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98화
1233화
“어떤 기회를 달라는 것이지?”
기세를 피워 올리는 라울의 모습에도 스케스틱은 보이지 않는 듯 무심히 물었다.
반대로 이드 일행은 손에 땀을 쥔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라울과 스케스틱.
둘을 제외한 모두는 어느새 한데 모여 흥미진진한 얼굴로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소곤거리는 중이었는데, 지금은 그 소곤거리던 것조차 멈추고서 라울의 입에서 나올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나? 나오나? 나오는 거냐!’
“스케스틱 님께 제 힘을 보여 드릴, 초인의 초인기가 얼마나 특별하고 강한지 맛보일 기회를 주십시오.”
‘나왔다!!’
마치 고생 끝에 아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이드 일행은 소리 없이 환호를 올렸다. 설마 하던 그 말이 결국 라울의 입에서 나오고야 만 것이다.
“이야, 라울의 입에서 결국 저 말이 나오게 만드네.”
“그러니까 말이에요. 저 얄미운 놈의 말문을 막아 버리다니. 역시 드래곤은 위대해요.’
이드와 검후가 속닥거렸다.
쉴라는 그 모습을 묘한 표정이 되어 바라보았다. 도대체 말발이 좋은 것과 드래곤의 위대함이 무슨 상관일까.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두 분, 저 상황은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바벨의 라울과 드래곤이 싸운다니.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했다. 둘 다 쉽게 볼 수 없는 이들이 아니던가.
더욱이 말이 좋아 실력을 보이겠다는 거지, 둘이 붙으면 그 여파가 어디 보통일까. 당장 머릿속에서 쉐어 가든이 무너져 내리던 모습이 안티로스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오직 쉴라의 마음속에만 담겨 있을 뿐, 지금 이 자리에 그녀의 염려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얘는, 저 좋은 구경거리를 왜 말리니? 그냥 둬!”
평소 그녀를 잘 살펴 주던 검후조차 행여라도 그럴 생각은 말라며 눈치를 준다.
그 말에 쉴라는 조금 슬퍼졌다. 다시 돌아온 검후는 다시 젊어진 듯 생기있고 매우 즐거워 보여 자신도 기뻤지만, 그만큼 위엄 수치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요. 쉴라 경. 그냥 두세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라울의 진짜 실력을 보겠어요.”
그리고 이런 검후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드도 나서서 쉴라의 걱정을 밀어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라울의 싸움을 보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이드 일행에게 있어 이번 기회는 그야말로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지금이야 같은 적을 상대로 손을 잡고 있지만, 검후를 납치 및 감금한 전적이 있는 이상 언제 또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후에 서로 싸우게 될 때를 대비해 라울의 실력을 보아 둘 필요가 있었다.
기실 같이 싸우게 될 때를 위해서라도 어차피 언제든 한 번은 필요했던 작업이었다.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던 것은 그럴 분위기를 만들라치면 라울이 능글맞게 잘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뭐, 이런저런 사건들로 바빴던 까닭도 있긴 하지만.
“평소엔 한없이 능글거리더니, 그래도 할 땐 하네요.”
“무슨 말이에요?”
서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라미아와 일리나의 대화였다.
이드가 무슨 말인가 해서 귀를 기울이자 라미아의 말이 이어졌다.
“드래곤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잖아요. 드래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보통 배짱은 아닌 거죠.”
“알겠네요. 하긴, 패배가 확실한 싸움만큼 힘든 것도 없죠.”
가르침을 바라는 단순 대련도 아니고, 스스로 실력에 자신이 있고,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라면 그만치 피하고 싶은 일도 없으리라.
일리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드는 잠시 후 비스듬히 고개를 꼬았다.
‘저 라울이 프라이드가 높던가?”
처음 저택으로 검후를 찾아와 거침없이 머리를 숙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프라이드의 ‘프’ 자도 없어 보였다.
물론 필요에 따라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또 돌아보면 당시 그가 고개를 숙인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라울이 속한 바벨을 위해서였다.
즉, 개인의 프라이드가 걸린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야기야 어쨌든, 라미아의 말대로 드래곤에게 용감하게 싸움을 건 사실만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설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니까.”
이드가 라울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케스틱의 승낙을 받은 뒤 마음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딱 봐도 전력을 쏟아 내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다.
아무렴 상대는 전력을 숨기면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 싸움은 바벨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 무조건 고평가를 받아 내는 게 최우선 목표다.
그 어디에도 상대를 이기겠다는 자신감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이라도 그런 모습이 보였다면 이드는 그간 바벨의 도움을 받은 의리로 허튼 희망을 버리라고 충고해 줬을 것이다.
그가 싸워야 할 스케스틱은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이드가 스케스틱을 처음 봤을 때도 그는 혼돈의 파편 하나와 일대일로 싸우던 중이었다. 뭐, 너무 쉽게 밀리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모습 하나만으로도 스케스틱의 전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스케스틱은 성룡과 고룡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단계였다. 물론 드래곤 중 그린 일족은 전투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말을 듣기는 한다. 아무래도 타고나는 성격과 속성까지 싸움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린 드래곤이 일생을 숲이나 산에서 조용히 보내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런 기준도 고룡에 이르면 큰 의미가 없다.
라울의 힘은 분명 강력하다. 골든아이라는, 어쩌면 세상에 오직 그만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특별한 초인기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스케스틱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그렇게 패배가 확정된 라울이 싸울 준비를 마치고 이드 일행을 향해 아니꼬운 얼굴을 하고는 다가섰다.
“남의 싸움에 대해서 떠들려거든 듣지 못하게 조치라도 좀 하시지 그럽니까.”
“왜 그래야 하지? 대련의 승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당연한 거잖나. 그게 불만이면 스케스틱 님을 따로 만났어야지.”
“뭐, 그건 그렇게 넘어가죠. 다만 검후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의 연무장을 잠시 빌리고 싶습니다.”
실력을 보이기 위해 싸울 장소가 필요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검후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의 실력을 보고 싶은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고, 거기에 더해 라울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기대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허락하지. 마음대로 쓰도록.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나와 이드, 그리고 은색 기사단이 대련을 참관하고 싶다.”
“연무장의 주인이 보겠다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나도 허락하지.”
라울은 물론 스케스틱의 허락도 받았다.
장소가 정해지자 대련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접객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당장 연무장으로 몰려 나갔다.
그사이 쉴라의 명령에 의해 저택의 문은 굳게 닫혔다. 대련이 이어지는 동안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작 쉴라는 중간에 방해가 있을 것보다 다른 데 더 마음이 쓰였다.
“검후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니?”
“라울은 둘째 치고, 스케스틱 님의 힘을 생각하면. 수도에서 싸워도 괜찮겠습니까? 혹시라도 여파가 외부에 미치면 라울이 정말 약하다면 스케스틱이 대단한 힘을 쓸 필요도 없다. 아니,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라울은 바벨의 중요 간부다. 스스로 전투보다는 다른 분야에 특화되었다고 하지만, 그만한 자리에 있는 이상 결코 그 힘을 얕잡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둘이 뿜어낼 힘은 강력할 것이다.
만에 하나 그중 일부라도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면.
콰앙!
콰르르릉!
스케스틱이 쏘아 낸 마법에 성탑의 허리가 꺾여 무너지는 소리가 당장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쉴라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검후가 걱정도 팔자라며 쉴라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너는 젊은 아이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으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은 간다만. 그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이다.”
“하지만…….”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걱정이 아니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이래도 그러는구나. 여기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느냐?”
검후의 눈이 일리나와 라미아, 그리고 스케스틱을 지나 이드에 가서 멈췄다. 그리고 그 뒤를 쫓은 쉴라의 눈은 최종적으로 검후에 가서 멈췄다. 거기에 이른 쉴라의 눈은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검후는 그것 보라며 빙그레 웃었다.
“알겠니? 나도 있고, 이드도 있다. 싸움의 여파가 외부까지 미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완벽한 건 없다. 행여 있을지 모를 일에 대해 모두가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장소를 옮기자는 것이 본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검후에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드나 검후를 누구보다 믿고 있는 것이 쉴라 자신이기도 했고.
“그리고 장소를 옮기면 아까운 기회가 날아가지 않겠니?”
“기회라고 하시면?”
“사랑하는 내 딸들이 두 번 다시 없을 대련을 볼 기회 말이다. 세상을 살면서 드래곤과 바벨 간부의 실력을 한자리에서 볼 일이 언제 또 있겠니. 더욱이 지금처럼 참관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을 기회가 말이야. 그런데 장소를 옮기면 모두가 볼 수가 없지 않니.”
“…………검후님…….”
생각지 못한 말에 쉴라는 적잖이 감격한 듯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나 이드의 실력을 믿으라고 했지만, 결국 그 목적은 은색 기사단의 견문을 넓혀 실력을 높일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뭘 그러고 있니? 내 말을 들었으면 움직여야지.”
“네. 최소한의 경계 인원만 남기고 모두 연무장에 집합시키겠습니다.”
“아니, 경계를 둘 필요 없어요. 정문만 잘 잠가 두고 다 오라고 하세요. 어차피 담을 넘는 침입자 정도는 어디에 있더라도 알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드의 말이었다.
그에 쉴라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즉시 은색 기사단을 모이도록 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검후와 은색 기사단이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다.
잠시 후 연무장 주변으로 모든 은색 기사단이 소집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검은 돌 소속의 인원도 끼어 있었다. 아무렴 그들만 빼놓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