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83화
1218화
이미 물은 쏟아졌다. 이젠 의심을 사실로 바꿔야 할 때다.
어차피 서로 못 죽여 안달인 관계다. 만나면 테이블에 앉아 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가지고 입씨름이나 하는 시시한 사이가 아니라, 일단 대가리를 향해 필살의 일격부터 날리는 사이가 아니던가.
더욱이 상대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존재들이다.
죄를 덮어씌움에 있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낄 필요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차피 죽일 놈들이니까.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처리해야 한다.
이드는 제 목소리가 떨리는지를 신경 쓰며 말했다.
“우리가 두 분의 레어에 가 볼 수 있겠습니까?”
“레어에 말입니까?”
“네. 스케스틱 님이 확신하실 정도이니만큼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혼돈의 파편이 손을 쓴 일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오케이!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잘했어요.’
말을 마치는 순간 머릿속으로 영화 감독에 빙의한 라미아의 칭찬이 뛰어 들어왔다.
이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조마조마하게 스케스틱의 대답을 기다렸다.
범인이란 놈들이 왜 멍청하게 범죄 현장을 다시 찾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래서가 아닐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는, 싫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드와 라미아의 사정을 모르는 스케스틱은 무심히 요청을 허락했다.
“이미 털린 레어에 의미는 없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일반적으로 드래곤은 동족도 자신의 레어에 잘 들이지 않는다. 긴 수면기를 가진 드래곤에게 있어 레어는 그만큼 중요하고 귀중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같은 드래곤일지라도 초대를 꺼리는 편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스케스틱의 말처럼 어차피 한 번 털려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그 존재와 위치가 발각된 레어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심지어 스케스틱의 경우 이미 새로운 자리를 봐 두기까지 한 상태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야말로 원치 않은 이사를 끝낸 빈집이나 마찬가지. 요청을 들어줌에 있어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이다.
“오늘내일 중으로 방어 시스템의 철거도 끝낼 것이니, 그 후라면 편히 살펴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방문 허가를 넘어 아예 문까지 활짝 열어 주는 스케스틱이다.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도 살펴볼 생각입니다만.”
“그곳은 방어 시스템이 살아 있지만, 제 레어가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대기는 곤란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죠.’
“하긴, 방어 시스템 정도로 두 분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라일로시드가를 대신해 여러분의 방문을 허락하겠습니다. 그리고.”
뭐지?
이드는 갑자기 말을 끊은 스케스틱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망신을 당할까 무서웠다.
혹시 스케스틱은 이미 사실을 알고서 미끼를 던진 것은 아닐까. 나중에 세레니아와 라일로시드가가 돌아오면 그 둘을 어떻게 보지? 이래서 죄짓고는 못 산다고 하는 걸까.
그야말로 수초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드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러나 다행히 이어지는 스케스틱의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라일로시드가를 말할 때처럼, 저도 스케스틱으로 충분합니다.”
“하, 하,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도 이드로 충분합니다. 라미아, 일리나도 괜찮죠?”
“전 찬성이에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쓸모없는 인간식 예의 따위 고집할 필요가 있나요.”
“저도 좋아요.”
라미아와 일리나도 허락했다.
그렇다고 반말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꼬박꼬박 이름 끝에 님 자를 붙이던 걸 빼겠다는 정도다. 아무렴, 서로 얼마나 안다고 말을 놓을까. 라미아의 말처럼 완전한 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배분을 따질 수 있는 동족이나 가족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요구를 스케스틱이 먼저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간계의 수호자이자 지배자. 가장 오래된 종족. 영원히 경외 받기만 하던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다. 길고 긴 대륙 역사에 드물게나마 드래곤과 친분을 나눈 존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드래곤이 먼저 숙이고 다가간 경우는 지금이 처음 아닐까.
검후는 그것이 부러웠다.
“어머나, 부러워라.”
드래곤 로드 세레니아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는 그녀도 이런 대접은 받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장 아나크렌의 황제가 이 자리에 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저도 거기 끼워 주시면 안 되나요?”
“검후여, 그대에겐 아직 자격이 없다. 격을 더 높인 후에 말하라.
“칫.”
그래서 철없는 척 끼어들어 보지만, 스케스틱에겐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새 빈 접시가 치워지고, 그 자리에 차와 음료가 나왔다. 해는 높아졌고, 창문이 열리며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방의 인원 구성도 바뀌었다. 황궁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스폴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저택과 황궁 사이에는 연락선이 놓여 있었다. 검후와 황제가 오해를 푼 후 황녀가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는데, 바로 지금이 그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게르만의 일도 그렇고, 카논의 일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드래곤인 스케스틱이 이 자리에 있지 않은가.
당장 황제가 안다고 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그럼에도 검후는 상대가 황제이기 때문에 꼭 알아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스케스틱 님이 나오셨으니, 다른 드래곤도 곧 돌아온다. 그렇게 되면 언제 어느 곳에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른다. 혼돈의 파편과 드래곤, 그리고 이드의 싸움이다. 제국간의 전쟁보다 위험하면 위험했지, 절대 그보다 못하지 않아. 이럴 때는 전력을 다해 사방을 살펴 피해가 최소한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황제가 해야 할 일이야.’
앞서 황제에겐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임을 알렸고, 혼돈의 파편이 어떤 존재인지도 말했다.
그에 경각심을 가지기는 했을 테지만, 글쎄.
과연 그것이 피부로 와 닿았을까 하는 부분에선 내심 고개를 젓고 싶은 검후다. 말로 전해서 다 될 것 같았으면 탁상행정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스케스틱을 눈앞에 두면 아마 위기감을 절절히 깨닫게 될 터였다. 드래곤의 존재감이란 그야말로 엄청났으니까.
‘하는 김에 이드 님을 통해 스케스틱 님에게 드래곤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 모습을 보면 아마 녀석이 까무러치겠지?’
갑자기 옛 추억이 떠오른 것일까. 검후는 어떤 방법을 써야 황제의 흑 역사 랭킹을 갱신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황제의 기저귀를 갈아 준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클래스였다.
그렇게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검후를 깨운 것은 이드의 목소리였다.
“그럼 배도 채웠으니, 궁금한 걸 좀 들어 볼까요?”
스케스틱을 바라보는 이드는 내심 기대감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르만과 달리, 스케스틱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모두 새로운 사실들일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저희 상황에 대해 알려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서로가 가진 정보의 교환은 중요하죠. 하지만 다른 것들에 앞서, 세레니아와 라일로시드가에 대한 것부터 말해 주겠습니까?”
이드가 움직인 만큼 혼돈의 파편 쪽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과연 그 변화가 세레니아와 라일로시드를 포함한 드래곤들에게 어떤 파장을 미쳤을지 조심스러웠다.
물론 세레니아의 요청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무작정 안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다행히 스케스틱의 입에서 불행한 소식이 나오지는 않았다.
“로드와 라일로시드가 모두 건재한 상태입니다. 누가 뭐래도 저희 전력의 핵심이지요. 제가 대륙으로 돌아오기 직전에도 전선을 밀어내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그때 그곳에서 스케스틱이 파편 중 하나와 싸우고 있던 것이 우연이나 사고가 아니었군요?”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아쉬웠다.
저 말에 따르면 대륙으로 넘어오는 것이 스케스틱이 아닌, 세레니아나 라일로시드가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스케스틱이 싫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왕 전력이 추가될 거였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그 둘 중 하나면 더 좋았으리라는 의미.
하지만 그런 마음을 티 내서 스케스틱을 섭섭하게 하지는 않았다.
안다고 해서 저 무감정한 스케스틱이 서운해할 것 같지도 않지만.
좌우간 세레니아와 라일로시드가의 소식을 시작으로, 외계의 소식을 간단히 들을 수 있었다.
검후의 요청 때문이었다.
스폴의 연락이 갔으니 어쩌면 황제가 직접 걸음 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를 또 해야 하는데.
과연 스케스틱이 황제를 위해 그런 수고를 또 해 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전해 주는 간단한 소식만으로 꼭 알아야 할 일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드래곤들이 밀려난 외계의 환경이라거나.
혼돈의 파편이 대륙으로 돌아가려는 드래곤을 어떻게 막고 있었는지. 또 그들을 쓰러트리기 위해 드래곤이 어떻게 싸워 왔고,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도.
“드래곤 측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텐데. 그럼에도 결국 드래곤 쪽에서도 희생자가 있었군요.
이드는 드래곤 족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 옆에선 라미아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단순히 말뿐 아니라, 드래곤을 같은 일족으로 여기고 있는 라미아다.
어쩌면 이드도 이런 라미아의 모습 때문에 드래곤의 죽음이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숫자는 적었지만, 혼돈의 파편은 강했습니다. 매우.”
“사실…”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각각의 개체로는 어떨지 몰라도, 일족의 전력이 모였다면 혼돈의 파편도 충분히 상대해 볼 만했을 것 같은데요.”
더욱이 드래곤을 막고 선 혼돈의 파편은 그들의 전력도 아니었기에 이드의 이런 의문은 단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매우 강했다고. 대륙에 있을 때와 외계에 나갔을 때, 혼돈의 파편이 발휘하는 힘의 크기가 달랐습니다. 반대로 일족이 쓸 수 있는 전력에는 미미하지만 손해가 발생하더군요.”
결론만 말하면 외계에서 혼돈의 파편은 강해지고, 드래곤은 약해진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로드께선 속성의 부재를 그 원인으로 꼽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일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가 외계에선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속성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정령이라면 진작 소멸되었을 공간. 아니, 애초에 존재할 수조차 없는 공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우리가 드래곤이라 내계로부터 속성력을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브레스도 뿜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스케스틱이 덧붙였다.
“과연. 알겠어요. 근본 원인은 세계의 백업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 이유라면 혼돈의 파편이 강해진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네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라미아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라미아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황제가 직접 저택을 방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