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89화
1224화
레오날도 후작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하아~ 내가 진짜・・・・・”
조용한 혼잣말에 더해, 황제를 향한 그의 눈빛이 심히 불경스럽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던 흥분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소생 불가 상태다.
“후작, 지금 자네 눈빛이 매우 불손한 것 같은데?”
“그냥 두십시오.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러게 왜 거짓말을 하십니까, 하시기를.’
“허허~ 이 사람 보게나. 거짓말이라니, 난 그런 적 없네.”
“수호룡이 생길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황제의 오리발에 레오날도 후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스케스틱이 아직 수호룡이 된 게 아님을 알고 저도 모르게 그리 한 것이다.
물론 검후와의 대화에서 긍정적으로 답하긴 했으나,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상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몰랐다. 그러니 제국이 더욱 강건해지겠다며 좋아하던 레오날도 후작으로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 도발은 한 귀로 흘렸을 테지만, 손에 다 들어온 줄 알았던 수호룡이라는 존재가 연기처럼 사라진 허탈감에 평소와 같이 냉정할 수 없던 것이다.
“말은 바로 해야지. 수호룡이 생기면 어떻겠냐고 물었지, 생길 거라고 하진 않았네.”
“하아~ 됐습니다. 그만하십시오.”
더 따져 봐야 소용이 없겠다 싶었는지, 레오날도 후작이 잘래잘래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장난기 가득하던 표정을 의미심장하게 바꾼 황제가 말했다.
“자네가 해 보게.”
“예? 무얼 말입니까?”
이 황제가 또 무슨 엉뚱한 말로 억지를 부리려는 걸까.
상대가 황제이기에 차마 무시하지 못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레오날도 후작은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황제를 둘러싼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라는 그 수호룡의 존재를, 자네가 진짜로 만들어 보라는 말이네.’
“하지만 그 문제는 스케스틱 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허허. 제국의 현자가 이렇게 어수룩한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건가. 그래, 비록 스케스틱 님이 그 자리에서 당장 수호룡이 되겠노라 약조하진 않으셨지. 그런데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으셨네. 필요하면 나서겠다 하셨단 말이야. 그러니 제국은……”
“그분이 필요할 상황을 만들어야겠군요. 그분이 제국의 수호룡이 될 수 있도록.”
무엄하게도 황제의 말을 중간에 가로챈 레오날도 후작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알처럼 서늘한 눈을 번들거릴 뿐이다. 이런 모습에 황제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이제야 좀 자네다운 말이 나오는군.
“절 손바닥에 올려 두고 이리저리 굴려 댄 분이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서, 불만인가?”
“우리나라에 수호룡이 생길 여지를 만들어 오셨으니, 이번은 봐 드리겠습니다.”
“이거 고마워해야 하나? 하하하.”
황제가 팔걸이를 팍팍 내리쳤다.
호탕한 웃음을 멈추지 않는 황제였지만, 레오날도 후작은 더 이상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속았다는 생각에 씩씩거렸으나, 다시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비록 당장 수호룡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 제의에 관해 부정한 것도 아니니. 물론 그렇다 한들, 제의를 받아들일 상황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름만 들어도 절로 조심하게 되는 드래곤을 상대로 말이다.
이번 일은 보기에 따라 드래곤을 이용하기 위한 수작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황제는 명령을 내림에 순간의 망설임도 없다.
물론 황제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유에는 검후와 이드의 존재가 매우 클 것이다. 두 사람이 있는 이상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하나 그렇게 제국은 무사할지라도, 황제 개인으로서는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드래곤과 원한을 가지고 과연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황제의 명령은 이런 모든 경우의 수를 감수하고 나온 것이다.
그야말로 제국의 지배자에 어울리는 행동과 마인드였다. 비록 검후 앞에서는 기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중년남일 뿐일지라도.
“그럼 마스에 대한 압박 작전도 강도를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 역시도 자네 몫이 아니었나. 잘 알아서 상황을 만들어 보게. 언제나처럼 말이네.”
“충. 폐하께서 바라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레오날도 후작이 기사처럼 가슴을 두드려 예를 표했다.
더 이상 황제와 신하로서 나눌 이야기가 없음을 안 것일까. 아니면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에 바쁜 것일까. 레오날도 후작은 그대로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황녀가 약간의 걱정을 담아 말했다.
“아바마마, 괜찮을까요?”
“왜, 이 아비가 걱정되는 것이냐?”
“저희는 드래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까요.”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황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걱정은 거두어도 좋다. 이번 일은 내가 결정한 것이지만, 그 이전에 검후님의 의사를 전달받았기에 진행하는 거니까.”
검후가 괜찮다고 한 일이라면 최악의 상황이라도 황제나 제국에 피해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걱정을 내려놓은 황녀는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후님의 의사를 전달받으셨다고요? 언제 말씀이신가요?”
“하하하. 언질이 따로 있느냐. 내가 있는 자리에서 수호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으신 것이면 충분하지. 그분이 제국에 해가 될 것 같은 일이면 행여나 말이라도 꺼내셨겠느냐. 너도 잘 알아 두어라. 이런 것이 정치란다.”
그간 딸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아비다운 모습을 보여 줬다고 여긴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보지 못했다. 매우 미묘한 의미를 담아 그를 올려다보는 황녀의 눈빛을 말이다.
‘아바마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치가 아니라 눈치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멈추지 않고 검후를 찾던 때부터 알아본 일이지만, 참으로 효녀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저택을 다녀간 황제에 의해 황궁이 바빠진 사이.
이드는 라미아와 함께 저택을 빠져나가려 했다.
뻔한 일이지만, 목적지는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다. 유일하게 눈치를 봐야 할 스케스틱의 허락도 받았겠다. 혹시나 엉뚱한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다녀오고 싶어 마음이 급한 것이다.
일리나에겐 비밀이었다.
외롭게 기다리게 한 죄가 있어 비밀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쪽팔림도 정도가 있지, 빈집을 털었다고 어떻게 고백을 할까.
무엇보다 바른 소리를 하는 일리나의 성격상 다시 가져다 두면 되지 않느냐고 할 테지만, 스케스틱의 존재로 인해 이미 그러기엔 늦어 버리지
않았나.
‘그래, 다 돌려놓을 순 있어. 어차피 쪽팔림은 한순간이니까.’
‘문제는 그 일로 인해서 스케스틱의 레어를 턴 범인 리스트에 우리가 올라갈 수 있다는 거죠.’
의심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혼돈의 파편과 같은 급을 취급되는 것도 짜증 나지만, 진짜 골치 아픈 것은 최악의 경우 털지도 않은 스케스틱의 레어를 채워 놔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오얏나무 아래선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고. 그런데 이드는 비슷해 보이는 행위로 오해를 사는 정도가 아니라,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를 실제로 털었으니.
‘어쩌면 돌아온 뒤 심통이 난 라일로시드가가 아닌 걸 알면서도 범인으로 몰아세울 가능성이…………….’
많다. 아주아주 많다.
하지만 곤란하게도 이드의 이런 급한 마음을 아는 사람은 라미아 말고는 없었다.
무슨 말이냐면, 은근슬쩍 저택을 빠져나가려는 이드를 검후가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또 은근슬쩍 어디로 가시려고요?”
“내가 가긴 어딜 가? 일단 급한 일은 다 끝났으니까 좀 쉬려는 거지.”
“그럼 왜 조용히 밖으로 나가시는 건데요?”
“쉬는 김에 겸사겸사 바벨에 말을 좀 전하려고. 아무래도 해쉬 경과 바인 경을 두고 온 것이 신경이 쓰여서…..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하나하나 변명하고 있니?”
“그러니까요. 뭔가 숨기는 것 있으신 거 아니에요?”
“나보단 네가 문제인 것 같은데. 별일 없으면 비켜 주지?”
“싫어요. 말씀하시는 거 들어 보니 급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제 무공 좀 봐 주세요.”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좀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검까지 들고 있더라. 어느새 저걸 챙겨 온 걸까?
“그거, 나중에 하면 안 될까? 도착하고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어차피 다시 카논으로 갈 것도 아닌데, 한동안은 남는 시간도 많고.”
카논은 당분간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굳이 가려면 못 갈 건 없지만, 그때는 철저히 얼굴과 신분을 감춰야 할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카논에서도 사건 현장에 이드와 톤 자작, 그리고 콘펌 남작이 있었다는 정도는 알아냈을 테니까.
세 사람이 도둑처럼 숨어다닌 것도 아니었고, 사건이 워낙 중하고 황궁의 안위가 달린 일인 만큼 철저하고 또 신속하게 조사되지 않았겠는가. 물론 백악궁을 날려 버린 원인이 이드라는 것까지는 알 수 없을 거다. 흔적이 모두 사라졌을 테니까. 하지만 최소 무언가 관련이 있다고 짐작할 만한 정황은 충분했다.
그런 중에 이드가 얼굴을 내밀어 봐라.
모르긴 몰라도 제국 기사단이 아귀처럼 달려들어 잡아가려 할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바벨의 이름도 통하지 않겠지.
아무렴 백악궁이 날아갔는데, 바벨을 신경 쓸 정신이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이런 말에 자리를 비켜 주기에는 검후가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아 버렸다. 검후는 그 말에 오히려 더 강하게 이드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스케스틱 님의 등에 앉아서 공간 이동으로 편하게 오셨으면서, 쉰다는 말이 가당키나 해요? 그러지 말고 저 좀 봐 주세요. 이드 님이 카논에 있는 사이 새로운 변초를 발견했단 말이에요.”
“무슨 거짓말이 그래? 난화십이식에 내가 모르는 변초가 어딨다고.”
이드는 콧방귀를 날렸다.
자신이 모르는 검법이면 몰라도, 난화십이식에 새로운 변초라니. 있을 수 없는 소리다.
하지만 ‘무인의 본능’이라는 놈의 단순함 때문일까.
부정하는 이드의 머리와 달리 발은 어느새 검후가 이끄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제가 만들었으니 새로운 변초죠. 꼭 검식 안에서 변화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무공만이 아니라, 세상일도 본디 그러하지 않은가.
‘하아~’
고개를 끄덕이던 이드는 어쩐지 등 뒤에서 라미아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라미아의 압박 때문일까.
이드는 적정선 안에서 검후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검후가 새롭게 만들어 낸 변초는 일라이져가 만든 폭풍 속에서 힘없이 스러져 버렸다.
“너무해요!”
그렇게 허탈감에 주저앉은 검후를 남기고 연무장을 빠져나오려던 이드였으나, 곧 스폴을 앞세운 은색 기사단에 다시 한번 발걸음이 막히고 말았다.
“검후 님을 상대하셨으니, 그다음 상대는 당연히 저희 차례죠.”
어깨를 활짝 펴고 가슴을 내민 모습이 뻔뻔하다 못해 아주 당당하다.
“……혹시 누가 이러라고 시켰나요?”
급기야 스케스틱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든다.
“에이, 시키긴 누가 시켜요. 그저 저희가 이만큼 열심히 했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거지. 자,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어떤 면에선 검후보다 피하기 힘든 사람이 스폴이다.
이드는 마치 범인을 연행하듯 자신을 잡아끄는 스폴에 내심 깊은 한숨을 쉬며 끌려갔다.
아무렴 이 상황에 정색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드로서는 검후와 은색 기사단이 하필 이 순간 이러는 이유가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사실은 열심히 했다는 검사를 받고 싶다는 스폴의 그 말이 전부일 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