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88화
1223화
황녀궁 가장 심처에 위치한 방. 파아앗.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법 광이 피어났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황제와 황녀가 걸어 나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석상처럼 서서 황제를 기다리던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는 한편, 누군가가 문밖을 향해 황제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황제의 복귀는 빠르게 전파되었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사들은 그제야 한숨 놓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지키는 황녀궁은 현재 황궁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황제 때문이다.
물론 온전히 그의 방문 때문만은 아니다. 황제가 황녀와 황자의 궁을 방문하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으니까.
다만 핵심은, 그가 무슨 이유로 황녀궁을 방문했는가다.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공간 이동 마법 말이다.
공간 이동은 사용도 어렵지만, 중간 과정도 매우 조심해야 했다. 혹시라도 이동 중 외부 간섭이 발생할 경우 황제의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마법의 시전자가 아니기에 대처도 어렵다.
그러니 애초에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이유로 황제가 방문할 때마다 황녀궁을 지키고 선 기사들의 눈빛이 한없이 살벌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황제가 돌아오면 끝이다.
푸후~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기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어깨를 떨궜다. 쉬지 않고 사방을 경계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심지어 기사들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있는 대로 날을 세운 기사들의 기세는 여린 궁인들이 감당하기에는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으니까. 기사들의 분위기가 바뀌자, 식은땀에 흠뻑 젖은 옷을 팔랑거리던 궁인 하나가 울 듯이 말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폐하께서 우리 황녀님 좀 그만 찾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이러다 진짜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단 말이야.”
엄살이지만 엄살이 아니었다. 철저히 교육받은 궁인들이 어지간하면 이런 이야기들을 할까.
혹시라도 위에서 알기라도 하면 치도곤을 당하게 될 만한 발언이었다.
이런 궁인들이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을 옮긴 황제는 기사들을 물리고 있었다.
“황녀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물렀거라.”
“충.. ..한데 폐하.’
“말하라.”
“레오날도 후작이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허헛, 후작도 성격이 점점 급해지는 모양이구나.”
황제가 어쩔 수 없다며 웃었다.
레오날도 후작은 황녀궁에 이동 마법이 설치된 것을 아는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로, 황제가 저택을 다녀올 때마다 의견을 나누는 상대였다.
한데 그때마다 황제가 들려 주는 이야기 중에 어느 하나 중하지 않고 신비하지 않은 것이 있던가. 해서 언제부턴가 황제가 황녀궁에 들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르지 않아도 먼저 찾아오기 시작한 레오날도 후작이다.
“들라 하라. 차는 따로 준비할 필요 없으니, 궁인들도 물려 두어라.”
“충!”
방을 나선 기사가 문을 닫자 황제가 혀를 찼다.
“레오날도 후작은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이 경박해진 것 같지 않으냐?”
“본심이 아니시라는 걸 압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요즘은 내가 널 찾아오기만 하면 쪼르르 달려오는데.”
“말씀은 그러셔도, 레오날도 후작에 대해 말씀하시는 아바마마께선 퍽 즐거워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지금도 웃고 계십니다.”
“음? 이런, 들켰구나. 허허허.”
황제는 제 입가를 만져 보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팔걸이를 탁탁 두드렸다.
그때.
“폐하께서 그리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오늘은 가셔서 좋은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막 방으로 들어서며 그 모습을 본 레어날도 후작이 말했다. 즐겁고 재밌는 일이 있을 때 팔걸이를 두드리는 것이 바로 황제의 버릇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네 뒷담화가 재미있어 웃었지.”
“제 뒷담화라. 그렇군요. 제 흉이 두 분을 재미있게 했다면 더 즐겨 주십시오.”
“쭛, 그 반응은 재미없군. 앉지.”
구렁이처럼 은근슬쩍 받아넘기는 레오날도 후작을 가볍게 흘긴 황제가 자리를 권했다.
그에 황녀와 마주 앉은 레오날도 후작이 인사를 주고받고는 급히 물었다.
“저택에 다녀오신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게 그리 궁금한가? 이렇게 달려올 정도로? 원래 자네는 이렇게 가볍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폐하께서 잘못 아신 겁니다.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간은 흥미로운 일이 없어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지요. 그보다, 무슨 일로 그리 급히 저택을 찾으신 것입니까?”
아침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비운 황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를 그렇게 이른 시간에 불러내는 것이 어디 어지간한 일로 가능이나 할까.
레오날도 후작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어떤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레오날도 후작의 확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꼭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검후님을 찾아뵐 수 있는 것 아닌가.”
“뵐 수는 있지요. 또, 자주 뵈어야지요. 황실의 큰 어르신인데. 하지만 폐하께선 잘 실천하지 않는 일이지 않습니까.’
“……뭐라?”
“일전에 제게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어릴 때 검후님께서 너무 놀리셔서 지금도 검후님을 뵙기 무서우시다고…”
“이 사람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황제가 역정을 내며 레오날도 후작의 말을 막았다.
손가락으로 쿡 찔렀더니, 주먹이 돌아온 격이다. 지난날 우울한 기분에 한잔 술과 함께 꺼내 놓은 이야기를, 설마 황녀 앞에서 꺼낼 줄이야!
황제가 눈으로 소리 없이 욕을 날렸지만, 레오날도 후작은 고개를 돌려 모르는 척했다.
실로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만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본전은 고사하고, 황녀 앞에서 망신을 당할 판이다.
반달이 된 황녀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본 황제는 서둘러 오늘 저택을 방문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검후님을 급히 뵙게 된 것은, 게르만 때문이네.”
“……혼돈의 파편을 세상에 풀어낸 그 마법사 말입니까? 설마 지금까지 그 마법사가 살아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나? 마인드 마스터가 놈을 잡아 오셨더군.”
검후와 관련한 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황제도 어린 시절부터 전설처럼 전해 듣던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황제는 은근히 신이 나 자신이 전해 들었던 게르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레오날도 후작은 황제만큼 즐거운 표정일 수 없었다. 그는 황제의 말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생각했다.
‘미쳤군. 백 년 전의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니.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일은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구나.’
황제를 도와 제국을 이끌어 가야 할 레오날도 후작에게 있어 통제는 물론, 감당할 수조차 없는 혼돈의 파편은 너무나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나마 냉정히 생각하고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혼돈의 파편을 잡아낼 수 있는 마인드 마스터라는 천적이 제국과 함께하기에. 오로지 그 하나 덕분이었다.
“과연 검후께서 폐하를 급히 오라 하실 만한 일이로군요. 설마 그 게르만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아쉽기도 하군요. 혼돈의 파편이 깨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지만, 정작 저들을 퇴치하는 데 도움이 될 정보는 하나도 없으니.”
“후후후, 꼭 그렇지만도 않다네.”
“게르만 마법사 말고 놀라운 소식이 또 있는 것입니까?”
“있지, 있어. 후작은 우리 제국에 수호룡이 생기면 어떨 것 같은가?”
“……네?”
레오날도 후작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 표정이 어지간히도 멍청해 보였는지, 황제가 큰소리로 껄껄거리며 웃어 댔다. 처음부터 보고 싶은 모습이었던 데다, 황녀에게 자신의 흑역사를 꺼내 놓은 것에 대한 복수에 성공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하던 레오날도 후작은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되짚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보통 사건은 크든 작든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게르만의 존재로 인해 황제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 이후 수호룡이라는 난데없는 단어가 나왔다. 그건 분명 게르만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그리고 과연 황제의 꾀주머니 역할을 하던 지혜는 어딜 간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 혼돈의 파편이 외계로 쫓아낸 드래곤, 혹시………… 그들이 돌아온 것입니까? 정녕 그렇습니까?!”
자신이 생각하고도 놀라 버린 걸까.
레오날도 후작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서 소리쳤다. 감히 황제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의 무례에 대해 따질 만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드래곤 일족이 모두 대륙으로 복귀한 것은 아닙니다, 후작님.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드래곤은 모두 대륙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웃음을 멈추지 않는 황제를 대신해 황녀가 답했다.
“되었으면 좋겠다. 가 아니라 될 거라는 말씀은.. 확신하시는 것 같습니다?”
“드래곤 일족의 말이니까요. 또 이드 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믿어야지 않겠습니까?”
“믿어야지요. 꼭 믿고 싶군요. 그나저나, 모두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드래곤이 일부나마 대륙으로 돌아온 것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이드 님께서 게르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외계와 연결된 통로를 통해 그린의 스케스틱 님이 대륙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드 님과 함께 저택에 머물고 계세요.”
“드래곤이라니…. 하하.”
레오날도 후작은 황녀의 말을 듣고도 헛웃음을 흘렸다. 멀기만 하던, 책으로만 보았던 드래곤이 같은 수도 안에 있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군요. 저는 제 생에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꿈에도 그려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가진 지식이 높은 만큼 레오날도 후작은 호기심과 탐구욕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드래곤의 존재는 그야말로 보물고와 같다고 해야 했다.
평소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레오날도 후작을 바라보던 황녀가 조용히, 그러나 확신을 담아 답했다.
“머지않아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호룡을 언급하셨군요. 수호룡이라. 제국을 지켜 주는 강대한 존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전 무조건 찬성입니다. 꼭 그분께서 아나크렌의 수호룡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너무 좋아하는군. 황실을 위협하는 큰 힘은 경계해야 한다고 하더니.”
황제가 이드의 진짜 정체를 레오날도 후작에게 밝힌 날.
레오날도 후작은 분명 그런 의미를 담은 말을 황제에게 고했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어떤 자료에도 드래곤이 국가를 운영하고 지배하려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드래곤이 권력을 놓고 폐하와 대립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아군이라니. 이만큼 편리한 것이 또 어딨단 말입니까.”
“호호’
열변을 토하는 레오날도 후작에 황녀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