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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86화


1221화

시원하게 들이키려던 김칫국이 한 모금을 남기고 엎어졌다.

“이러면 시작도 못하고 나가린데.”

“크흠. 이드 님, 조금만 말씀을 조심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계십니다.”

쉴라가 소곤거리며 눈치를 주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정도로 실망이 컸다.

겨우 그림자만 보이는 꽁무니를 쫓는 것도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참이다.

그럼에도 드래곤만 돌아와 준다면 이 답답한 숨바꼭질을 단숨에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참았는데, 그 희망이 시작도 전에 좌초될 줄이야. 한숨이 절로 날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운이 나빴다면 세레니아나 라일로시드가를 포함한 모든 드래곤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한 줌이라도 남았으니, 그에 감사하는 것이 옳다.

“이드에게는 정말이지 면목 없습니다.”

“스케스틱이 왜요? 스케스틱은 물론이고, 여러분 일족이 내게 면목 없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지요. 따지고 보면 지금의 그레센도 여러분이 있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드래곤들이 혼돈의 파편을 견제하고 막지 않았다면 그레센 대륙은 한참 전에 카논으로 그 이름을 바꾼 후 멸망했을 거다. 

“더욱이 지금도 모두 외계에서 고생 중이고 말입니다.”

“이드는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을 외계에서 견디지 않았습니까. 그에 비하면 큰 고생이 아니지요.”

이드는 자신의 고생을 추켜세우는 스케스틱의 발언에 말이 궁해져 버렸다.

‘굳이 따지면 외계는 외계인데… 이 외계하고 그 외계는 굉장히 다르다고.’

스케스틱의 태도는 마치 이드 역시 그들과 비슷한 환경에서 고생했었다고 여기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이드도 힘들긴 했다.

그 중 특히 마음고생이 심했고.

하지만 먹을 것 못 먹고, 편히 쉬지도 못하는 드래곤에 비하면 교통편 끊어진 휴가나 다름없었다.

고생이라고 해 봐야, 함께 넘어온 ‘파편의 힘’이 깃든 흔적 때문에 생긴 사건들을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정도인데, 그것도 초반에 바짝 매달렸을 뿐, 대부분의 시간은 그야말로 느긋하게 보냈다.

얼마나 느긋했으면 내내 라미아와 신혼 같은 생활을 하며 보냈을까.

그러니 면목 없기로 따지면 오히려 이쪽이 더하다.

‘양심이 있으면 당연히 그래야죠. 그때 이드가 시간 축 조정만 실수하지 않았어도……?’

‘오~ 케이! 님아, 거기까지!!’

라미아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린다.

어느새 샐쭉한 눈을 하고 있는 라미아에 냉큼 눈을 피했다. 어쩌자고 이쪽으로 생각이 흘러서는 그야말로 실수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드는 그야말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이드는 재빨리 스케스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케스틱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있던 곳은 외계라기보다는 이계였습니다. 다른 세상. 여러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죠. 일단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차차 하기로 하고, 더 들어야 할 이야기는 없는 거지요?”

스케스틱 본인이 어쩌다 혼자서 혼돈의 파편 중 일인과 싸우고 있었는지도 들었으니,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하나 물어도 될까요?”

검후였다.

탁자에 올린 깍지 낀 손으로 입을 가린 그녀는 매우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 스케스틱이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다른 일족분들을 더 빨리 돌아오실 수 있도록 할 방법은 없을까요?”

“얼마나?”

“두 달이요.”

“불가능하다. 그런 방법은 없다.”

검후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자, 스케스틱은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빨리 돌아올 방법?

그런 것이 있었다면 드래곤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벌써 실행했을 거다. 절대 수를 아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더니 말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굳이 방법이라고 하면 하나 있다.”

“뭔가요?”

“혼돈의 파편을 찾아 소멸시켜라. 그렇게 하면 외계를 막고 있는 놈들이 자리를 비울 테고, 일족도 편히 복귀할 수 있게 되겠지. 아마도 로드께 들었을 것이다.”

“쯧, 불가능한 일이네요.”

검후가 아쉽다며 팔짱을 꼈다.

이드도 씁쓸하게 웃었다.

방법이 있다 하여 혹했더니, 그렇게 나온 답이 혼돈의 파편이라니.

그게 가능했으면 지금 이 고생을 할 이유가 없다. 미완의 마탑이 지랄을 하건, 초인이 미쳐 날뛰건 완전히 관심을 끄고 혼돈의 파편만 쏙쏙 뽑아 처리한 후 벌써 중원으로 향했을 거다.

그나저나.

“두 달? 두 달 안에 드래곤이 돌아와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따로 들은 건 없는데.”

이드의 눈이 빠르게 검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쉴라와 스폴을 살폈다. 돌아온 지 이제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연락도 주고받았기에 중요한 일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이드의 질문에 답한 것은 검후가 아닌 황제였다.

스케스틱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중에 놀라움을 모두 가다듬고,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까지 꿀꺽 삼켜 낸 황제.

그가 이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검후께서 말씀하신 두 달은 아마도 마스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기간이 아닐까 싶구려.”

“전쟁・・・・・・ 입니까? 저 마스와?”

이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전쟁. 결코 가볍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굴들을 보아하니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인데?”

아닌 게 아니라, 쉴라와 스폴조차 그 단어에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

“그러하오. 제국이 원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소.”

“마스와 마찰이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검왕이 앞에 나서면서 해결된 것 아니었습니까?”

마스는 제국의 추격대의 앞길을 막으며 추적을 방해했다. 말만 직접 안 했지, 대놓고 막을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고 할까.

그에 대해 제국이 내놓은 답이 바로 검왕이었다. 적의 수작을 피할 것이 아니라, 아예 어설픈 수작질이 통하지 않을 사람을 내밀어 놓은 것이다. 앞서 전해 듣기로는 검왕이 나서고 마스의 방해도 거의 멈췄다고 들었는데.

오가는 말을 들어 보면 그게 아닌 것 같지 않은가.

“아니오. 오히려 제국이 검왕을 움직인 것을 들어 소드 팰러스까지 싸잡아 한패라고 물고 늘어지는 중이지. 마스를 노리는 제국의 음모라는

주장이오.”

“그건・・・・・・ 억지로군요.”

문제는 그 억지가 통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라일론이 마스에게 힘을 실어 주는 발언을 했음은 이미 듣지 않았던가. 아나크렌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입장에선 일의 진실 여부보다는 아나크렌이 가진 힘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나크렌에서 토벌 대상이자 악으로 규정한 미완의 마탑이야 희생자가 나와봤자 수백이지만, 만에 하나 제국이 미완의 마탑을 구실로 들어 제 국가에 발을 들이게 된다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일이니.

미완의 마탑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각국의 입장에선 응당 두려웠을 것이다. 이번 경우야 마스가 욕심이 동해 미완의 마탑에 손을 내민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 마스가 불리해진다면, 제국의 땅에서 도망친 것처럼 미완의 마탑이 제 나라로 도망쳐 올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느냐는 말이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소. 마스가 제국의 행사를 막으려 한다는 사실이 중할 뿐이오.”

“그래서 전쟁이군요. 하지만 그건 너무 급작스럽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을 쓰거나…… 그렇지, 검후께 듣기로는 제국에서 떼를 쓰겠다고 하시던데 말입니다.”

“하아~ 다른 좋은 말도 있는데, 떼라니….”

제국을 마치 네 살 아이처럼 비유하는 말에 황제가 시큼털털한 표정으로 검후를 쏘아봤다. 아무리 편하게 이야기해도 그렇지, 제국이 하는 일을 그렇게 표현하다니.

“지금 이 자리에 말의 모양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말씀부터 해 주시죠. 그 ‘떼’를 쓴 결과가 전쟁인 겁니까?”

“정확히는 제국이 준비한 수가 통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요. 우리는 우선 마스를 압박할 참이오.”

“떼를 써서 말입니까?”

“끄음.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마스가 했듯이 우리도 각국에 알릴 것이오. 마스가 흑마법사의 손에 떨어져, 흑마법에 조종당하고 있다고.”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이다.

황제는 아니라고 하지만, 떼쓰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하하. 마스로선 억울하겠군요. 사람들이 믿어 주겠습니까?”

“억울하긴 침략국으로 몰린 제국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아주시오. 그리고 믿지 않으면 어떻소. 믿을 만하면 되는 것이지.”

그야말로 당사자 입장에선 복장 뒤집어질 소리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내뱉는 황제다.

그리고 황제의 말은 옳았다.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말을 해도 어차피 믿지 않는다. 하나 그들을 제외하면 어떨까.

제국의 주장을 온전히 헛소리라고 부정하긴 힘들다. 다름 아닌 미완의 마탑이 그 이유다. 저들은 초인을 강제로 납치해 인체 실험을 일삼았다. 거기에 제국의 땅에 숨어 사람의 배까지 갈랐다.

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바벨이 미완의 마탑을 초인들의 공적으로 지목했다.

그게 아니라도 제국에서 있었던 대대적인 토벌에 많은 참전관이 뒤따랐고, 그 결과 그들은 마탑이 진행하는 일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초인 마법이 정확히 어떤 형태의 마법인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각국의 입장에선 미완의 마탑이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마스나 제국의 주장 모두 자극적이지만, 제국의 주장이 조금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까.

제국의 편을 들어 주고 싶지는 않지만 마스의 주장을 듣고 그에 힘을 실어 준 입장에선 제국의 주장을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게 된 것이다. 

“그 정도면 일단 주변에서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고 나서는 방관자들의 입은 닥치게 할 수 있겠군요.’

감이나 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뜻은 통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 입장에선 주변국의 압력을 기대한 것 같지만, 그들이 한발 물러서서 지켜본다면 마스를 지원할 국가는 없게 되오. 자연히 마스 홀로 제국을 감당해야 할 터인데. 과연 마탑 하나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지는 의문이오. 그리고 그 결과가 나기까지가 약 두 달 정도 걸릴 거라고 보고 있소.”

“그럼 검후께서 그 기간을 이야기한 건……”

슬쩍 이드의 눈길을 받은 검후가 찻잔을 입에 대고서 말했다.

“수십의 드래곤이 대륙의 하늘을 나는 중에 전쟁이 가당키나 하겠어요? 굳이 피 흘릴 이유 없죠.”

이런 게 인맥의 힘일까.

드래곤을 호가호위의 배경으로 쓰려는 앙큼한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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