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87화
1222화
드래곤을 이용해 마스를 찍어 누르려 했다니, 대담하다 못해 난폭하기까지 한 방법이다.
검후의 일이라면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보는 쉴라와 스폴까지 얼굴이 새파랗지 않은가. 아마도 이 자리에 당사자인 스케스틱이 있어 더 그렇겠지만.
아무튼, 그야말로 대륙 역사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수법이긴 했다.
사실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인간의 싸움에 드래곤을 이용한다? 차라리 천재지변은 이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드래곤을 대상으로는 그런 적이 없다.
최소한 자연은 이성이나 감정을 가지고 행동하진 않으니 말이다. 아무렴 드래곤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수를 헤아리지 못할 리도 없거니와, 그런 오만한 짓거리를 그냥 두고 넘길 가능성도 없다.
그야말로 가장 끔찍하게 자폭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마침 이 자리에도 멋진 스위치가 하나 있긴 한데. 살금살금 다가가는 시선들의 중심에서 스케스틱이 말했다.
“효율은 떨어지지만 좋은 방법이다.”
“드래곤은 이런 걸 싫어하는 게 아닙니까?”
이드가 물었다.
스케스틱의 표정만 봐서는 그 속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자신 때문에 좋은 소리를 해 줄 드래곤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허락 없이 일족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경우입니다. 지금과는 다르지요. 무엇보다 검후의 부탁이라면 로드께서는 허락하실 겁니다.”
앞선 말과는 달리, ‘로드의 허락’이 주된 이유인 것 같다.
그나저나 의외이지 않을 수 없다.
저 스케스틱이 알 정도로 로드와 검후의 친분이 깊었다니.
“그렇다고 해도, 대담하네요. 그렇게 되면 대륙의 수많은 지성체가 드래곤이 아나크렌을 비호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을 텐데.”
“혼돈의 파편이 인간 사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시점에서, 저희 일족이 나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스케스틱의 말이 옳았다. 혼돈의 파편이 카논 뒤에 선다면, 이드와 드래곤은 그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다. 굳이 아나크렌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번 마스의 일도 그러하다.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인 미완의 마탑, 거기에 혼돈의 파편이 손을 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감사한 말씀이에요, 스케스틱 님.”
“내게 감사할 일은 없다. 결정은 로드께서 하실 일이니까.”
검후의 감사에 스케스틱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대화는 의미가 없다. 나는 두 달 안에 일족들이 공간을 넘어 대륙으로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생각한다.”
고생하고 있는 동족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스케스틱의 말은 냉정했다.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드래곤이 두 달 안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전에 혼돈의 파편 중 최소 하나 이상을 소멸시켜야 하는데.
‘실현 가능성이 너무 떨어지지.’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카논을 그리 들쑤시고 다녔거늘, 꼬리조차 잡지 못한 놈들이다. 혼돈의 파편이 갑자기 미쳐서 나 잡아 잡수, 하고 기어 나오지 않는 다음에야 누구라도 두 달 안에 없앨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렇지만 꼭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다른 분이 돌아오지 못해도 스케스틱 님이 있고요.’””아나크렌의 수호룡이라도 되어 달라는 말인가?”
아무렴 스케스틱 개인의 존재는 드래곤의 편대비행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다. 대신 스케스틱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문제는 그렇게 될 경우 스케스틱과 아나크렌 제국의 관계는 오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다는 점이다.
빼도 박도 하기 힘들 정도로, 즉, ‘수호룡’이라는 칭호가 붙을 거라는 거다.
그에 가만히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수호룡이라니. 듣기만 해도 오싹할 정도로 기분 좋은 울림이 아닌가.
물론 저런 말이 나오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더라도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지. 세상이 제국을 지키는 수호룡의 존재를 인정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없는 것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의 힘이다.
상황만 만들어진다면 스케스틱을 수호룡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자신이 앞에 나서 시끄럽게 떠들 필요도 없다.
굳이 먼저 해명만 하지 않으면 된다. 무엇보다 스케스틱의 분위기를 보면 이 정도 자연스러운 오해에 굳이 노여워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이지 않는가.
“그래 주시면 더없이 감사할 일이죠.”
황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말을 받아넘기는 검후를 열심히 응원했다.
수호룡까진 아닐지언정, 이 자리에서 스케스틱이 나서 주겠다는 확답만 받아 내도 일은 다 이룬 셈이었다.
설마 이름값이 있지. 드래곤이 뒤에 가서 못 하겠다고 빼진 않을 것 아닌가. 황제는 늦지 않게 검후와 오해를 풀고 화해한 자신의 결정에 안도했다.
‘검후께서 이후에도 황실의 어른으로 계시는 게 바로 제국을 위하는 일이다.’
제국을 위해서 황제인 자신이 웃어른을 두고 고개를 숙이는 것 정도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 검후와 아나크렌 제국이 손을 보태고 있음을 알고 있다. 좋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대의 요청을 따라 주겠다.”
쿵.
“아, 이건…….”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다. 허락의 뜻을 밝히는 스케스틱에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두드린 황제가 당혹감을 감추는 사이, 황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와인 병을 손에 들었다.
“스케스틱 님의 용단에 아나크렌 제국의 황녀로서 더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이 술 한 잔으로서 대신하고자 합니다.”
‘잘했다. 황녀야.’
황녀가 술을 따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이지만, 상대가 스케스틱이면 흠이 될 것도 없다. 또 이 자리에서 그것에 흠을 잡을 사람도 없다. 쪼르르르륵.
빈 잔에 붉은 와인이 차오른다.
그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검후가 황제를 잠시 노려봤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감정 하나 수습하지 못해 실수를 하다니.
‘황제, 우리는 잠시 후에 따로 좀 보도록 하지요.’
‘……네, 검후…….?’
매우 익숙해 보이는 눈의 대화 뒤, 홀로 우울해진 황제를 두고 검후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마스의 일은 차차 보아 가면 될 일이고. 그러고 보니 이드 님. 제게 소개해 주고 싶은 기사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소개까지는 아니고 추천입니다. 각각 해쉬와 바인이라고 하는데, 굳이 두 사람을 받아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에요.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은 모두 제 아이들입니다. 그런 곳에 아무나 받아들일 수는 없죠. 일단 이드 님의 추천이라면 믿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드 님께서 추천하는 기사들이란 말입니까?”
이전까지는 얌전히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쉴라와 스폴이 특별한 주제에 바로 반응했다. 마스라면 몰라도, 검후의 기사라면 바로 자신들의 일이 아니겠는가.
“다른 분도 아니고 이드 님의 추천이라면 굉장한 실력자들일 텐데. 제 자리가 위험해지는 건가요?”
스폴이 엄살을 떨며 기사들의 해쉬와 바인의 정체를 물어 왔다.
아무렴 실력이 좋아도 어떻게 스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녀는 물론이고 쉴라가 맡고 있는 기사단의 단장직 역시 단순히 실력만으로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실력과 함께 믿음과 신뢰, 그리고 충성심과 지도력이 있어야 비로소 책임질 수 있었으니까.
특히 검후의 기사단이 아닌가. 실력만으로 기사단의 중직을 줄 그녀가 아니었다.
“실력은 평범합니다. 은색 기사단 소속 기사들 정도는 아니지만, 충실히 노력을 쌓아 올린 기사들입니다. 다만 저와 엮이는 바람에 원래 기사단에서 잘렸죠.”
“저런…….”
이드는 안타까워하는 쉴라의 반응을 보며 톤 자작의 기사로 일하고 있던 해쉬와 바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 자연히 두 사람과의 첫 만남은 물론이고, 그들이 기사단에서 잘린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두 기사가 소영주의 애인 대행을 했다는 말에 스폴은 분노했고, 충성을 맹세했던 자작이 이드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두 기사를 버렸다는 말에 쉴라는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런 두 기사를 소개하겠다는 말에 검후는 반가워했다.
“그렇게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충직한 사람들. 저는 싫어하지 않아요. 데려오세요. 당장이라도 만나 보겠어요.”
저 정도로 말한다는 것은 절반쯤은 은색 기사단 소속이 되었다는 셈이다.
“다행이네. 그럼 한 달 정도만 기다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열심히 달려오는 중일 테니까.”
“네? 어디서요?”
“어디서는 당연히 카논이지.”
카논의 기사다. 카논 땅에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이드의 뻔뻔함에 검후가 입을 벙긋거리더니, 탁자를 쿵 내리쳤다.
“미쳤어요? 카논이라니! 거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아니, 그 전에 왜 같이 오지 않은 건데요!”
흥분한 검후의 말투가 어느새 위엄을 잃었다.
카논에서 아나크렌까지. 그 거리가 얼마인데 그걸 그냥 두고 왔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워낙 급해서 말이야. 깜빡했어.”
“깜・・・・・・ 이드 님?”
깜빡할 일이 따로 있지. 자신이 책임지기로 한 기사들을 깜빡했다는 말에 기가 막힌 검후가 가슴을 쳤다.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던 쉴라의 눈길에는 혐오감이 스며들기까지 했다.
이드는 서둘러 변명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봐서 알겠지만, 상황이 급했다고. 황궁은 무너졌지, 게르만은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중이지. 어쩌겠어? 뒤도 돌아볼 시간 없이 여기부터 달려오는 수밖에.”
물론 그런 중에 일리나는 빼먹지 않고 챙겼다. 아무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리나를 잊어버릴까.
하지만 그녀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그럼 생각났을 때라도 데려왔어야죠. 라미아 마법이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용도로 이동에 필요한 마법진까지 깔아 뒀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의 존재를 떠오른 시점이 너무 늦었다.
그리고 해쉬와 바인 두 기사, 그리고 바벨의 대처는 너무 신속했다.
이드가 아나크렌으로 급히 이동했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두 기사를 수도에서 빼내서는 아나크렌으로 이동시켜 버린 것이다.
“크흠. 일단 바벨의 도움을 받아서 오고 있을 테니까 크게 곤란한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
동의를 구하는 이드였지만, 그 눈길을 받은 라미아와 일리나가 어쩐 일로 이드를 회피했다.
이번 일에서만큼은 이드의 잘못이 곧 그들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해쉬와 바인을 잊고 있었던 것은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과연 해쉬와 바인이 그 먼 길을 넘어 도착하면 무슨 말을 할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 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