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94화
1229화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시간은 무척 빠르게 흐른다.
검후의 수련도 그랬다.
새로운 검초를 분해하거나 재조립하기도 하고, 초 단위로 조각 낸 상태에서 기존 초식과의 연계성을 시험하는 등.
그야말로 한계성을 테스트했다.
과연 검후가 만든 검초는 대단했다. 다만, 그렇다고 완벽한 건 아니었다. 해서 이드와 일리나는 검후와는 다른 시각과 뛰어난 실력으로 즉석에서 보완해 주었다.
그렇다고 그 안에 깃든 검의를 뒤틀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디테일의 차이랄까. 물론 그 ‘차이’가 삼류와 일류를 나누는 법이지만.
좌우간 이렇게 즉석에서 이루어진 검초 테스트는 자연스럽게 기사들에게도 그것을 전수할 기회를 만들어 되었다.
하나하나 옆에 붙어 가르치지 않아도, 눈앞에서 최소 단위로 쪼개지고 다시 조립되는 과정을 몇 번이나 보면 해당 검초에 대해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은색 기사단에서 그 정도 센스가 없는 기사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들을 향한 검후의 말이 주요했다.
“오늘 이곳에서 보게 되는 모든 것은 너희들 역시 익혀도 좋다. 아니, 꼭 익혀 너희들의 실력 향상에 쓰였으면 좋겠구나.”
검후와 은색 기사단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건 그냥 익히라는 지침을 내린 것보다 더한 말이었다.
그야말로 은색 기사단을 아끼는 검후의 마음이었으니까. 검후를 지극히 존경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은색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로서는 절대 소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검후의 말이 나온 순간부터 연무장 주변의 기사들은 두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고 연무장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검후의 배려와 같은 이 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이후 다시 그녀에게 묻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또한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동료 기사들에게 좀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덕분에 뜨거운 기사들의 시선에 괜히 이드와 일리나만 어색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마르고 닳도록 시험한 덕분에 하루라는 시간이 금방 지나고 말았다.
심지어 점심까지 연무장에서 해결하고 났더니, 금방 라울이 방문을 예고한 시간이 되었다.
그나마 그 전에 라미아가 약속 시각이 머지않았음을 알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땀에 푹 절은 상태로 라울과 대면할 뻔했다. 좌우간 그렇게 땀과 함께 흙먼지를 씻어 내며 한숨을 돌리는 사이, 라울이 저택의 문을 넘어 들어섰다.
앞서 방문을 미리 알렸고, 라울의 얼굴을 모르는 기사는 없었기에 그는 곧장 접객실로 안내되었다. 접객실에선 이드 일가와 검후, 그리고 쉴라와 스폴이 라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후 님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여전히 건강하고 아름다우셔서 진심으로 기쁘군요.’
“흥, 뺀질거리는 인간이, 운이 좋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한 검후의 말이었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라울이 고개를 갸웃, 하고는 이내 이드를 향해 눈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명예 후작님, 괜찮으시다면 지금 검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죠. 말 그대로 운이 좋았습니다. 라울 자작. 안 그래도 검후께서 자작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이드가 싱글거리며 답했다.
그러자 라울이 대번에 억울한 표정을 하고서는 말했다. ‘기다렸다’는 이드의 말이 결코 좋은 뜻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번엔 또 뭐가 문제였던 겁니까? 서로 간에 쌓였던 오해는 모두 풀렸지 않습니까.”
“풀리기는 언제. 그저 내가 참은 것이지. 그 문제는 지금도 두고 보고 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겁니까?”
농담 없이 싸늘한 검후의 시선에 라울이 목을 움츠렸다.
그래도 서로 미운 정이 제법 쌓였다고, 검후의 노여움이 진짜라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검후는 그렇게 모르는 체하는 모습이 더욱 가증스럽다는 양, 라울의 면상을 향해 그가 적은 서신을 획하고 내던졌다.
다행이 내공은 실리지 않은 서신을 받아든 라울이 눈을 껌뻑거리자, 검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내 저택을 감시하는 걸로도 모자라, 그걸 대놓고 적어 놓다니! 이건 날 농락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 하하. 하.’
이런 검후에 대해 라울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제 이마를 쓸어내렸다.
평소의 그 능글거리던 표정을 만들어 낼 정신도 없는 것 같다. 딱 봐도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실수라는 티가 확 나는 모습이랄까.
‘상대가 라울이니, 저것조차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검후에겐 통하는 모양이네.’
당장 검후의 눈에서 쏘아지던 살기가 절반으로 누그러졌다.
저런 연기가 통할 줄이야. 감금되어 있는 동안 검후에 대해 깊이 연구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더해 라울이 솔직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 참, 뭐라 변명이 통하지 않을 실수로군요. 인정합니다. 저와 바벨이 검후께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면목이 없으나, 부디 한 번 더 용서를 바랍니다.”
“흥, 말은 잘하는군.”
“그게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실수에 대한 사죄 인사는 추후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맨입으로 넘기지 않겠다는 소리다.
그 말에 검후의 눈에 어린 살기가 거의 사라질 듯 줄어들었다.
역시나 두 손이 가득히 쥐여 주는 사과가 제일 잘 통하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검후에게도.
“자작의 그 말이 얼마나 잘 지켜질지 두고 보도록 하지.”
“휴~ 진땀이 나는군요. 그럼, 운이 좋았다는 말씀이 이것이었습니까?”
“처음엔 라울 자작을 연무장에서 보려고 했습니다.”
이드는 창밖에 있는 연무장을 가리켜 보였다.
검후가 라울의 무례함에 칼을 갈았던 건 진짜 농담이 아니었다. 그런 결심이 흔들린 것은, 준비 운동으로 시작한 수련에 너무 본격적으로 달렸기 때문이었다.
본 게임 전 몸풀기에 너무 힘을 빼 버리고 나니 검을 쥐어야 할 손아귀에 힘이 온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라울이 어디 만만한 인물도 아니고. 괜히 괘씸함에 징계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패하기라도 하면, 망신이 배가 될 일. 판단이 섬과 동시에 검후는 라울에 대해 생각했던 격한 징계를 깔끔하게 포기한 것이다.
이드로서는 의도치 않게 라울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고 할까.
“이거, 명예 후작께도 따로 선물을 준비해야겠습니다. 하하하..”
라울이 껄껄 웃는다.
정말 고마운 것인지, 처음부터 다 계획된 것인지. 저 웃음에 의심만 더 커지는 이드다.
“선물은 피터 씨가 카논에서 고생해 준 걸로 퉁치도록 하죠.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바벨의 인간으로서 그것참 듣기 좋은 말이로군요. 피터 지부장에는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피터 씨는 지금 어쩌고 있습니까? 카논의 황궁에서도 지금쯤이면 움직였을 만한데요.”
“그렇지 않아도, 황궁에 소환되어 1차로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1차…… 인 겁니까?”
이드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역시 백악궁이 소멸한 일로 카논의 황궁에서 ‘피터 자작’을 소환해서 조사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사고의 규모가 워낙 크지 않았습니까.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소환되어 조사를 받게 될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이드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논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던 사람이지 않은가. 더욱이 왕권 국가가 아닌가. 황제가 원한다면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우는 건 너무나 쉽다. 무엇보다 백악궁이 날아가고, 수도의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대형 사건인 만큼.
카논의 황궁에서도 적당히 죄인으로 내세울 인간이 필요할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막 자작이 된 피터는 쓰고 버리기에 딱 좋은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라울은 이드의 이런 걱정을 일축해 버렸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피터 자작은 대외적으로 엘라임 백작가의 인간입니다. 거기에 저희 바벨과도 튼튼한 연줄을 자랑하지요. 오히려 카논 귀족의 초대로 황궁에 방문한 저희 감찰관이 실종된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실종도 어디 그냥 실종인가. 거의 모두가 백악궁과 함께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시점이다.
라울이 비웃음을 닮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바벨은 그에 대해 카논에 항의와 함께 진상 규명을 요청할 것이고, 카논에선 감찰관과 인연이 있었던 피터 자작을 중간에 세우기를 선택할 겁니다.”
“확실히 카논 입장에선 그쪽이 더 가치 있는 사용 방법이긴 하겠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피터 지부장에게 힘을 좀 실어 줄 생각입니다. 강하게 나오는 바벨을 잘 달래 놓는다면 능력을 인정받을 테니까요.”
“바벨 입장에선 운이 좋은 흐름이군요. 카논의 내부 사정에 접근할 기회이니.”
“이것도 다 명예 후작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감사하고 있습니다.”
카논에도 초인이 있고, 그들은 초인이기에 바벨에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본인이 바벨에 소속된 것과 그런 바벨에 자신이 획득한 정보를 얼마나 넘기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이 가장 손을 뻗치지 못하는 곳이 바로 카논이다. 이전까진 상당히 폐쇄적인 곳이라고만 여겼던 카논.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국의 초인들을 단속한 것도 전부 혼돈의 파편의 영향이 아니었는지 깊이 의심이 되고 있었다.
다만, 당장 피터가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중요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아무렴 카논의 초인들이 협조적이지 않다고 해도, 겨우 자작이 획득할 수 있는 정보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단지 하나의 계기를 얻었으니, 그걸 잘 키워 보려는 속셈이었다.
우연하게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역시 스케스틱이 목적이었군요.”
“스케스틱이 그분의 이름이로군요. 이거, 떨리는데요.”
라울이 마주한 두 손을 열심히 문질렀다.
이드는 그런 상대의 너스레에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이 음흉한 인물이 어디까지 알고서 쫓아온 것일까.
“어디까지 알고 온 겁니까?”
“・・・・솔직히 극히 단편적이며, 억지에 가까운 보고였습니다. 붕괴한 백악궁에서 뿜어진 마나 기둥 안에서 드래곤이 솟아올랐다. 피터 지부장의 보고였습니다. 사실 처음엔 미쳤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친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게 됐나 봅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겠나.
“갑자기 사라진 명예 후작께서 새로운 인물과 함께 저택에 나타났으니까요. 그때서야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와 싸웠다는 드래곤에 대해서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 결과, 정신없이 달렸고, 지금 제가 여기 있지요.”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드래곤을 말입니다.”
뭔가 자신만만한 라울의 모습에 이드를 포함한 여럿이 인상을 썼다.
저 당당한 요구라니.
대놓고 거절하고 싶은 마음에 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해쉬 경과 바인 경부터 만나 보죠. 챙겨 주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요.”
“……쩝, 어쩔 수 없군요.”
입맛을 다시는 라울.
그 모습에 만족한 건지, 이드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