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81화
1216화
천하의 혼돈의 파편이더라도, 예상치 못하게 외계를 향한 구멍이 뚫렸으니 당연히 누가 나가고 들어갔는지 알지 못하리라. 하고 많은 드래곤 중 스케스틱을 특정해 찾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드래곤이잖아요. 아무렴 쉽게 당할 리가 없다고요.”
“그 말도 맞네. 드래곤이 작정하고 도망치려고 하면 막기 힘들지.”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뒤로, ‘만약 그 정도 도망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라면 일찍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죠.’ 하며 혼잣말을 조용히 중얼거리는 라미아의 분위기가 제법 사납다.
그야말로 ‘우리 혈족은 무조건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외치는 명가의 꼰대 같은 모습이랄까?
‘그런 건 싫은데……………’
와이프가 꼰대라니. 남편 입장에선 꿈에서도 기겁할 일이다. 덕분에 이드는 드래곤들과 거리를 둬야 할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그런데, 시르피는?”
“연무장 쪽으로 가는 것 같았어요.”
“이 와중에 연무장이라니. 거긴 갑자기 왜?”
게르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함께 듣고, 그 마지막을 지켜본 그녀였다.
라미아가 한숨을 쉬었다.
“게르만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에요. 이드가 가 봐요. 대화 상대가 필요한 것 같은 분위기던데.”
“그런 역할은 쉴라 경 담당 아니었어?”
“아무리 가까워도 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잖아요. 게다가 게르만으로 인해 아나크렌 제국이 한창 시끄러웠던 시절엔 쉴라 경은 태어나지도 않았고요.”
“그게 또 그런가. 음・・・ 연무장이라고 했지? 그럼 슬쩍 한 번 가 볼까. 여기서 내가 도와줄 건 없지?”
“그럼요. 가서 얘기나 잘 들어 주고 와요.”
이드는 자신을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라미아에게 남은 정리를 부탁하고는 지하실을 나서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길목에 서 있던 쉴라가 그런 이드를 보곤 연무장을 손짓해 보인 뒤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검후를 잘 부탁한다는 뜻 같았다.
검후는 연무장 가운데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미아의 말과 쉴라의 손짓에서 읽히던 걱정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생각보다 맑아 보였다. 발소리를 죽이지 않고 다가선 이드가 그녀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없지만, 별이 가득한 하늘은 흘러가는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왜 나오셨어요?”
검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서 물었다.
“라미아가 가 보라고 하더라고. 요 앞에 있던 쉴라 경도 걱정하는 것 같고.’
“히힛, 기분 좋네요.”
“갑자기?”
이드는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검후에 영문을 몰랐다.
“절 걱정해 주신 거잖아요. 우리 백작님이 떠나고, 또 제가 검후로 불리기 시작한 뒤부터 지금 이드 님처럼 절 걱정해 준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건 쉴라 경이나 은색 기사단이 들으면 섭섭해할 발언인데?”
검후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모두가 죽었을 거라며 고개를 흔들었을 때조차 발이 부르트도록 온 대륙을 뒤지고 다니던 은색 기사단이 아니던가.
그런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검후가 포근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하지만 절 향한 그 아이들의 마음은 윗사람에 대한 존경을 담고 있어서 조금…… 어려워요. 하지만 이드 님은 절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시잖아요. 이젠 없는 어마마마나 황제 오라버니처럼.”
“음, 그런 면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겠네.”
가만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본 이드도 결국 검후의 말을 인정했다. 아무래도 시르피의 어린 시절 첫인상이 지워지지 않은 이유가 컸다.
더욱이 아무리 실력이 좋아졌다 해도, 이드가 보기에는 시르피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보호해 줘야 할 동생 같은 느낌이 컸다. 무엇보다 갇혀 있던 그녀를 구한 것도 이드가 아니던가.
“그 마음 자세의 차이가 아주 커요. 제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지금 기댈 곳이 필요해?”
“그렇지는 않아요. 조금 전까진 마음이 소란스러웠는데, 이젠 괜찮아졌어요. 아무래도 그를 보니 옛날에 오라버니와 했던 고생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렇겠지. 당시 사건들에 게르만의 영향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
오래전, 시르피는 이후 황제가 되는 오라비와 함께 쫓겼었다. 당시는 단순히 황좌에 대한 권력욕 때문에 혈육을 향해 칼을 든 공작의 반란이라고 여겼지만, 그 속에는 게르만의 영향이 분명 있던 것이다.
당장 그 직후 이어진 카논 제국과의 전쟁도 있었으니까.
사실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를 통해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으리라.
“그가 절 향해 아나크렌 제국의 황녀냐고 묻는 순간, 참 오랜 시간이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삼 나이 들었다는 실감이 나서?”
“흐흥~ 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괜찮지만,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여자들에게 인기 없어요.”
“그래 주면 오히려 나야 고맙지. 난 라미아와 일리나만 있으면 되니까. 이번에 카논에 갔을 때도 눈치 없이 들이대는 아가씨들 때문에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어머나, 세상에, 라미아와 일리나가 옆에 있는데도 그랬단 말이에요? 도대체 얼마나 자존감이 높으면 그게 가능한 거래요?”
“나야 모르지.”
순진한 얼굴을 한 이드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검후가 그 어깨를 두드리며 ‘어머나’를 연발했다. 조금 전 센티한 기분에 빠져 있던 귀부인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수다쟁이 아주머니가 된 것 같다.
그래도 분위기 전환은 확실히 된 것 같아 이드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랬다면서? 게르만을 신전으로 보내라고.”
“그림자 관이었나요? 그 어둡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수십 년을 갇혀 있었다면서요. 그 정도면 조금이라도 죗값을 받지 않았나 싶었거든요.”
“감금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야?”
“아하하. 맞아요.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요. 대충 처리했다가 마족이나 몬스터로 되살아나는 것도 싫으니까요.”
아무렴 이젠 불사성도 사라졌으니 그럴 염려는 없지만, 확실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죽은 자에 대한 자비라. 잘했어.”
“고마워요. 그런데, 이드 님은 게르만의 이야기가 별로였나 봐요. 그의 이야기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던데.
“그렇게 티가 났어? 어쩔 수 없지. 대부분 알고 있던 사실들이니까. 그 외는 딱히 큰 의미도 없는 정보들이 대부분이고.”
“아쉬우셨겠어요.”
“그렇지. 하지만 대신 놈들이 사용하는 구멍 하나를 막아 버렸으니까. 그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지. 더욱이 써먹을 수 있는 전력도 하나 늘었고.”
“스케스틱 님 말씀이죠? 저도 이드 님을 만나고 기대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다시 드래곤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드래곤 로드와의 인연 때문일까.
드래곤에 대해 말하는 검후에게선 그들에 대한 두려움 대신 오직 반가움만이 가득했다.
“지금은 그 하나지만, 나머지가 돌아오는 것도 머지않았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지금처럼만 하시면 될 거에요.”
걱정하지 말라며 단단히 다짐하듯 말하는 이드의 팔을 슬쩍 껴안아 팔짱을 낀 검후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드래곤보다 곧 있을 토벌을 먼저 처리해야겠죠? 어쩌면 그 안에도 혼돈의 파편 하나가 박혀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거・・・・・・ 뒤로 밀리는 거 아니었어? 마스가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며.”
“그랬죠. 그렇지만 억지는 마스만 부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무엇보다 이드 님이 누구인지 몰랐다면 몰라도, 우리 황제 조카님이 이드 님은 물론 혼돈의 파편이 어떤 존재들인지도 확실히 알았잖아요. 어설프게 발목 잡힐 이유가 없죠. 아마 대륙은 우리 제국이 막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게 될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 어쩐지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인데.”
이드는 시큼털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제국이 부리는 억지라니. 어쩌면 그만큼 무서운 말도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그런 지배자들을 대부분 폭군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이드의 표정이 재미있었던 것일까. 검후가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지만, 기분이 풀린 건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 라미아가 내준 임무를 완수한 이드는 그 뒤 검후와 함께 좀 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밝았다.
해님이 얼굴을 내밀고, 조용하던 거리에는 활기가 돌았다.
하나 저택의 분위기는 반대였다. 전날 꼬박 밤을 새운 기사들은 해가 뜬 후에야 휴식에 들어갔다. 그것도 모든 기사가 아니라, 교대로 돌아가면서 말이다.
“낮이라고 방심할 수는 없죠.”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 이미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알 정도로 큰 전투만 두 번이었다.
“그래도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쉬게 하렴. 언제 토벌대가 출발할지 모르잖니.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드 님이 계신걸.
“은색 기사단의 기사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검후님의 말씀처럼 굳이 불필요하게 무리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최소 인원만 남기고 휴식을 명령하겠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처럼 날을 세우고 있던 쉴라였지만, 그런 그녀도 검후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얌전한 소녀일 뿐이었다.
검후는 그런 쉴라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린 후 식탁 앞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게르만과 그가 가져온 정보에 대해서 황제께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런 걸 굳이 내게 물을 필요 있어? 그렇게 해. 알려지면 곤란한 사실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드는 그게 뭐 중요하냐며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사실 그딴 것보다는 당장 검후 뒤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쉴라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오는 중이다.
과연 저 붉어진 얼굴은 부끄러움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수치심에서 오는 것일까.
물론 절대 그에 대해 입 밖에 낼 생각은 없다. 그랬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아침 식사 시간부터 칼부림이 날 테니 말이다.
아무렴 쉴라를 놀리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 듯한 저 스폴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나저나 스케스틱 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걸까요?”
쉴라에게 황녀의 방문을 요청하라 명한 검후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말했을 때였다.
“날 기다린 건가? 할 말이라도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