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90화
1225화
“해가…… 지네.”
담 너머로 태양의 머리꼭지가 보일락 말락 한다.
이드는 조금씩 어둡게 변해 가는 하늘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헥헥~ 그러네요. 언제 이렇게 됐는지. 역시 이드 님께 수련받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몰라요.”
스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있는 대로 체력을 뽑아 쓰는 바람에 머리카락 끝에선 땀이 뚝뚝 떨어졌다. 못난 모습으로 털썩 주저앉는 그녀에게서 기사의 고아함 같은 건 티끌만치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열심히 수련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옷에, 전신에 가득해진 멍 자국이 그 증거다.
이런 모습은 은색 기사단의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몇몇은 더 심하게 굴렀는지, 기절한 것처럼 사지를 펼치고 누워 있기도 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들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마치 밭일을 마치고서 익어 가는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처럼 뿌듯함이 가득해 보인다고 할까.
“역시 이드 님의 수련은 최고예요! 이건 비밀인데, 가끔은 검후님보다 잘 가르쳐 주시는 것 같아요.’
“・・・・・・ 고마운 말인데.”
분명 고마운 말인데, 왜 별로 기쁘진 않을까.
“으갸갸갸~ 오랜만에 땀을 흘렸더니 개운하네. 그만 일어들 나자! 곧 저녁 시간이니까, 그 전에 씻고 준비해야지. 검후님께 못난 모습을 보일 셈이냐!”
하지만 이드의 속을 알 리 없는 스폴은 맘껏 퍼질러진 기사들을 일으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설마 이렇게 하루를 빼앗겨 버릴 줄이야.”
이드는 진한 땀 냄새만 남은 연무장에 홀로 남아 허탈해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연무장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미아가 다가왔다.
“단순 대련도 아니고, 수련을 봐준 거잖아요. 검후 때와는 다르게.”
“그렇지만 저 기사들을 검후하고 똑같이 대할 순 없잖아.”
은근히 자신을 탓하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어쩔 수 없었음을 항변했다. 검후와 기사들 사이에 놓인 간격이 하늘과 땅인데, 그 상대하는 방법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기사들의 수도 많았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스폴이 대충 봐주는 걸 그냥 넘기지 않았다는 거지만.
“어쩔 수 없죠. 애초에 여기까지 끌려온 게 이드인데.”
“그래, 다 내 탓이지.”
이드가 푹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담 너머로 사라진 해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아련하다.
하지만 라미아의 말대로,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공을 봐주는 걸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무인의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눈에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허점을 모른 척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본래 가르치는 일이 그렇다. 신경도 많이 써야 하고 손도 많이 가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갈아 넣어야만 했다. 좋은 스승이 존경받는 이유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드는 매우 좋은 스승이다. 신경에 거슬려서라도 대충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으니까.
거기에 여타 다른 천재들처럼 가르치는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흔히 천재들은 배우는 자의 어려움을 모른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있나.
이런 부분은 이드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반적인 천재와 이드의 차이점이 있으니, 이드는 그러한 일반적인 천재의 범위조차 넘어섰다는 것이다.
현재 이드가 밟고 있는 경지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전설적인 수준이다.
가르치고 말고를 논하기 이전에 워낙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모자란 것과 잘못된 것이 너무도 훤하게 보여 대충 짚어 주려도 대충 짚어 줄 수가 없을 정도라는 거다.
그야말로 도착지로 가는 정확한 약도를 그려 주는 수준이랄까.
친절하진 않지만 정확한 가르침은 은색 기사단에 딱 어울렸다. 그녀들 역시 하나하나가 한때 천재로 불린 인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만 알면, 모자란 부분은 알아서 채울 수 있는 이들이란 말이다.
사실 그녀들뿐 아니라 소드 팰러스 출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수련생 중 인재 아닌 이들이 없었다.
오로지 꿈 하나를 보고 왔다 할지라도, 최소한 절망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인내심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생 딱지를 벗어나 졸업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후배가 자신을 앞서가는 것을 보고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야 하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가르치는 일에 푹 빠진 덕분에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를 찾을 시간이 사라져 버렸다.
“어쩔래요. 밤에 다녀와요?”
“그건 힘들지 않을까? 일리나가 물으면 뭐라고 답할 건데.”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저택에서 이드 일가가 저녁을 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검후나 스폴 등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저녁을 먹은 후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쌓여 있는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밤이 깊으면 침대에 눕는다.
한마디로 저녁을 먹은 이후부터 잘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말인데, 당연히 일리나 모르게 외출은 불가능했다.
“그냥 같이 갈까요? 이드와 일리나는 따로 레어를 둘러보고, 그 사이 제가 쓱싹하면 될 것 같은데.”
“그냥 내일 시간을 보자. 일리나도 눈치가 은근히 빠르단 말이야.”
차라리 일리나가 온전한 무투파였다면 부담이 없었을 테지만, 그녀는 엘프다.
오랜 시간을 살며, 많은 경험과 지식을 담은 엘프. 마법에 대해서도 어지간한 마법사들 이상의 기본 지식을 쌓았으며, 정령도 다룬다. 이런 일리나가 레어에 가서 흔적을 지우려는 라미아의 마법을 모르길 바라는 건 그야말로 어리석은 바람이다.
‘그러다 의심받을 바에야, 그냥 사실대로 밝히고 망신을 당하고 말지!’
속이려다 들키면 망신도 두 배다.
“과연 내일은 시간이 날까 싶은데…………….”
“야,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내 앞길을 막을 사람은 오늘 다 왔다 갔다고.”
사실 다음에 봐주겠다는 이드를 억지로 잡아끌 만한 사람은 검후와 스폴이 유일했다. 그녀들처럼 이드를 편히 대하는 사람은 저택에 또 없다. 저택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기사들도 이드에겐 더없이 깍듯하다. 그녀들에게 이드는 자신들의 주군인 검후를 구출해 준 은인이며, 검술을 봐주는 스승이고, 혼돈의 파편을 소멸시킨 영웅이었다.
편하게 대하라고 해도 편하게 대할 수 없을 만큼 ‘존경의 결정체’ 같은 것이랄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스폴이 별종이긴 별종이었다. 그녀에게도 이드는 은인이며, 스승이고, 영웅이다.
더욱이 이드의 정체까지 알고 있으니, 그에 더해 전설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드를 상대하는 데 정체를 알기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보기에 따라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젠 제발 눈치 좀 봐 줬으면 싶기도 하네.’
수시간 전 자신을 연무장으로 끌고 가던 스폴을 떠올리면, 자신이 너무 만만해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만도 했다.
아무튼, 이런 두 사람을 제외하면 누가 오든 상관이 없다.
며칠 뒤에 보자는 것도 아니고, 몇 시간 뒤에 보자면 뭐라 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부디 그러길 바라요.”
“이드, 라미아! 저녁 준비됐어요!”
묘하게 부정적인 라미아의 말에 뭐라 하려던 이드는 먼저 들려 온 일라나의 목소리에 손을 저었다.
“지금 가요! 우리도 가자.”
“잠깐 서 봐요. 샤워까진 아니라도, 먼지는 털어야죠. 열기를 식히는 바람, 윈드.”
라미아가 곧장 일리나를 향해 움직이는 이드의 뒤를 따르며 바람을 불러 먼지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클린 마법을 사용해 다른 이물질들을 털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뜬 기사들처럼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까지는 못해도,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라미아의 마법이 몸을 스쳐 가는 사이, 일리나 곁에 선 이드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
해야 할 일을 못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먹는 게 남는 것 아니겠는가. 이드는 검후에 이어 기사들을 상대해 주느라 출출해진 배를 문질렀다.
황제가 다녀간 효과는 다음날 바로 나타났다.
여론을 만드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일까. 안티로스에 가장 먼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스가 제국과 전쟁을 준비한다더라.”
“마스의 왕이 미쳤다더라.”
“아니다. 초인을 잡아가던 마탑의 흑마법사 놈들이 마스의 왕을 홀렸다더라.”
“왕뿐 아니라, 대신들도 눈이 돌아갔다더라. 알고 보니 귀족들 몇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더라.’
마스의 왕과 귀족들이 알았다면 하나같이 입으로 불을 토할 것 같은 소문들이 거리에 흘러넘쳤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직도 굳게 닫혀 있는 저택의 담마저 넘어 들어와 이드를 포함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스에도 저 소문이 넘어갈 텐데, 과연 그때 마스의 왕과 귀족들의 표정이 어찌 변할지 보지 못하는 것이 아까울 정도다.
“오늘 안으로 제국의 이름으로 각국에 서신이 전달될 거에요. 마스의 위기에 대해서…….”
“확실히 위기이기는 하지. 제국과의 전쟁이니까.”
위기라는 말에 이드가 픽 웃어 버렸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제국이 마스의 위기를 경고한다니. 실소가 났다.
“비웃는 국가도 있겠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요. 그들이 편들고 나섰던 마스의 주장 역시 같은 결이니까요.’
“우린 그냥 지켜보고 있으면 된다는 거잖아.”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연무장에서 상대 좀 해 주세요. 어제는 너무 설렁설렁 봐주셨다는 거 알아요? 기사단 아이들은 하나하나 신경 써 주시고, 차별이 심한 거 아니에요?”
“……그게 검후가 할 소리냐? 그리고 오늘은 가 볼 곳이 있어서 안 돼.’
“카논에는 다시 못 가시잖아요.”
“카논이 아냐. 라일로시드가의 레어에 다녀올 거야.”
“혹시 제 레어도 가 보실 겁니까? 아직 정리 전입니다만.”
오늘도 식사 자리에 함께 앉은 스케스틱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딱히 식사를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이드를 신경 쓴 것인지, 아니면 외계에서의 부실했던 식사를 만회하려는 것인지 그는 식사 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다만 은근히 식탐을 보이는 것을 보면, 아마도 후자의 이유가 결정적인 것 같다.
“스케스틱의 레어는 다음에 가면 되니까, 서둘지 않아도 됩니다.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도 마침 시간이 빈 김에 가 보려는 겁니다. 어제처럼 갑자기 누가 엉뚱한 부탁을 하면 시간이 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우와~ 지금 수련을 엉뚱한 일이라고 하신 거예요?”
“수련이 엉뚱한 게 아니라, 너하고 스폴 경의 고집이 엉뚱한 급이라고. 그리고 꼭 내가 상대가 아니라도 괜찮은 거 아냐? 나만큼은 아니라도, 네 초식을 봐줄 사람이 내 옆에도 있잖아. 그렇죠, 일리나?”
“네. 시르피를 상대하는 건 저도 좋아요.”
“뭐・・・・・・ 일리나 님이라면 저도…….”
불만이라도 어쩔 것인가.
이드가 입맛을 다시는 검후의 모습에 입꼬리를 말아 올릴 때였다. 오늘은 절대로 다녀오리라 마음먹는 그 순간,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드 님께 바벨의 라울 님이 서신을 보내 오셨습니다.’
“……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