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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82화


1217화

듣기 좋은 미성이지만, 감정이 담기지 않아 냉정하게 느껴지는 남성의 목소리.

그러나 이 자리에 허락된 남자라고는 오로지 이드뿐이 아니던가.

“누구냐!”

스릉.

목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쉴라와 스폴의 검이 조금 뽑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존재 중 둘보다 약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 두 사람은 가장 앞에 나설 터였다. 그나마 검을 완전히 뽑지 않은 것은 이드 등의 실력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두 사람이 노려보는 곳에는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남자가 있었다.

가지런한 눈썹과 그 아래 초록의 눈동자, 오만하게 솟아오른 콧대와 붉은 입술까지. 목소리만큼이나 잘생긴 남자였다.

그를 본 쉴라가 검을 갈무리했다.

그와는 전날 안면을 텄기 때문이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스케스틱 님.”

“아! 단장, 그럼 저분이?”

하나 스케스틱을 대면한 것은 검후와 쉴라 뿐이었다. 이야기만 듣고 실제로는 첫 마남인 스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스케스틱을 훔쳐봤다.

정작 스케스틱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본 척도 하지 않았지만.

“검후여, 궁금한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스케스틱 님께 듣고 싶은 것이라면 많지요. 세레니아 님의 소식은 특히나 더요.”

“그런가. 그렇다면 기다려라. 그대의 궁금증은 이드 님과의 대화 후에 풀어 주겠다. 허락해 주신 덕분에 레어를 살피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기계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답한 스케스틱.

하지만 대화 상대를 이드로 바꾸는 순간 그의 태도는 매우 정중해졌다.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드는 자신이 아는 그 어떤 드래곤과도 판이한 스케스틱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며 답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제게 따로 허락을 구하실 이유가 없는 일입니다.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고. 그보다,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면 같이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드 님께서 권하신다면 그러겠습니다.”

스케스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블에 일 인분의 식사가 추가되었다.

깨작거릴 것 같은 모습과 달리, 잘 구워진 고기를 향한 스케스틱의 칼질은 과감하고 거칠었다.

칼질 한 번에 고기의 삼분의 일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이드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바깥쪽에 있을 때,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드래곤은 음식 대신 마나를 섭취함으로써 생존이 가능하니까요. 그렇다고 음식을 아주 끊은 것은 아닙니다. 식료품을 가진 동족이 있어서 가끔 식도락을 즐길 여유는 되었습니다.”

“역시・・・・・・ 드래곤은 굉장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검후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스쳤다.

말이 좋아 마나를 섭취한다는 것이지, 생명체로서는 굶었다는 의미이지 않나. 정말이지 드래곤이 아닌 다른 종족이었다면 혼돈의 파편을 떠나 진작에 굶어 죽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가볍게 동정의 말을 꺼내진 않았다.

세레니아와 가깝게 지낸 덕분에 그건 오히려 그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드가 그런 검후를 대신해 스케스틱 앞으로 과일 접시를 밀었다.

“그나저나, 레어는 잘 돌아봤나요? 별일은 없었을 것 같지만,”

그저 말을 돌리기 위한 질문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어도 드래곤의 레어다. 쉽게 노출될 곳도 아닐뿐더러, 침입은 더더욱 힘든 곳이었다.

더욱이 누군가 레어를 털었다는 소문은커녕 드래곤을 봤다는 소문 한 조각도 없었지 않던가.

한데 당연한 대답을 기대한 질문에 스케스틱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끼이익.

이드는 스케스틱의 손에서 진흙처럼 구겨지는 포크와 나이프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별일이 있었나 봅니다?”

“사실 레어를 돌아보는 것뿐이었다면 훨씬 빨리 복귀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제 돌아가 보니, 제 레어가 털렸더군요.”

고철이 된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입을 닦은 스케스틱의 말에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드래곤의 레어를 털었단 말인가!

드래곤의 레어에 금은보화가 넘쳐난다는 것은 젖먹이 아기 말고는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조금의 양념만 더하면 실로 작은 나라를 살 정도의 보물이 쌓여 있는 곳이 드래곤의 레어인데.

“도대체 어떤 놈이 그렇게 억세게 운이 좋은…..”

“…… 당장의 운이 좋을진 몰라도, 멍청한 놈이군요. 뒷감당은 생각도 하지 않고 레어를 털다니.”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스폴의 말을 끊은 쉴라였다.

그제야 스폴도 드래곤이라는 재앙급의 후환을 깨달은 듯 뜨악한 표정이 되어서는 급히 입을 열었다.

“혹시 벌써 도둑을 잡으셨나요? 지금 돌아오신 것도 도둑을 잡아 처벌하느라 늦으신 거고요?”

스폴은 스케스틱이 관련자를 모두 찾아내어 껍질을 벗기는 상상을 하며 물었다.

스케스틱이 범인을 잡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드래곤의 능력이라면 이것조차 가벼운 처벌이 되지 않을까.

과연 드래곤이 레어를 턴 도둑에게 내릴 수 있는 처벌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에 각자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장면을 하나씩 그리고 있을 때, 스케스틱이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잡지 못했다. 정확히는 잡을 수 없었다는 말이 옳을 것 같군.”

“그 말은, 누가 레어를 털었는지는 특정을 했다는 겁니까?”

도둑놈이 누군지 알아내고도 잡을 수 없었다고? 드래곤이 잡을 수 없는 도둑놈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마침 이 그레센 땅에는 스케스틱도 쉽게 어쩔 수 없는 자들이 있지 않던가.

“설마 레어를 턴 도둑이……”

“짐작하신 대로, 혼돈의 파편입니다.’

“하…… 하하. 아니, 미친놈들….. 하다 하다 도둑질을..”

설마 하던 그 이름이 스케스틱의 입에서 나오자 이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밑에서 이런저런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레어를 털었다니.

이건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결국 도둑질이 아닌가.

“그거 확실한 거예요? 증거 확보했어요?”

라미아가 물었다.

혼돈의 파편을 체포할 것도 아닌데, 증거가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그레이드론 님의 딸이여, 증거는 없습니다. 하나 현 대륙에, 레어가 있는 고산지대 깊이 들어와 수많은 마법을 파괴하고 봉인해 놓은 암석까지 녹인 후 레어를 털어 갈 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응당 그들이 아니겠습니까?”

“라미아로 좋아요. 그런데, 그 정도는 꼭 혼돈의 파편이 아니라도 가능하지 않나요?”

“물론입니다. 능력으로 보자면 엘프를 가장 의심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드는 순간 자신 옆에 앉은 일리나가 움찔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스케스틱의 눈은 전혀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

“종족의 특성상 엘프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드워프 역시 동기가 모자라며, 능력적으로도 떨어집니다. 다른 종족들 역시 마찬가지.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단연 인간족이지만, 이들 역시 아닙니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인간의 욕심이라면 눈앞에 보물이 있다면 일단 저지르고 봤을 텐데요.” 

검후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지혜롭지만, 때론 멍청할 정도로 욕심에 눈이 머는 것이 바로 그들. ‘인간’이었다. 눈앞에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면 이후에 드래곤이 찾아올 것을 알아도 일단 손을 대고 봤을 것이다.

스케스틱은 바로 그 때문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후여, 그대의 말이 옳다. 하지만 바로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을 제외했다. 인간의 그 끝없는 욕심이라면 드래곤의 레어가 아니라 저 깊은 마계의 마왕성의 보물고를 털고도 남겠지.”

“그러니까요.”

“그래서 나는 다른 동족들의 몇몇 레어를 더 확인했다. 인간이라면 내 것 하나로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주인 잃은 레어 하나를 털었다면 혹시 다른 곳도? 하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털리지 않았더군. 모든 곳을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레어에 침입의 흔적이 없었다.”

저 깊은 고산지대에 있는 스케스틱의 레어를 찾아낸 인간이라면, 다른 레어를 찾지 못해 털어먹지 못한 것은 아니리라.

“거의라면, 털린 곳도 있긴 있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이드 님과 라미아 님도 아시는 라일로시드가의 레어가 비었더군요.”

“윽…….”

이드는 자신의 신음이 너무 크지 않았는지 불안에 떨었다. 세상에 설마하니 여기서 저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짧은 순간, 그와 라미아의 눈빛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아니, 거긴 왜 가고 그랬대?’

‘어쩌죠? 들킨 걸까요?’

‘모르지. 일단 혼돈의 파편이라고 말했잖아. 저 성격을 보라고. 우리가 손댄 걸 알았으면 대놓고 말을 했겠지.’

‘그러게 제가 시간 날 때 서둘러 갔다 오자고 그랬잖아요!’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따로 마음으로 말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일순간 서로의 뜻이 저절로 읽혔다. 그야말로 두 사람의 마음이 최고로 잘 통하는 순간이었다.

라일로시드가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판단에, 충동적으로 챙겼던 보물들이었다. 그야말로 그의 유산을 정리한다는 느낌으로 챙긴 것이, 이제 와 도둑질이 되어 버렸다.

드래곤들이 돌아올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털었던 물건을 돌려놓으려 했지만, 중간에 워낙 이런저런 사건이 많다 보니 지금까지 늦어지고 말았는데.

하필 그것이 스케스틱에 의해 발각될 줄이야.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이름이 스케스틱의 입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정도 되면 도둑의 흔적을 찾을 만한 방법은 많다. 당장 대지의 기억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되니까.

자신들이 그때 대 마법 처리를 하고 있었던가?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 스케스틱의 말이 이어졌다.

“그의 레어는 제 레어보다 더 깔끔하게 털렸더군요. 분명히 말해 인간의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 경험이 쌓였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혼돈의 파편이 왜 레어를

“그들이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도, 대륙에서 활동하려면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이없어하는 검후에 스폴이 답했다.

그에 이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야말로 범죄 현장으로 되돌아온 범인의 심정이 이럴까.

“그럼 라일로시드가의 레어에도 흔적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제 레어에서도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이로서 놈들을 죽여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감히… 레어에 손을 대다니!”

“……휴우…….”

복수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을 비치는 스케스틱을 앞에 두고 이드와 라미아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했다.

‘조만간……’

‘・・・・・・ 들러서 흔적을 지우자.’

이미 털었던 물건을 돌려놓을 타이밍은 지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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