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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93화


1228화

카논과의 전쟁.

벌써부터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마주한 스케스틱의 눈은 어떻게 봐도 진심이다.

지나가듯 가볍게 던진 게 아니라, 가능성이 보인다면 당장이라도 실행으로 옮길 생각으로 꺼낸 말이라는 뜻이다. ‘이런 거 보면 스케스틱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한 국가를 침공하는 일을 그리 쉽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더욱이 곰곰이 되새겨 보면, 스케스틱은 ‘국가와 국가 간의 충돌을 집어 말한 것도 아니었다.

핵심은 어디까지나 카논에 대한 공격.

즉, ‘카논이라는 제국을 파괴하려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혼돈의 파편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스케스틱은 혼자라도 움직일 듯한 태세였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그게 정녕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아무리 스케스틱이라도 제국과 정면 대결은 쉽지 않다.

하나 된 제국의 힘은 드래곤이라도 쉽게 볼 수 없으니.

하지만 드래곤인 스케스틱이 오직 파괴를 목적으로 빠르게 치고 빠진다면, 카논도 그런 그를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제국의 힘을 빼놓으면, 그 후는 굳이 스케스틱이 나설 필요도 없다.

상황을 보던 각국이 알아서 카논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내려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테니까.

제국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거대한 국가의 마지막으로는 참으로 허무한 결과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길고 긴 그레센의 역사가 드래곤의 활동을 괜히 자연재해로 분류해 놓은 게 아니었다.

물론 혼돈의 파편을 소멸시킬 수만 있다면 카논의 멸망도 생각해 볼 일이지만,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부정적입니다.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가능성 자체는 있다고 보시는 거로군요.”

“사실, 최근에 이미 이와 비슷한 의견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제 과거와 더불어 혼돈의 파편에 대한 진실을 들은 황제로부터 말입니다.” 

사실을 밝힌 며칠 후, 황제도 지금처럼 카논을 언급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황제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기엔 상당히 구체적이고 과감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의견에 대한 이드의 대답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때는 다른 사람들도 의견을 냈었다. 황제의 의견을 지지하는 스폴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카논에 대한 공격 계획은 폐기되었다.

“의미 없이 죽어 나갈 사람은 일단 둘째 문제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 어떻게 둘째일 수 있겠냐만, 그 저울의 반대편에 세상의 멸망을 올린다면 전쟁 중의 사상자는 오히려 가벼운 수준일 터였다.

올바른 명분도 없이 그저 지배자의 욕심에 따라 일어나는 전쟁도 있는데, 그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제일 큰 문제는 그들 반응의 불확실성입니다. 카논을 공격한다고 해서 혼돈의 파편이 나설 것인가? 모릅니다. 혼돈의 파편이 카논의 황족을 구할 것인가? 모릅니다. 결정적으로, 카논이 아예 멸망한 후에도 혼돈의 파편이 굳이 게르만과의 계약을 지키려 할지가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확실히, 그건 큰 문제로군요.’

“그렇죠?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어쨌든 지금의 카논은 혼돈의 파편이 당장 세상의 파괴를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안전장치니까요.”

“안전장치.”

사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게르만이 멸망을 깨우는 동시에, 세상이 멸망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도 벌어 주었으니까.

다만 그 계약이 혼돈의 파편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지 알 수 없는 입장에선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카논의 멸망이 세상 멸망의 시작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꼴을 보긴 싫으니 말이다.

“카논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피해야겠군요.”

스케스틱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이가 이드이기 때문일까.

그의 눈에 어려 있던 섬뜩한 살기도 사라지고 있었다.

이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카논 사람들은 죽다 살아났군.’

스케스틱이 결정을 내리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면, 카논에는 지옥이 펼쳐졌을 것이다.

밤낮없이 드래곤이 날아다니고, 계속해서 마법이 떨어진다니. 그야말로 감당 불가의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동시에 그레센의 역사서에는 새로운 마룡의 존재가 적히겠지.

사상 최악의 그린 드래곤이라고 말이다.

“그럼 지금 당장은…….”

“기다려야죠. 뭔가 확실한 것이 튀어나오거나, 마탑을 공략하기 전까지는.”

그리 말하는 이드가 짙은 아쉬움을 터트렸다.

스케스틱도 그렇겠지만, 그 못지않게 혼돈의 파편을 잡고 싶은 이가 바로 이드였다.

벌써 고향을 떠난 지도 십 년이 넘었다.

물론 이곳엔 일리나와 라미아가 있고, 정붙이면 고향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운 것이 고향이 아닌가.

더욱이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가족들도 있다. 그런 지금에 이드가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혼돈의 파편이 정말 깊이 숨어 버리는 일이다. 그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가면 저들을 찾는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무한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혼돈의 파편이다.

‘수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존재.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쉽군요. 여러 가지로.”

와삭.

스케스틱이 과자를 부숴 먹으며 말했다.

도대체 뭐가 아쉽다는 건지. 물어보기 무섭기까지 하다.

어찌 되었든, 이 정도면 스케스틱이 원하는 답은 충분히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케스틱은 묵묵히 차와 과자를 흡입할 뿐이었다.

수십 년간 제대로 먹지 못한 건 천하의 드래곤에게도 트라우마를 남기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급 불쌍해 보인 이드는 아공간을 뒤져 지구에서 가져온 과자들을 몇 개 꺼내 놓고는 자리를 떴다.

“모자라면 말해요.”

물론 이후 쉬지 않고 과자를 요청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한 말이었다.

먹성이 그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절대로 꺼내 놓지 않았을 거라며 이드는 후에 반성했다.

자고로 수량이 적고, 좋은 건 소수만 즐겨야 하는 건데 말이다.

어쨌든, 테라스를 나선 이드는 곧장 연무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라일로시드가의 레어에 가기 위해 검후의 상대를 온전히 일리나에게 맡긴 것이 미안해서였다.

두 사람이 사용 중인 연무장 주변에는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일부 모여 있었다.

검후와 일리나의 대련을 보고 익히기 위해서다.

당연하게도 강제는 아니었다.

라미아는 그런 기사들 속에서 쉴라와 함께 있었다.

이드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말했다.

“검후도 일리나 상대로 정신없을 텐데, 이럴 때 쉬지, 왜 이렇게 모여 있어요.”

“검후님께서 쉼 없이 단련하시는데, 저희가 쉴 수는 없죠. 다녀오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새삼 실감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스케스틱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그 입장에선 그저 벽에 주먹질한 정도일 테니까.”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아무래도 쉴라는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라미아가 레어의 일부가 완전히 녹아내린 영상을 보여 준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속에 깃든 힘의 차이를 알았을 테니 저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긴장하지 말라는 말도 크게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저 시간을 들여 익숙해지는 수밖에.

지금 자신과 쉴라의 관계처럼 말이다.

이드는 필요 없는 말을 줄이고 연무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일리나와 검후가 검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검을 보호하기 위해 내력을 주입하고는 있지만, 그뿐.

검기도 없고, 검강도 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손에 들린 검은 살벌할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어중간한 실력이라면 두 사람 앞에 서는 것만으로 산산이 찢겨 나갔으리라.

그러나 정작 그런 검초를 사용하는 이들은 지극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마치 대련이 아닌 평온한 명상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쩌르르릉.

검과 검이 부딪히는데, 신기하게도 방울 소리가 났다.

겉으로 봤을 땐 한 번의 충돌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벌의 날개처럼 빠르게 여러 번을 끊어 쳤기에 난 소리였다. 그에 이드는 연무장 주변에 모여 있는 기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과연 저들 중 일리나와 검후가 내보이는 검초의 진면목을 꿰뚫어 보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얻어 가는 것이 많을 텐데.’

타고난 안력이건, 수련으로 얻은 검안이건.

그야말로 각자의 운에 달렸다고 할 수 있었다.

당장 저들이 지금 이 연무장에 있는 것만 해도 다른 기사들에게는 행운일 테니 말이다.

“어떻게…… 보십니까?”

쉴라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음? 어떤 것 말이죠?”

“검후 님이 만들어 내신 새로운 검초에 대한 이드 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면 쉴라도 정식으로 난화십이식을 전수받고 수련 중이었다.

그런 만큼 난화십이식에서 태어난 검후의 새로운 검초에 눈이 가는 것도 당연할까.

이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칭찬의 말을 쏟아 냈다.

“좋아요. 환과 쾌의 균형도 잘 잡혔고, 전 삼초에서 이어지는 연환도 문제없고, 무엇보다 난화십이식의 검의를 그대로 담고 있는 점이 특히 대단해요.”

난화십이식을 정식으로 익힌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보이는 검후의 새로운 검초가 원래 검법에 포함된 것이라고 여길 정도다.

짧고 굵은 이드의 말에 쉴라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쉴라 경?”

“아니, 이드 님께서 그렇게 봐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검후님께서 걱정하셨습니다. 혹시 당신께서 만드신 검초가 이드 님의 눈에 차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럴 리가 없지요. 누가 봐도 뛰어난데, 어떻게 저걸 모자라다 말할 수 있겠어요.”

정말이다.

저 검초를 보고도 형편없다고 한다면, 그건 그 말을 한 사람의 눈이 제대로 박혔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어제 이드 님께서 검후님의 새로운 검초를 보시고도 딱히 말씀이 없어서…….”

“어제는 좀 정신없었죠. 라미아가 말했다.

이드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신이 없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급한 마음에 검후와의 대련도 대충 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새로운 검초라는 말에 흥미를 보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호기심을 풀었을 뿐.

새로운 검초에 대한 피드백을 검후에게 하나도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드는 단순히 마음이 급해서 그랬던 것인데, 아무래도 검후는 그걸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 잡담을 하려면 다른 곳에 가서 해요! 사람이 열심히 수련하는 옆에서 정신없게 하지 말고! 그게 아니면 직접 올라오셔도 좋고요.”

“그럼 그럴까요?”

마침 괜한 걱정을 시켜 미안한 마음이던 이드는 자신을 째려보는 검후에 연무장에 발을 올렸다.

아무래도 오늘 주요 일과가 정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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