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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84화


1219화

저벅저벅.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발소리와 함께, 차르륵거리며 파도에 구르는 돌 소리가 났다. 곧이어 어두운 지하실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확인한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은색 기사단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은색 기사단이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일어들 나세요.”

지하실을 나선 황제,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온 황녀가 기사들에게 일어나라 명했다.

“명을 받듭니다.”

기사들이 원래 자리를 찾아 서고, 스폴이 앞으로 나섰다.

“은색 기사단의 스폴이 두 분을 안내하겠습니다.”

“반가워요. 스폴 경.”

“황녀 전하께선 어제도 뵈었던 것 같은데요?”

친근함을 표시하는 황녀에 스폴이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연 스폴이라고 할까.

황녀야 자주 보며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지만, 옆에 황제가 있음에도 크게 거리낌 없이 말을 던졌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모습을 건방지다 여기지 않았다.

검후가 은색 기사단을 특별히 아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황녀가 검후에게 무공을 배우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은색 기사단은 황녀에게 있어 동문이나 다름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황녀에게 전해 듣기는 했으나, 다시 한번 묻겠다. 스폴 경, 지금 이곳에 게르만・・・・・・ 카논의 ‘그’ 마법사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숨을 거두고, 유골만 수습한 상태입니다.”

“마인드 마스터에 혼돈의 파편. 그리고 이제는 게르만인가. 갑자기 과거가 해일처럼 밀려오는 기분이로고.”

“…..”

삼사십 년 전 끝난 사건을 다시 들고나와도 어이없어할 판에, 무려 백 년 전 사건의 당사자들이 우르르 굴러 나오고 있으니.

그 모든 걸 살피고 감당해야 할 황제로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일단 게르만을 통해 밝혀진 것들이 있다 하니, 살펴야겠지. 안내하게.”

“이 층으로 오르시면 됩니다.”

목적지를 밝힌 스폴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러자 황녀가 황제를 지나 그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스폴 경은 게르만이라는 마법사를 직접 봤나요? 어떤 모습이던가요?”

마치 어린아이가 재미를 위해 던지는 것 같은 물음. 하지만 황제와 동행한 황녀의 질문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스폴은 머릿속에서 잠시 말을 고른 후에 답했다.

“이미 죽어 있는 자였습니다. 순리를 거슬러 영혼이 붙잡힌 상태였지요.”

“그렇겠죠. 백 년 전의 게르만도 노마법사라 불릴 만큼 나이가 많았으니까요. 그런 이를 이드 님이 잡아 오신 거로군요.” 

“……네. 이드 님이 잡아 오셨지요.”

스폴은 못말리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검후를 구해 온 것에 더해,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사실을 안 황녀는 이드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상태였다.

저택에 들를 때도 항상 이드의 행적에 대해 물었고, 혹시라도 이드의 소식이 들리면 영웅담을 듣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더랬다.

 ‘뭐, 충분히 그럴 만하기는 해.’

누가 봐도 이드는 세상에 종막을 가져오려는 악과 싸우고 있는 영웅이다.

거기에 백 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는 전설 같은 영웅담, 그 가운데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세상사에 달관한 여든 노인이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터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황녀를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한 방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스폴은 굳은 듯 방문 앞을 지키고 선 기사를 지나 문을 두드린 후 밀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 사이로 방 안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황제는 아랫배까지 숨을 밀어 넣으며 정신을 바로 했다.

그와 함께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륙에서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강대국이 바로 아나크렌이다. 그런 곳의 지배자인 그를, 이렇게나 조심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곳이 있을 거라고는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사소하게 시작한 오해로 벌어진 검후와의 거리는 아직 완전히 좁혀지지 못했다. 그런 황실의 어른이 안에 있다.

또한 오래전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지금의 아나크렌을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설의 인물 또한 저 안에 있다. 아무리 황제인 그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검후는 물론이고, 전설 속 영웅 역시 황제라는 위엄이 온전히 통할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검후가 말했으니 분명 사실이리라.

‘이드 님은 그레센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밖에서 이 땅에 오신 손님입니다. 이 땅의 법을 강요할 수 없는 분이지요. 그러니 황제. 그분을 권력으로 휘두르려 하지 마세요. 그러는 순간 그분과 아나크렌의 관계는 끝입니다. 지금까지 아나크렌에 내렸던 영광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겁니다. 무엇보다 내가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그러니 황제. 날 대하듯 이드 님을 대해 주세요.’

검후의 말이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다. 그때 검후의 모습이 얼마나 단호했는지, 마음 같아선 검후가 황실의 사람이 아니라 이드의 사람이냐고 묻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뭐 할까.

“어서 오세요. 황제. 이른 시간부터 발걸음을 하게 만들어 송구하군요.”

황제가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런 큰일이 있다면 당연히 제가 알아야지요. 오히려 빠르게 연락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여겨 주시면 다행입니다.”

검후와 인사를 나눈 황제는 곧이어 이드와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드가 충분히 예의를 지키고는 있지만, 그를 대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명예 후작을 대하는 황제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조심스러웠다.

“들을 때마다 그러하지만, 이드 님이 하시는 일은 작은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큰일을 하셨다고요.”

“큰일이라기보다는 해야 할 일이지요. 아마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시면 큰 근심거리를 가져왔다고 절 원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언뜻 듣기로 카논의 궁 하나가 무너졌다더군요. 매우 기꺼운 소식이었습니다.”

적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다.

서로 협력하는 관계도 아니고, 경쟁하는 사이. 특히 그것이 국가 대 국가일 때, 그런 성격은 특히나 도드라진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쉼 없이 상대의 빈틈과 약점을 찾는 것이 국제관계다.

그러니 기분이 좋으면 좋았지, 절대 근심거리는 아닌 것이다.

이드는 그런 뜻을 담은 황제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황제에게 근심을 가져올 나쁜 소식이 없기는 했다. 게르만이 내놓은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것.

당장 앞으로 닥쳐올 불행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다. 그에 비해 카논의 궁 하나는 날아갔고, 그로 인한 흉흉한 소문과 불안은 덤이다.

뿐인가. 혼돈의 파편이라는 골치 아픈 존재들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 하나도 폐쇄되었다. 기뻐하면 기뻐했지, 불안에 떨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이드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황제의 눈이 마지막으로 스케스틱을 향했다.

그 순간, 황제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그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만큼, 검후나 이드 역시 황제의 권위를 존중하고 예우하는 것이다.

한데 이 남자는 무어란 말인가.

일어난 사람들과 달리, 태연히 자리에 앉아 와인을 즐기는 남자는 황제의 존재를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만약 이곳이 황궁이었다면 경을 쳐도 백번은 쳤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호위 기사가 벌써 분개하며 움직였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위 기사는 대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대는 무엇 하는 자인가?”

황제는 불쾌해하기보다는 상대를 먼저 살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평범한 이는 아무도 없다. 무엇보다 검후가 아무나 이 방에 들였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는 것은, 최소 자신에게 이런 무례를 보여도 거리낄 것이 없는 존재라는 말인데.

‘이자, 혹시 인간이 아닌 건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인간 중에 제국의 지배자를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어도 제국과 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면 가능하다. 그들은 애초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테두리 안에 살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제법 합리적인 의심을 품은 황제다.

과연 이 거대한 제국을 이끌어 나가는 지배자다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잔을 내려놓은 스케스틱과 황제의 눈이 마주쳤다.

오싹.

“읍.”

그 순간 황제는 자신이 깊은 동굴 속에 갇힌 것 같은 환상을 보았다.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고 축축한 동굴. 동시에 왈칵 밀려온 두려움이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소름과 함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 전 자신을 노린 암습에서도 느끼지 못한 위기감이 밀려왔지만, 마음대로 눈조차 돌릴 수 없어 괴로움이 차오를 때였다.

사르륵.

갑자기 어깨에서 시작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며 굳었던 몸이 풀렸다.

“많이 놀란 모양인데, 이제 괜찮을 겁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검후가 있었다.

황제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그녀는 눈을 반달로 만들며 웃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야말로 황제를 걱정하여 인자한 미소로 안심시켜 주는 것 같지만.

황제는 안다. 저 미소가 절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하아~ 설마 검후님의 장난인 것입니까?”

발끈한 황제가 검후를 노려봤다. 현재 황녀를 돌보았던 것처럼, 황제 역시 어린 시절 검후의 돌봄을 받았다.

그때 황제의 기억 속 검후는 어마마마처럼 포근한 사람임과 동시에, 조카를 놀리기 좋아하는 짓궂은 이모 같은 사람이었다. 종종 황제를 놀려 울게 만다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호호호, 황제가 이리 발끈하는 모습은 오랜만이로군요.”

“검후님!”

“자, 자, 진정하세요. 그리고 이번 일은 내 장난이 아닙니다. 내가 하려던 것은 이보다 좀 더 크고 대단했다고요.”

“……”

그게 더 문제지 않나!

황제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검후의 모습에 급격히 머리가 아파 왔다. 어째서 본격적인 일을 보기도 전에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인지.

하지만 그런 중에도 검후의 말에 든 뜻을 살핀 황제가 물었다.

“이게 검후님의 장난이 아니라고요?”

“당연하지요. 저는 아직 스케스틱 님께 그런 부탁을 드릴 정도로 가깝지 못하답니다.”

“스케스틱 님…… 입니까?”

검후가 자신 앞에서 타인에게 ‘님’자를 붙이다니.

그때였다. 문제의 스케스틱이라는 자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당대 아나크렌의 황제인 모양이군.”

“그러하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그린 드래곤 일족의 스케스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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