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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02화


1237화

달리기 대회에서 말을 타고 결승선을 통과한 상대를 보면 저런 얼굴이 되지 않을까. 한숨을 푹 내쉬는 라울의 모습에 검후가 진득한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어리석구나. 저게 바로 드래곤인 것을.”

“저런 것이 바로 드래곤인데 말이죠.”

절묘하게 합이 맞은 검후와 라미아가 서로를 돌아보고는 말없이 주먹을 맞댔다.

라울에겐 놀라울지 몰라도, 두 사람에게 있어 스케스틱의 저런 모습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야말로 드래곤이기에 허락된 권능. 드래곤이 위대한 존재라고 불리는 이유다.

수많은 서적에서 그들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까지 깊이 이해한 것은 아니기에 나오는 반응이리라.

“공부 부족이구나.”

마치 놀리는 것 같은 검후였지만.

정작 그녀 옆에는 라울 못지않게 놀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쉴라였다. 저택 식구들 가운데 이드 일가와 검후, 그리고 스케스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자가 바로 그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당사자인 라울만큼이나 퓨리 사이클론의 힘을 잘 파악했고, 그래서 그걸 단순히 마나를 뿜어내는 간단한 행위로 날려 버린 스케스틱의 행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모두 저처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흐음~ 모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저 정도는 다 할 수 있기는 하죠.

라미아가 은근히 자랑하듯 말했다.

그녀는 이천 년 이상 나이를 먹은 드래곤을 기준으로 잡았지만, 사실 꼭 그들만 가능한 건 아니다. 드래곤이 가진 것은 강대한 마나가 다가 아니니까.

그들에겐 강력한 신체와 드래곤 하트, 그리고 마법도 있다. 이런 것들을 잘 이용하면 어린 드래곤들도 저와 같은 위엄을 보이는 게 가능하다. 다만 더 좋은 방법들이 있는 만큼,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을 뿐.

“굉장하군요.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이제 좀 제대로 알게 된 느낌이에요.”

쉴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모습에 검후는 흐뭇하면서도 씁쓰레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좀 알겠다는 쉴라의 말 때문이었다. 그녀가 드래곤이 가진 힘을 일부나마 느낀 것은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진짜 드래곤의 힘은 저런 수준이 아니다. 더욱 크고 무서운 얼굴을 감추고 있는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다. 쉴라는 그들이 가진 진짜 모습의 백분의 일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검후는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걸 느꼈다니 기쁘구나. 그게 너희들에게 이 대련을 보여 준 이유 중 하나란다. 드래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해 주는 것 말이다.” 

“검후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전 오히려 의문이 생기는데요?”

그때, 스폴이 갑작스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도 쉴라만큼은 아닐지언정, 대련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유심히 지켜보던 이들 중 하나였기에 검후의 말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무슨 의문이니?”

“저런 엄청난 힘을 가진 드래곤들이 왜 혼돈의 파편을 이기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요. 일단 머릿수도 훨씬 많았던 것 같은데.”

스폴도 혼돈의 파편이 얼마나 강한지는 눈으로 보아 알고 있다.

그러니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스케스틱의 힘 역시 그녀 입장에서는 규격 외의 것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딱콩,

“아얏! 아픕니다.”

검후는 그 질문에 스폴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는 것으로 답했고, 스폴은 머리를 감싸 쥐고 괜히 엄살을 떨었다.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아파야지.”

“한심한 질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생각해 보렴. 너와 쉴라가 저 아이들을 상대로 싸운다면 어떨 것 같으냐?”

검후가 가리킨 ‘아이들’이란, 연무장에 가득한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저 아이들의 숫자가 많으니, 너희 둘이 지겠니?”

“・・・・・ 이해했습니다. 확실히 제가 한심한 소리를 했네요.”

스폴은 절대 아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검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숨에 이해했다.

자신과 쉴라가 혼돈의 파편이고,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은 드래곤이다. 이 둘이 싸운다면 과연 어떨까.

우선, 오로지 힘 대 힘으로만 충돌하면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

자신과 쉴라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기사들의 실력이 그렇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은 그들을 직접 훈련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철저하게 가르쳤다. 만약 그 방법대로 자신이나 쉴라를 상대하려 한다면?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엄청나게 고생해야 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오로지 힘으로만 부딪혀야 하는 대련 같은 게 아니라, 온갖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전쟁이라면 어떨까.

불리할 때는 도망가고, 모래도 뿌리고, 함정도 팔 것이다. 전력을 분리시키고, 각개격파를 시도할 것이다.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게 아니라면 적의 전력을 분열시킬 방법은 수없이 많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과 쉴라가 그런 방법을 동원해서 기사들을 공략한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건 자신과 쉴라이리라.

그리고 혼돈의 파편과 드래곤 사이에도 이와 같은 결과가 나왔으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특히나 세상의 멸망을 위해 움직이는 혼돈의 파편을 상대로, 수성전을 펼칠 수도 없는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알고서도 위험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잊지 말거라. 지금 이 땅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인드 마스터와 위대한 드래곤들 덕분이란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멸망해 버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인드 마스터와 저 위대한 드래곤들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검후의 말에 스폴이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그 방향이 애매했다. 얼핏 검후를 향하는 듯하면서, 자세히 보면 그 뒤에 있는 이드 일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대련이나 계속 보자꾸나.”

검후는 그 모습에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사이 대련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

라울의 공격을 소멸시켜 버린 스케스틱이 곧장 반격을 이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마나의 파도에 일순간 얼굴이 창백했던 라울이 거리를 벌리고서는 말했다.

“실로 굉장합니다. 당신의 일족은 모두 이 정도 수준입니까?”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이 대련을 여기서 때려치울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런 이유로 바벨의 이름이 흔들리게 될지라도.

‘차라리 그편이 바벨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지. 저런 것이 드래곤의 진짜 힘이라면. 저런 존재들의 싸움판에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얼만큼의 희생이 생길지…….’

승패가 문제가 아니다.

아니, 패배했을 경우는 확실히 문제가 된다. 하지만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더라도, 과연 그 시점에서 바벨이 온전히 서 있을 수 있을까.

한계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다면, 설령 바벨의 이름이 남아 있더라도 그 영향력이나 대륙에 미치는 힘은 오히려 전보다 형편없이 줄지도 모른다. 애초에 대륙에 당당히 서기 위해 전투에 끼어들려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머리 뜨거운 무투파라면 대련 중 생각이 이런 복잡한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바벨에서 맡고 있는 일이 일이다 보니, 과정과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려운가? 싸움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게 부정적인 루트를 타고 내려가는 흐름 사이로, 스케스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흠칫 놀란 라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두려우냐고? 내게 싸움을 피하고 싶으냐고 물은 건가?’

흐릿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잡념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꼭 냉수를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다.

“겁을・・・・・・먹었다고? 이 내가…….”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확정된 일도 아니다. 앞서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혼돈의 파편과 직접 싸울 수 있는 초인의 수는 결코 많지 않다고.

그리고 그런 초인들은 모두 바벨의 간부들이다. 설령 간부가 아닐지라도, 바벨의 일원으로서 초인의 권익을 위해 기꺼이 힘을 쓰는 이들이다. 그들이 한꺼번에 전사할 경우 바벨은 분명 휘청일 것이다.

하지만 바벨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오로지 간부들로만 돌아가던가. 아니다. 무엇보다 바벨은 ‘초인 스스로 초인을 수호한다’는 부러지지 않을 신념이 있다.

그것이 있다면 잠시 흔들릴 수는 있을지언정 쓰러질 리 없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마스터. 그만 건재하다면 바벨이 무너지는 일 따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했단 말인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큰 목표를 가졌다면,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라울은 그러한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검후를 납치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요소들로 리스크를 줄였음에도, 위험보다 바벨이 가질 수 있는 이익이 컸기에.

이번에도 그러했다.

스케스틱의 말에 힘으로서 증명하겠다고 나설 때도 분명 이러한 마음이었다. 한데 그런 마음이 어느새 흔들리고 있던 것이다.

그야말로 두려움이 만들어 낸 최악의 결과가 눈을 어지럽혔던 것.

“바란다면 대련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다.

스케스틱이 말했다.

처음과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그 앞에 선 라울은 어쩐지 그 무표정이 자신의 나약함을 비웃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 하하하.”

라울은 이 또한 나약해진 마음이 만들어낸 잡념일 뿐임을 알았다. 스케스틱이 자신을 비웃을 일은 없다. 이미 처음부터 자신이 그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새삼 비웃을 리가 있는가.

자신이 패배했다고 한다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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