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85화
1220화
그린의 일족.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리 없는 경악성이 휘몰아쳤다.
“……!!”
누가 부녀 사이 아니랄까 봐 놀라는 모습까지 비슷한 황제와 황녀다.
이드는 쉽게 경악을 수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스폴을 손짓해 불렀다.
“저 두 분, 스폴 경의 연락을 받고 온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왜 저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지금 모습은 꼭 스케스틱이 있었다는 걸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이드의 말에 스폴은 묘한 표정이 되어서는 힐끗 검후 쪽을 돌아본다.
“검후가 왜요?”
“……검후님이 비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쪽이 재미있을 거라고.”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확실히 재미있기는 하네요.’란다. 자국의 황제와 황녀를 골탕 먹여 놓고는 재미있다니.
갑자기 황제가 불쌍하게 보인다. 이런 기사를 믿고 제국을 운영해야 한다니.
‘쯧쯧.’
내심 혀를 차며 검후를 보자, 그녀가 더 참지 못하겠던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쉴라가 고개를 숙였다. 작게 보이는 이마가 발그스름하다. 좀 전 검후가 엉덩이를 토닥거렸을 때 못지않게 붉다.
아무래도 검후에 대한 부끄러움은 쉴라의 몫인 것 같다. 더욱이 이런 일에는 스폴까지 세트로 묶이는 것 같으니, 그녀가 감당해야 할 부끄러움도 아마 두 배가 아닐까.
이드가 쉴라를 동정하는 사이.
경악을 수습한 황제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제국 황제로서의 위엄을 바로 세웠다.
“황제,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하하하!”
물론 그 뒤를 검후의 웃음소리가 뒤따랐지만, 황제는 완전히 무시했다. 꽤 익숙한 모습이라 오히려 더 불쌍해 보인다고 할까.
무엇보다 그런 걸 신경 쓰기에는 눈앞에 등장한 존재가 주는 충격이 무척이나 컸으리라.
“그린 일족이라 하셨소?”
“그렇다.”
놀람과 부끄러움, 그리고 한심함이 방 안을 채우는 중에도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듯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답하는 스케스틱. 황제는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주었다.
“중간계의 수호자, 위대한 일족. 그린의 스케스틱 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오. 조금 늦었지만 다시 소개드리오. 짐은 아나크렌 제국의 황제, 필리푸스 드 페렌티움 아나크렌이라 하오.”
이 땅에 드래곤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이 백 년이다.
드래곤에게야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인간에게서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멀어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그동안 무공이 퍼지고, 초인이 발생하고, 그들이 규합해서 대륙을 떠받치는 힘의 축 중 하나가 되는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으니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고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를 망각하지는 않았다. 백 년의 시간이 그들에게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황제는 이드로부터 드래곤이 종적을 감춘 이유와 함께, 머지않아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황제는 그간 과거의 사실을 살핌과 동시에 혼돈의 파편과 카논, 그리고 드래곤에 대해서도 다시 살폈다. 그렇기에 드래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나름대로 마음의 결정을 내려 둔 상태였다. 아니, 사실은 결정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인간 국가의 입장에서,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천재지변과 동급이다.
너무나 큰 재앙이라면 국운을 걸고 막아야 할 테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든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운이 없었다고 참고 넘겨야 하는 하나의 ‘현상’쯤으로 대응하는 것이 드래곤을 대하는 과거 국가들의 자세였다.
그리고 만약 드래곤을 하나의 존재로서 대응할 때는, 그들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대응하라고 추천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가진 힘은, 한 국가에 끼칠 수 있는 피해는 그만큼 크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런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다. 마주 선 스케스틱이 마치 한 나라의 왕이나 황제인 것처럼. 그러는 한편으로는 상대가 드래곤임을 절대 잊지 않도록 마음을 다지면서,
그리고 이런 태도는 잘 통한 것 같다.
“과거의 지혜를 이은 자는 지혜롭지. 황제 역시 그런 것 같군.”
스케스틱의 짧은 감상에 황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황제의 뒤를 이어 황녀가 스케스틱과 인사를 나누었다. 검후가 직접 그녀를 스케스틱에게 소개했다.
“저는 소개도 해 주지 않으시고, 너무 황녀만 챙기시는 것 아닙니까?”
황제가 불퉁한 어조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자 황제 옆을 지나던 검후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럼 귀여운 황녀를 이뻐 해야지, 늙어 버린 황제를 귀여워하겠습니까. 바보 같은 소리를 하십니다. 황제도 곧 황손을 보시면 자연히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에 불만을 말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황제가 다시 물었다.
“아직도 심장이 떨립니다. 왜 미리 언질해 주지 않으신 겁니까.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일을 꾸미시려고 하셨지요?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셨던 겁니까?”
“일을 벌이다니요. 나는 그저, 아직 드래곤의 본신을 직접 본 적 없는 황제의 식견을 넓혀 주고 싶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인간의 형태가 아닌, 거대한 드래곤의 본래 모습으로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는 말인데.
“끄응…… 검후께선 제가 심장이 멈춰서 넘어가기라도 했으면 좋으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넘어간들 어떻습니까. 제가 있고, 이드 님이 있고, 스케스틱 님이 계신데. 멈춘 심장을 뛰게 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아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천연덕스러운 검후의 대응에 황제는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그리고 동시에 후회했다.
이 사람과 이렇게 쉽게 오해를 풀고 화해하는 것이 아닌데, 하고 말이다. 그래 봤자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끓어오른 울화통을 겨우 진정시킨 황제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은색 기사단의 기사가 간단한 디저트를 들인 후 문이 굳게 닫혔다. 방음 마법까지 자동으로 발동된 후 검후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궁금해할 일이 많을 겁니다. 우선 게르만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해 드리겠습니다.”
“검후께서 그를 직접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정말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입니까?”
“정확히는 혼돈의 파편이 살려 두고 있었던 것이지요.”
검후는 천천히, 그러나 선명한 목소리로 이드를 통해 듣고, 게르만을 통해 확인한 사실들을 하나하나 풀어 갔다. 중간중간 황제가 물어오는 것에도 오해가 없도록 철저하게 답하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다. 그에게 전달되는 이야기는 절대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오판할 경우 그 피해는 제국이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달콤한 과자의 맛을 즐기는 사이. 검후의 이야기는 카논의 백악궁이 날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검후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황제와 황녀는 디저트와 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설마 카논 제국이 그 정도로 혼돈의 파편과 깊게 연결되어 있을 줄은…………”
황궁의 일부가 날아갔다는 사실이 충격일까. 아니면 황궁 안에 혼돈의 파편이 뚫어 놓은 쥐구멍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일까.
황제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에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황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했다.
“이드 님, 그렇다면 혹시 카논이 이미 혼돈의 파편 손에 떨어졌다고 보아야 할까요?”
이드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황족이기 때문일까. 황녀가 카논을 지배하는 권력을 중심으로 물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서 지금까지 이어진 카논이라는 나라에, 그런 게 의미가 있을까.
“사실 혼돈의 파편이 카논을 손에 넣었는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혼돈의 파편과 게르만이 카논의 이름을 걸고 계약을 한 시점에 카논은 이미 카논 황실의 것이 아니었다고 해야겠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혼돈의 파편이 마음먹고 카논을 휘어잡으려고 한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제국이 모든 힘을 다해 막아도 막지 못할 혼돈의 파편이다. 그런데 혼돈의 파편은 봉인에서 풀려나 게르만의 껍데기를 뒤집어썼을 때부터 이미 카논 안에 있었고, 지금도 카논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카논무파가 대표적이다.
더욱이 카논무파 말고도 다른 이름을 뒤집어쓰고서 저들의 손발이 되어 있는 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카논 정도는 혼돈의 파편이 직접 나설 것도 없이 뒤집어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아, 카논의 지배자여.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어찌 이런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가.”
이드와 황녀가 주고받는 말에 황제는 깊게 탄식했다.
그러나 만약 같은 일이 아나크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과연 황제는 알아차릴 수 있을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으리라.
검후의 말이 끝나자 스케스틱이 그 뒤를 이었다.
황제가 왔으니, 간단한 소식만 전달하는 것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는 이드의 요청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꺼내 놓았다.
망각을 모르는 드래곤의 기억력은 대단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당장 눈앞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자세했다.
오히려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이드가 나서서 건너뛰어 달라 요청해야 했을 정도다. 하지만 덕분에 외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특히, 드래곤의 상황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파악이 끝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중간계로 돌아온다면 즉시 전력으로 쓸 수 있는 드래곤이 많지는 않겠군요.’
이드가 진한 아쉬움을 통해 냈다.
라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 너무 마음 놓고 있었어요.’
그녀는 스케스틱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강인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들도 결국 중간계에 속한 존재. 외계에서 오랫동안 생존하는 것이 부담이 없을 수가 없겠죠.”
세레니아와 라일로시드가의 안부를 묻는 말에 스케스틱은 잘 있다고 했다. 일족 죽에 죽음에 이른 존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존해 있다고. 지금도 혼돈의 파편과 싸우고 있으며, 또 중간계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들 쌩쌩한 줄 알았는데.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편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생존에 문제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어린 드래곤들은 중간계로 돌아오는 즉시 긴 휴식기에 들어야 할 정도로 기력이 떨어진 상태라는 거다.
드래곤이 복귀하는 즉시 그들과 함께 그레센을 통째로 뒤집어 혼돈의 파편을 털어 내려고 했던 이드로서는 더없이 아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