드의 지인으로 알려진 피터 자작에게도 황궁의 조사가 들어갈 테니, 그 때문에도 상당히 시달리게 될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외식비는 그 고생에 대한 수고비였다.

물론 당사자인 피터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길었던 통신을 마치고 방을 나선 이드의 눈에, 달 아래 높이 솟아 있는 아나크렌의 황궁이 들어왔다.

그렇다.

그림자 관을 탈출해서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이드는 어느새 안티로스의 저택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 황궁의 그림자를 바라보던 이드는 곧 지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은 발걸음 소리가 울릴 정도로 조용했다. 갑작스러운 이드의 방문. 그 덕에 기사들은 최고 등급의 경계 상태에 들어서 있었다.

단순히 이드 일가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 손에 게르만이라는 인물까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존재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결코 방심할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 혼돈의 파편이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

은색 기사단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코 막아 낼 수 없는 괴물들. 하지만 쉴라는, 은색 기사단은 자기들이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지하실에 도착하자 라미아가 손을 멈추고 물었다.

이드는 그녀가 정리 중인 게르만의 유품들을 살피며 라울, 그리고 피터와 나눴던 대화들을 전해 줬다.

“나머지는 바벨에서 알아서 할 거고, 게르만의 유품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쓸만한 것이 있으면 남기려고 했는데, 없네요. 그래서 유골과 같이 신전에 넘기기로 했어요.”

“시르피도 그러자고 해?”

“유골을 신전에 넘기자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이 시르피인걸요.”

이드는 지금은 한 줌 재가 되어 로브에 감싸진 게르만을 보았다. 라미아가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관에서 벗어난 게르만은 결국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불쌍하다면 불쌍한 인생이지만, 죽기 직전 게르만은 오히려 상당히 기뻐했다.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의 멸망을 직접 보지 않은 것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일은, 자신이 불러들인 멸망으로 인해 세상이 끝장나는 걸 지켜보는 것이었으리라.

그게 아니라도 게르만을 마법 자판기 정도로 사용하던 혼돈의 파편을 생각하면, 게르만의 마지막은 그림자 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비록 지하라고는 하지만 이계가 아닌 그레센 대륙의 땅에서, 그것도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검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았으니. 그야말로 만족스러운 마지막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시르피가 은근히 어른스럽단 말이지.’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예요? 따지고 보면 우리 중 가장 연장자가 시르피인데. 당연한 거죠.”

잠시 같은 시간대를 살았지만, 이드는 엄밀히 말하자면 그저 시간을 건너뛰었을 뿐이니까.

“아니, 우리 중 가장 연장자는…………….”

“저나 일리나 이름이 나오면 죽일 거예요!”

농담 빼고, 살기가 뚝뚝 흐르는 라미아의 눈을 본 이드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아무렴 사소한 진실 하나에 목숨까지 걸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크흠. 당연히 아니지. 내가 말하려던 건 스케스틱이었다고. 레어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아직 연락 없지?”

“없어요. 아마 살펴볼 게 한둘이 아니겠죠.”

‘스케스틱’은 이드와 함께 그림자 관을 탈출해 나온 그린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안티로스까지 동행한 그는 저택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당장 게르만을 신경 쓰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다고 했다. 레어로 돌아가 무언가를 살피고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중간계로 나오는 게 준비된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그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것만 서둘러 마친 후 돌아온다고 했던 스케스틱이었지만,

자정이 넘은 지금까지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설마 벌써 혼돈의 파편과 부딪히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재수 없는 일이 쉽게 일어나겠어요? 우리가 저쪽을 쉽게 찾지 못하는 것처럼, 저쪽도 우리를 쉽게 찾을 수 없을 텐데요. 아마 스케스틱이 이쪽으로 나온 사실도 아직 모를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렴 혼돈의 파편이 외계로 뚫어 놓은 구멍이 닫혔다. 저들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운 사건에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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