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07화
1242화
“군주라면 사건의 이면을 살필 줄 알아야 하는 법. 황녀는 지금의 자세를 잊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할마마마.”
검후가 머리를 쓰다듬고, 황녀가 언제 심각했냐는 듯 헤실거리며 웃음을 짓는 그 시각.
발터 백작의 저택에선 끙끙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앓는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라울. 그는 백작의 집무실에 놓인 소파에 반쯤 몸을 눕히고 있었다.
“에구구~ 죽겠다. 온몸이 그냥 안 아픈 곳이 없네.”
어떤 자세를 해도 몸이 편하지 않은지, 이리저리 몸을 틀던 라울은 이내 팔걸이 한쪽에 다리를 턱 하니 걸쳐 올렸다. 이 과정에서 신발의 흙이 소파에 묻었다.
“이거 마시고 발은 내리게. 내가 아끼는 소파야.”
그에 눈살을 찌푸린 발터가 인내심을 발휘, 라울의 다리를 까내리는 대신 서랍 속 포션을 던져 주었다.
그야말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이랄까.
“자넨 나보다 이따위 소파가 중요한가? 어차피 흙이야 닦으면 될 것을.
“그래서 포션을 준 거야. 아니었으면 창밖으로 던져 버렸을지도 모르지.”
“쳇, 포션이 무슨 소용이라고? 이런 마나통에 포션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다는 것도 모르나?”
“……그렇게 불만이면 내놔!”
더 참지 못한 발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효과가 미미한 걸 모르나? 그래도 아예 효험이 없는 건 아니라서 내줬건만, 저런 태도라니.
심지어 소파에 걸친 발이 아직 내려오지도 않았다!
“하하. 그럴 순 없지.”
그 모습에 라울은 급히 포션을 마셔 버렸다.
그래도 성의를 생각한 것일까. 라울이 다리를 내리고 소파에 눕혔던 몸을 일으켰다.
하나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게 사실인지, 그는 움직일 때마다 여전히 끙끙거렸다.
그리고 이런 친구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발터도 화를 내던 걸 멈추고는 피식거리며 라울의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
“그나저나 신기한 일이군. 어지간해서는 직접 손을 내는 일 없는 자네가 싸움이라니.”
“나도 이런 고생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과 행동이 다른데?”
“그럼 어쩌라고? 바벨이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서 밀려나게 생겼는데. 나라도 개처럼 뛰어서 증명을 해야지.”
이미 라울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발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 초인과는 그야말로 상극인 그들과의 싸움에 바벨이 빠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잘 증명했으니, 고마워라도 할까?”
“당연히 그래야지. 이번 일은 온전히 내 공이라고. 내가 평소에 직접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작정하면 한 싸움 해. 파괴력으로만 따지면 마스터 말고는 누구에게도 안 진다고!”
“그렇기는 하지.”
분명 파괴력만 따지면 라울의 골든아이는 바벨에서도 손꼽힌다. 문제는 발사에 걸리는 시간이다.
하나 발터는 굳이 지금 그 부분을 언급하진 않았다. 라울의 말대로 어쨌든 바벨의 힘을 증명하는 일에는 성공했으니까. 다만 의문은 남는다.
‘바벨의 힘을 의심했으면서, 고작 라울 하나를 보고 바로 인정했다고? 뭔가 이상하잖아.’
바벨의 힘을 가늠하기에 라울은 결코 적당한 표본이라고 하기 힘들다.
초인기가 파괴력만으로 그 우열이 나뉘는 것도 아닐뿐더러, 라울의 전문 분야가 전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는 라울과 대련을 했고, 바벨을 인정했다.
어쩌면 그 대련의 목적은 다른 게 아니었을까.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도 듣자마자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만한 일을, 정보를 담당하는 라울이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발터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저 음흉한 녀석이 이런 수상한 점을 그냥 넘길 리가 없다.
이런 생각으로 침묵이 길어졌기 때문일까.
발터의 표정을 살핀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에 놓여 있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너무 복잡한 것도 좋지 않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바벨을 증명하는 게 대련의 진짜 목적이 아니라는 거 말인가?”
“아니, 대련의 목적은 그게 맞아. 다만 일방적이진 않다는 거지.”
“스케스틱. 드래곤이군.”
“쓰읍. 여전히 좋은 술을 마시는군. 그래. 드래곤, 믿기나? 갑자기 드래곤이라니. 그들의 대단함은 알고 있지만, 그 존재에 확신을 가진 적이 있냐는 말이야.”
라울이 자신 앞으로 밀어 주는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발터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갑자기 찾아온 라울이 소파에 드러누워 드래곤과 싸웠다는 말을 했을 때, 무슨 헛소리냐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왔더랬다. 그리고 앞뒤 정황을 알게 된 지금도 사실 드래곤이라는 단어는 허상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번 대련은 자네 같은 사람들에게 드래곤의 힘을 증명한 거야. 내가 바벨의 힘을 증명한 것처럼.”
“감히 의심하지 말라는 건가?”
“바로 그거야. 위대한 존재가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정도가 될까. 조용하지만 오만한 외침이지. 하지만 절대 과하지 않아. 그들에겐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 힘을 피부로 느낀 라울이다.
그는 잔에 담긴 술을 몽땅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절대 술이 독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바벨보다도 강하다는 뜻이냐.”
“분명히 말하지. 그들은 바벨보다 강력해 드래곤은 진짜야.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해!” 라울이 눈을 똑바로 뜨며 말했다.
하지만 발터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래서야 마치 헤어진 연인에게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 말은 평소 자네답지 않아. 누군가와 손잡지 않아도 바벨은 충분히 강해.”
“그래 우린 강하지. 하지만 마스 왕국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가? 제국처럼 압도적인 힘을 가졌어? 아니, 그렇지는 못하지.”
“국가와 우리는 성격이 달라.”
“드래곤도 국가는 아니야. 그런데도 그들의 힘은 왕국을 넘어서지. 드래곤 하나의 힘이, 왕국을 넘어선다고.
“……그래서, 드래곤 아래로 들어가자는 말이냐?”
“아니,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다. 나는, 아니. 바벨은 적이 얼마나 강력하고 위험한지 여태 정확히 모르고 있었어. 적어도 혼돈의 파편과 싸우기 위해서는 드래곤이 필요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발터는 어쩌면 지금까지 드래곤의 대단함에 대해서 떠들어 댄 라울의 말이, 사실은 드래곤이 아닌 혼돈의 파편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대단한 드래곤과 싸웠던 혼돈의 파편.
그렇게 강력한 드래곤을 외계로 몽땅 내쫓아 버린 혼돈의 파편.
그 힘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드래곤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과연 그 정도일까.’
발터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정신의 관 토벌에서 혼돈의 파편 중 메르시오를 직접 보았다.
두 눈으로 본 메르시오의 힘은 분명 강력했다. 혼자서는 감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을 만큼.
그러나 항거불능이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닌 동료들이 나선다면, 바벨이 나선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를 찾은 라울은 그 판단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발터는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벌써 나왔다.
검후와 명예 후작, 그리고 아나크렌 제국과는 이미 손을 잡았다. 거기에 드래곤이 더해질 뿐이다.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돌아 나올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는 상황. 그렇다면 바벨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나크렌의 백작으로서도 제국의 전력을 아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생각을 마친 발터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대충 네 생각은 알았다. 그럼 대(對)혼돈의 파편 동맹의 관계를 그런 기준에서 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아나크렌의 백작인 동시에, 바벨의 장로.
그런 포지션으로 현재 황제와 바벨 사이에서 연결 통로 역할을 하는 발터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라울이 빙긋 웃었다.
“후후후.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
“그런 자네는 너무 말을 돌리고 말이지.”
“어쩌겠나. 그게 내 말버릇인데.”
“흥, 말은 잘하는군. 그래 놓고는 그 귀찮은 말버릇이 검후 앞에서는 발동하지 않았잖아.”
“흐~ 나도 그분의 검은 무섭거든.”
“내 주먹도 충분히 무서울 수 있네만.”
발터는 불끈 쥔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물론 그나 라울이나 그 주먹이 진짜 휘둘러질 일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잠시 시답지 않은 소리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마스터에겐 언제 보고할 건가?”
“보고, 해야지. 드래곤에 대한 확인도 완료했으니까, 서둘러야지. 자네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야. 통신구 좀 빌려주게.”
“・・・・・・ 서둘러야 한다는 사람이 술이나 마시고 앉았던 건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몇 시간 늦어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답답한 듯 가슴을 치는 발터에 라울은 듣기 싫은 잔소리라며 귀를 막아 버렸다. 그야말로 아이들이나 할 행동이다.
이런 모습의 이들을 두고 그 바벨의 간부라고 생각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대련이 있고, 하루가 지났다.
날이 밝은 안티로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소란스러웠다.
전날 저녁, 갑자기 하늘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빛줄기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걸 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그야말로 생물의 기본인 생존 본능이 움직인 것이다.
이에 황궁에서는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고 나섰다. 혹시라도 모를 사고를 대비해 수도의 병사와 기사들이 움직였다.
헛소문이 퍼지는 걸 막고, 사고를 대비했다.
그리고 날이 밝음과 동시에 황궁에서는 서둘러 어제 일에 대해 발표했다.
어제의 빛줄기는 결코 외부의 공격이나 습격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단지 황궁 마법사들의 연구가 사고를 일으켰을 뿐이라고. 자세할 것도 없고, 자세할 수도 없으며, 자세하다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유였지만.
그 간단한 설명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라면 그럴 수 있지.”
“암만! 마법사님들이 사고 친 것이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그나마 이번엔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야.”
물론 황궁 마법사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도 않은 사고를 친 것이 되었으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것은, 수도의 백성 중 황궁의 발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평소 행실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증거랄까.
하지만 황궁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평민들까지였다.
“정말 황궁 마법사라고? 방향이 이상한데.”
“뭔가 있는 것 같군.”
“별수 있나. 뭐가 있어도 황제께서 묻어 두시려는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