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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91화


1226화

“끙, 필요한 이야기는 이틀 전에 다 했을 텐데… 이게 갑자기 뭐냐고.”

이드가 혀를 찼다.

뜬금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제는 고풍스럽기보단 고루하게 느껴지는 서신을 보낸 라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귀찮다는 생각까지 든다.

정말 급한 일이 있었다면 통신을 열거나, 직접 사람을 보냈으리라. 그러지 않았다는 건 명백히 자신에게 요청할 게 있다는 표시이리라. 

‘아니, 왜 이러는 건데요? 레어 좀 다녀오겠다는데 무슨 방해가 이렇게 많아!’

‘그러게나 말이다.’

부탁이 있어도 그렇지, 왜 하필 이 시간일까. 한시라도 빨리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는 이 마음 바쁜 이때.

자신과 같은 마음인 라미아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자 이드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서신을 보냈다는 건, 당장 급한 일은 아니라는 거겠지?”

물론 무시할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저 라울이다. 당연히 안에 엄청난 내용이 적혔을 테니, 차라리 레어에 다녀온 후에 여유롭게 보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이드가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바로 확인하지 않으십니까?”

쉴라가 물었다.

그녀도 라울이 좋진 않겠지만, 차마 그가 가진 바벨에서의 지위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리라.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거 아니겠어요? 서신을 보내는 쪽은 라울이지만, 그걸 보고 말고는 내 맘인 거죠.”

그게 싫었으면 애초에 다른 수단을 사용했어야 한다.

물론 라울 입장에선 이드가 서신을 확인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바벨의 이름과 힘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의 서신을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느긋한 이드와 달리, 탁자에 올려진 서신을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드는 나중에 보고, 이리 주세요. 제가 확인해 볼 테니까. 일이 있으면 직접 와야지, 어디 건방지게 서신만 달랑 보낸단 말이에요.”

서신을 향한 검후의 눈초리가 새치름하다 못해 살벌했다. 라울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가늘어진 눈매였다.

“검후 님, 저 서신은 이드 님께 전달된…….”

“어머, 그게 무슨 상관이니? 이드 님 허락을 받으면 그만인걸. 만약에 헛소리라도 적어 놨으면 내 그놈의 머리털을 아주 몽땅· 몽땅? 몽땅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뽀드드득!

섬뜩한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서신을 향해 내민 검후의 손끝에서 흡입력이 일어났다. 접인공력이라는 기예였다.

팔랑.

그러자 탁자에 놓였던 서신이 바람에 놀란 나뭇잎처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검후는 서신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일단…… 내가 먼저 읽어 보고.”

이드가 잽싸게 서신을 가로채고 나섰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의 머리카락을 지켜 준 줄이나 아시오, 라울.’

이드는 아무도 모르게 라울에게 빚 하나를 지웠다. 딱히 라울과 지켜야 할 의리는 없지만, 그래도 좋은 거래 상대가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머리털 정도는 지켜 줘야지.

지이익.

봉투의 봉인을 뜯자 그 안에서 한 장의 서신이 나왔다. 테두리에 색으로 선을 넣은 고급스러운 종이에는 생각과 달리 이드를 수고스럽게 할 만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흐음.”

다만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할 뿐, 그에 그의 두 아내와 스케스틱을 제외한 사람들이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바벨이라는 거대 조직과 이드가 서로 겹치는 지점에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혼돈의 파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드는 돌아오기 전 카논에서 큰 사고를 치고 오지 않았던가.

그런 이드를 도운 것이 바벨이고.

“혹시 심각한 일인가요?”

“음? 전혀 아니에요.”

이드가 쉴라의 질문에 답하자 스폴이 눈썹 위에다 손가락을 구부려 붙였다.

“그런데, 방금 표정이 이~랬어요. 그래서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었죠.”

“하핫, 걱정들 말아요. 전혀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큰일이라면 라울이 직접 왔겠지. 아니면 통신을 열었거나.”

“그럼 왜 그러세요?”

검후가 물었다. 이드는 탁자에 내려놓은 서신에 적힌 글자 일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답했다.

“어제 말했었잖아. 은색 기사단에 소개해 주고 싶은 기사들이 있다고.”

“해쉬 경과 바인 경이요? 거기에 두 사람에 대한 일이 적혔어요?”

“어, 라울이 두 사람을 데리고 온다네? 그것도 오늘 도착할 것 같다는데?”

그 말을 들은 검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비록 이드가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기사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일 뿐. 절대 라울이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두 기사를 직접 데려오고 있다는 말은………….

“자기 좀 신경 써 달라는 모양인데 뭘 잘 봐달라는 거죠? 서신에 더 적힌 것 없어요?”

“있기는 한데…….”

“…..정말 이상한 요구라도 적어 놓은 거에요?”

이드는 발끈하려는 검후를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대신, 흥분하지 마. 서신에 적어 놓기로는, 카논에 있었던 일이 궁금하다. 그리고..

이드의 눈이 스케스틱을 향했다.

“저택에 나타난 뉴페이스도 궁금하다고 하고, 인사를 나누고 싶다네.”

“호오~ 스케스틱 님을 말이죠?”

“이 저택에 새로운 인물이라고는 스케스틱 말고는 없잖아.”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었음에도 스케스틱은 잠시 눈길을 돌렸을 뿐,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갔다.

대신 검후가 꾹 말아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탁자를 내리칠 기세였는데, 아무래도 보는 사람들이 많아 참는 모양이다.

다만 덕분에 풀리지 않은 화가 솟아오른 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떨렸다.

“이것참, 굉장히 괘씸한 말을 잘도 지껄여 놨네요. 스케스틱 님을 보려고 찾아온단 말이죠? 그것도 허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통보로! 이 빌어먹을 바벨 놈들이 감히 건방지게!”

딱 봐도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닌 검후다.

왜 그렇지 않을까. 라울이 스케스틱을 언급했다. 본인의 레어를 다녀온 후 저택 밖으로는 한 발도 나가지 않은 그를 그 존재를 어떻게 알았을까. 황제와 관계를 회복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혼돈의 파편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검후다. 그로 인해 대문을 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도 없다.

저택의 일을 하는 하인들이나 드나들 뿐, 은색 기사단조차 바깥출입은 거의 하지 않는다. 뿐인가. 외부 사람은 은색 기사단에 막혀 들어올 수도 없는 곳이 바로 이 저택이다.

그런 저택 안에 새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려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그 모든 수는 저택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불법의 덩어리. 그야말로 당하는 사람에겐 불쾌함만 안겨 주는 방법들뿐이다.

이러니 검후의 화는 매우 타당했다.

이드는 혀를 차며 내심 라울의 머리털을 향해 미리 작별 인사를 날렸다. 아무래도 라울이 이 저택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의 머리털의 생명 역시 끝나는 순간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감시라니.

아무리 이드라도 차마 참으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이드가 당분간 저택을 떠나 있었으니 망정이지,

자신을 둘째치고 일리나와 라미아가 감시당했다면 지금의 검후 못지 않게 기분이 상했으리라.

그 증거로 쉴라와 스폴의 저 무표정한 얼굴을 보라. 마치 차가운 철 가면을 뒤집어쓴 듯했다.

“직접 온다고 하니까, 그 문제는 둘이서 해결 봐. 나는 자리 비켜 줄 테니까.”

“당연하죠! 이번에야말로 참지 않겠어요. 오늘 온대요?”

“저녁에 방문하겠다.”

“건방진 놈! 정중히 찾아와 접견을 요청할 것이지, 감히 이런 일방적인 서신을 보내다니! 두 번 다시 이딴 수작 못 부리게 만들어 놓고야 말겠어요!” 

“그래・・・・・・ 아무래도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라울이 검후와 은색 기사단을 진정시킬 공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아마 혼돈의 파편 때문에 참고 넘겼던, 감금에 대한 화까지 이번에 풀어내려고 하지 않을까 싶다.

“라울이라는 자가 초인 중에서 강한 자인 모양이군요.”

어느새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스케스틱이 입가를 훔치며 묻는 말에 이드는 잠시 할 말을 생각한 후 간단히 정리했다.

“마탑・・・・・・ 보다는 용병 길드에 가까운 초인 단체가 있습니다. 라울은 그곳의 간부죠.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호오~ 초인이라니. 마침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스케스틱은 초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초인 발생 초기에 드래곤들이 외계로 밀려나서 그런 듯하다. 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들 중에서도 외부 활동이 극히 적었다면 초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마 저쪽에서 먼저 보고 싶어 할 겁니다. 다만,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강함은 전투 쪽이 아니니까요.”

“조직의 기여도 문제겠지요. 인간의 조직 문화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은 하지 않아요. 실망할까 봐 그러지. 초인이라는 존재들은 각성한 초인기에 따라 생각보다 강력하거든요.”

“이드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대가 됩니다.”

“저보다는 혼돈의 파편 놈들이 초인을 배제하려 하는 것 같으니, 그 부분을 더 기대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혼돈의 파편이 언급되어서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스케스틱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사납다.

“어머나~ 스케스틱 님, 그러지 말고 저하고 같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초인의 전투력은 몰라도, 내구성은 확인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상대 놈도 마침 바라는 바인 것 같고.”

“그럼 부탁하지.”

저 태연한 대답이 검후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이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리나, 지금부터 상대 좀 해 줘요. 힘을 쓰기 전에 충분히 몸을 풀어 둬야겠으니까.”

“잠깐,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검후는 냅킨을 탁자 위로 던지고는 일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수련에 도와주겠다고 대답한 일리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손에 이끌려 나갔다. 이드는 그 모습에서 전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수고하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일어나 라미아의 손을 잡았다.

“마침 전부 다 바쁜 것 같으니까. 이때 우리도 후딱 다녀오자.”

“네, 네, 동감이에요.”

더 앉아 있었다가는 또 무슨 일이 이드의 발목을 잡을지.

곧 두 사람은 라미아의 마법에 의해 저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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