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97화
1232화
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쓸모없다니. 천하의 라울이 언제 그런 말을 들어 보기는 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표정 관리에 실패한 라울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품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나방이라도 씹어 버리면 저런 표정이 나올까?
‘자업자득이지, 자업자득이야. 입도 상대를 봐 가며 털어야지. 드래곤을 상대로 헛소리는
이드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바벨을 강력하게 보이려는 라울의 말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확신이 있는 건 아니다. 바벨의 간부들을 만나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대신 그간 보아 온 라울이라면 얌전히 사실을 밝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딱히 호위를 끌고 다니지 않는 라울의 성향만 봐도 그렇다. 어떤 조직이 자신들의 전투력 약한 핵심 간부를 호위도 없이 밖으로 돌린단 말인가.
이건 다시 말해, 라울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 하나쯤 빼내는 건 어렵지 않은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아마도 라울은 아군의 전력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기본 전략에 따라 스케스틱의 질문에 답한 것이리라
아군의 힘을 사실보다 강하게, 또는 약하게 인식시켜 적의 판단을 흩트리는 건 싸움의 기본이며, 정치의 기본이니까.
다만 라울의 실수 아닌 실수라면 그런 수작을 아군인 스케스틱을 상대로 부렸다는 점이다.
사실 인간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그래서 상대가 언제 뒤통수를 쳐 갈라설지 모르는 만큼, 같은 편일 때도 자신들의 전력을 전부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케스틱은 단순히 아군을 넘어 무려 드래곤이지 않은가.
도대체 바벨이 드래곤과 싸울 일이 무어라고 저렇게까지 꼭꼭 싸맨단 말인가. 혹여 싸우게 된다고 해도 그렇다. 외계에 있던 드래곤들이 돌아왔을 때쯤이라면, 과연 바벨과 드래곤의 싸움이라는 것이 가능하긴 한 일이냔 말이다.
그런 스케스틱을 상대로 스스로 약한 척에 바벨은 강하다고 떠들었으니. 저런 소리를 들을 만했다.
어쩌면 스케스틱이 바벨을 무시한 것도 이런 라울의 행동 원리를 단숨에 파악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비밀을 만들고 아군을 혼란케 하는 아군은 없느니만 못한 법이니까.
이런 상황에 스케스틱이 말을 더했다.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 초인은 배제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전투력도 기대에 미치지 못함은 물론이고, 살펴본 바에 따르면 파편과의 접촉 시 발생하는 ‘버서커’라는 통제 불가의 폭주 현상까지 있다더군요. 이는 전투에 있어 오히려 위험 요소가 될 겁니다.”
과연 드래곤.
한 번 빼 든 칼을 아주 인정사정없이 휘두른다.
오죽하면 일리나가 안타까움에 입을 가리고 라울을 살필까.
다행히 팩트에 두들겨 맞은 라울은 죽지는 않았지만, 대신 얼굴이 많이 창백해져 있었다.
왜 그렇지 않을까. 스케스틱이 꺼낸 말 중 농담은 한마디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진심이기에 라울이 중간에 끊지도 못했던 거다.
“그…… 크흠. 말씀하신 버서커에 대한 문제는 조만간 해결이 될 겁니다. 바벨에서도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연구해 온 일입니다.”
“그렇다 해도 초인이 전력으로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내 기준에서 초인의 힘은 너무 약하다. 더욱이 그대는 해결될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목표일 뿐. 이미 정리된 일이 아니지 않나. 심지어 그 해결 방법이라는 것도 소수에게만 적용 가능할 듯한데. 그렇지 않은가?”
“……!”
과연 드래곤, 라울의 말속에 든 문제점을 단숨에 들춰냈다.
얼마나 놀랐으면 저 라울이 입만 떡 벌리고 있을까.
그는 특히 버서커에 대한 대응법이 소수에만 적용 가능하다는 걸 들킨 데 가장 놀라고 있었다.
사실 간단한 일이었다. 초인이라는 것 자체가 세상이 낳은 존재로, ‘법칙’의 테두리 안에 있는 존재들이다.
또한 ‘버서커’는 초인 개인에게는 폭주지만, 세상의 입장에선 싸움에 불을 붙일 스타터에 불과했다. 즉,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란 말이다. 당연히 그 정상적인 현상을 회피하기 위해선 법칙을 비틀 필요가 있고.
여기서 결국 마법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마법에 있어 드래곤은 그야말로 종주나 다름이 없다. 라울이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 순간, 스케스틱의 머리는 단숨에 가능한 방법론을 추론하고, 그 약점까지 계산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마법사로서는 죽어 까무러칠 정도의 무시무시한 연산력인 거다.
상대가 스케스틱만 아니었다면 라울은 놀라기보다는 어떻게 바벨의 내부 정보가 흘러 나갔는지를 먼저 의심했을 터였다.
아무튼, 이런 스케스틱의 반응에 라울은 입술이 마른 듯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저 가벼운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온 이상, 그도 쉽게 끝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라울은 이 자리에서 바벨이 혼돈의 파편과 싸울 힘이 있음을 증명해야 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서 소외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드나 검후가 있으니, 그런 일이 쉽게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파편과의 싸움에서 거대한 축을 담당할 드래곤에게 외면당한다는 게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암시함은 확실했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가 어느새 바벨을 증명하는 자리로 변해 버렸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다.
초인이 당당히 선 이후, 이 땅의 힘 있는 자 중 감히 바벨에 힘을 증명하라 말하는 존재는 없었다. 초인이 자립하는 동안 바벨은 자신들의 가진바 능력을 온전히 내보였기 때문이다.
한데 느닷없이 드래곤을 상대로 시험을 보게 생겼다.
자존심을 생각하면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사실 그러기도 힘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게 현재 바벨의 입장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보더라도 자신들 초인과 혼돈의 파편은 숙명적인 관계에 있다.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랄까.
그런 깊은 이야기가 아니라도, 그간 버서커의 발생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가. 사회로부터 초인이 매도당한 일은 또 얼마나 되었나. 바벨은 그런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야 했던가.
한데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죽이는 일에, 바벨이 빠진다고?
그냥 구경만 하라고?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졌다가는 바벨의 존재 의의가 흔들려 버린다. 그런 불행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 라울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바벨은 초인을 위해 싸웠노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지 않겠는가.
거기에 더해서 라울은 여기서 한 발 더 앞을 보고 있었다.
‘이번 혼돈의 파편에 대한 사건을 무사히 처리하고 나면, 그걸 명분으로 하여 드디어 바벨이 세상에 당당히 나선다. 비로소 바벨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중 바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인지도만 보면 바벨은 비밀 단체에 속할 정도였다. 이건 사실 바벨의 설립 당시, 핍박당하던 초인의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좌우간 그렇게 시작한 바벨은 아직도 그리 알려진 조직은 아니다. 사실 애초에 그들이 세상에 나설 생각이 없었던 이유가 크기도 했다. 하지만 라울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숨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중에도 혼돈의 파편은 올라오고 있었다.
혼돈의 파편이 어떤 존재인가.
바벨에 있어서 그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이다. 특히 초인에겐 더없는 위험 요소. 하지만 그것이 꼭 초인에게만 그러할까.
아니다.
혼돈의 파편은 초인뿐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그야말로 세계의 적.
동화 속 마왕보다 질이 나쁘다. 마왕은 지배할 생각이라도 있지.
이놈들은 이 세상의 멸망이 목적이다. 이런 사실까지 파고들었을 때는 라울이나, 바벨에서도 무슨 질 나쁜 헛소리인가 싶었다. 이 세상을 멸망시켜서 남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곧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인간을 넘은 초월적인 존재에게 무얼 바랄까. 이런 이유로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은 그 자체로 명예로운 일이 된다.
싸움의 목적이 목적인 만큼, 머지않아 혼돈의 파편이 완전히 세상에 나게 되면 세상 모두가 맞붙어야 할 대상이 바로 그들이 되는 거다.
그때가 왔을 때, 세상은 칭송하리라.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힘든 싸움을 해 오던 이들이 있었음을 알고.
‘그중 하나가 바벨이 되는 것이지.’
바벨은 많은 조직원과 강력한 무력, 그리고 넉넉한 금력을 가졌다. 그런 조직에게 명예와 명분까지 더해진다면?
더 말해 무엇할까. 그때야말로 바벨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를 순간이었다.
무수한 칭송과 지지를 받으며 세상으로 나가 저 마탑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는 거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라울이 말을 이었다.
“역시 드래곤은 위대하군요. 말씀하신 건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케스틱 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 필요한 건 일정 수준 이상의 전력이 아니겠습니까. 바벨이 찾은 방법이 소수에만 적용되어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 하지만 바벨에는 그 수준 이상의 전력이 부족하다. 그대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하하. 이것 참 난감하군요.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제 초인기의 특성 때문에 주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 단순 전투력만 보자면 겨우 20위에 불과합니다. 또한 20위 안에서도 전투력의 간극은 매우 큽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힘의 차이는 더욱 커진단 말입니다. 바벨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바벨의 강함을 이렇게 열심히 설명한 적이 있던가.
급 현타가 밀려온 라울은 어쩐지 서글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케스틱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답했다.
“그렇다 해도 전력으로서는 크게 의미가 없다. 그대의 말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해도, 쓸 수 있는 전력은 다섯을 넘지 않을 것이다.”
쩌적.
이 정도면 라울뿐 아니라, 바벨의 자존심에 제대로 금이 가는 말이다. 라울의 턱이 울렁거리며 이가는 소리가 났다.
“스케스틱 님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 다섯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바벨이 약하다 말씀하시는 근거가 궁금합니다.”
“신기하군. 왜 그걸 묻지? 내 근거는 바로 그대다. 그대가 바로 바벨의 기준이다.”
“하…… 하하. 실로 오랜만에………… 가슴이 끓어오르는군요.”
자신으로 인해 바벨이 도매급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 말을 들은 라울의 눈빛이 변했다.
이드와 검후가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뭔가 할 모양인데?”
“그렇죠?”
“저, 라울이 뭘 한다는 말씀이신지?”
그에 쉴라가 의문을 표할 때, 라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하고 울렸다.
“아무래도 바벨에 대한 스케스틱 님의 생각을 바꾸려면 저에 대한 편견부터 벗겨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부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스스슥.
항상 보이던 여유로운 분위기는 집어던지고, 두 눈에 활활 타오르는 황금빛을 뿜어내는 라울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사라고 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