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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08화


1243화

“황제가 사고라는데 자기들이 어쩔 거야.”

이드가 창밖을 바라보며 비스듬히 웃어 보였다.

창틀에 기댄 이드가 내려다보는 것은 주택가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수도 기사단과 그들이 이끌고 온 병사들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어제.

열선이 뿜어진 주택가를 중심으로 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병사들이, 황궁의 발표에 따라 물러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에 불만을 가진 대신들도 있었지만, 대놓고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고라는 황제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건 황제를 의심한다는 의미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사를 표시하기에 현재 아나크렌 황실의 지배력은 매우 강력했다.

그 굳건함이란 다른 왕국이나 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황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는 무공의 공이 컸다. 그렇다. 이번에도 근본적인 이유에는 이드가 있었다.

황궁을 중심으로 무공이 퍼졌고, 그로 인해 아나크렌의 황실은 기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충성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 검후의 존재감도 매우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비록 알게 모르게 검후와 황제 사이의 균열에 대해 말이 나오긴 했지만, 그에 대한 건 어디까지나 중앙 정치에 발을 들인 대신들과 귀족들 간에 나도는 소문일 뿐.

기사들에 있어 아나크렌의 황실과 검후는 곧 한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기사들의 지지를 받는 황궁의 발표에 증거도 없이 의심하는 건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야 누구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황제가 수습을 잘해 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넌 특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도 전날 첨탑 옆을 스치고 지나던 열선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라미아의 호언장담을 든든하게 믿었건만 그렇게 맥없이 뚫려 버릴 줄이야!

“에잇, 그건 사고였다니까요. 애초에 대련에 그런 걸 꺼낸 라울 탓이란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비겁한 변명이지.”

“그러는 이드도 어쩔 수 없었으면서!”

이드가 살살 긁어대자 라미아가 금방 발끈하고 나섰다. 평소보다 끓는점이 한참 낮았다.

“그만해요, 둘 다. 어차피 아무 일 없이 잘 끝났잖아요.”

이미 지난 일로 투닥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 일리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봐요, 일리나. 이드가 어제 일로 자꾸 절 탓한단 말이에요. 우엥~

라미아가 일리나의 가슴에 안겨 울었다.

“잠깐만! 그렇다고 우는 건 반칙이지!”

그에 일리나의 눈이 새치름한 기세를 담아 자신을 향하자, 이드가 화들짝 놀라 반발하고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가짜 울음은 멈춰!’라고 하고 싶었다. 라미아는 절대 이 정도 일로 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 얼굴 가짜잖아! 어째서 그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건데!”

“칫. 좀 속아 주면 어때서.”

“어떻기는, 억울하지.”

어디 하면 안 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어쨌든 전날 사고의 가장 큰 이유가 라미아의 방심인 건 사실이었다.

굳이 자신이 그 말을 다시 꺼낸 것은, 다음엔 좀 더 신중하자는 의미였을 뿐인데 말이다.

“매정한 남자는 인기 없어요.”

“인기 없어도 상관없는데?”

이미 판매 완료다. 오히려 인기 있으면 곤란하기만 하다.

능글맞은 대답에 라미아가 바르르 떨었다. 다시 시작된 투닥거림을 일리나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오가는 이야기 중 하나에 신경이 쓰인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의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번 일이 황제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요?”

원래 작은 일 하나하나가 쌓여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법. 황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사소한 불만들을 쌓아 왔는지는 모르는 게 아닌가. 더욱이 이번 일.

속사정을 잘 아는 저택에서야 별것 아니라고 넘기고 있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날 라울이 쏘아 올린 열선은 누가 보아도 위협적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향했을 때, 무사히 몸을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할 만한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

그래서인지 열선을 본인에 대한 위협으로 인지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

“일단 에단, 에린 커플의 말을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황궁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수습에 나서고 있어서. 오히려 황제가 숨겨 둔 힘의 일부가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나 봐요.”

라미아가 말했다.

그래서 부담으로 작용할 일도 없었다. 오히려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눈을 번뜩이는 자들이 많았다. 사실 전력의 일부를 숨겨 두는 건 권력자의 습성이다.

만약을 대비해서도 그렇지만, 대중에 밝히고 싶지 않은 일에도 동원할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황제라도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황제이기 때문에 더욱 드러나지 않은 손발이 필요한 일이 많은 법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자들 입장에선 오히려 전날의 사건을 좋게 보고 있기도 했다.

숨겨진 힘의 일각이라도 보았다며, 판단의 재료로 삼고 있달까?

“아무튼, 검후의 말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드가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보이다 라미아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에단, 에린 커플이라니. 두 사람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된 건데?”

“그런 사이가 된 건 아니고 될 예정이랄까? 그 정도로 붙어 다니면 언젠가 파팍, 하고 불이 붙을 거잖아요.”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흥미진진하다 못해 음흉해지는 라미아의 얼굴에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인간관계가 어디 그렇게 단순하던가. 자신이 보기에 두 사람이 사귈 가능성은 결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을 다시 꺼내 라미아에게 고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이드는 서재 밖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검후가 조용한 것 같네요. 아니, 저택 전체가 조용한가?”

현재 이드 일가족이 모여 있는 곳은 서재였다. 저택에 있을 때 그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었다. 조용한 데다 햇빛도 잘 들어 낮잠을 자기에 최고였다. 무엇보다 독서와 함께 드라마, 영화 감상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즐기는 일리나에게 특히 최적화된 장소였다.

하지만 이 서재라고 마냥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건수만 있으면 이드와 일리나를 찾아오는 검후가 있었고, 예고 없이 불쑥 날아드는 비올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비올라는 연구에 막히는 일이 없으면 지하에 박혀 있는데, 검후는 시도 때도 없이 이드를 찾는다. 특히 카논에서 돌아온 요 며칠은 그야말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이드의 의문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에 일리나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새로운 기사단 입단 후보들이 생겼잖아요. 오늘부터 시험을 본대요. 아마도 기사들 모두 그쪽으로 가 있는 게 아닐까요?”

“입단 후보들이라면 바인 경과 해쉬 경이겠네요. 충분히 쉬지도 못했을 텐데, 벌써 시험이라니. 누가 그래요?”

“스폴 경에게 들었어요.”

역시나. 묻지 않아도 그런 사실을 말하고 다닐 사람은 스폴 뿐이다.

그나저나 시험이라니.

잠깐 망설이던 이드는 옆에 앉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한번 가 볼까요? 제대로 신경도 못 써 줬는데, 응원이라도 해 줘야죠.”

“그래요.”

“저도 좋아요. 은색 기사단의 입단 시험이 뭔지도 보고 싶어요.”

그리고 잠시 후, 서재를 나선 세 사람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저택을 돌아서자 건물에 막혀 들리지 않던 고함이 밀려왔다.

“이쪽이야! 이쪽으로 가져와!”

“무너진 곳만 정리해! 어차피 전부 복구해야 한다고!”

그곳엔 안에서 보이지 않던 기사들이 가득했다.

연무장은 전날 대련으로 절반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기사들은 그 주변에서 커다란 파편 등을 정리 중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쉴라가 다가왔다.

“나오셨군요.’

“입단 시험을 본다던데. 연무장을 사용하려는 건가요?”

“후보들의 실력을 봐야 하거든요.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전부를 복구할 건 아니고, 급한 대로 대충 큰 돌을 치우는 정도로 준비 중입니다.” 그 말에 이드는 다시 연무장을 살폈다.

기사들이 크고 작은 돌을 들고 나르는 연무장은 곳곳이 무너지고, 깨지고, 금이 간 것은 물론.

중간중간에는 열선에 녹아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불쑥 솟아오른 곳도 있었다.

“그 정도로 되겠어요?”

물론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이 상태의 연무장을 사용하느니, 차라리 그냥 땅바닥을 사용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쉴라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살짝 겸연쩍은 표정으로 슬쩍 눈길을 피했다.

“저도 그렇게 말씀드려 봤습니다만, 검후께선 오히려 실전 상황 같아서 좋은 것이 아니냐고…………….”

“확실히 연무장 상태만 보면 전쟁터 한가운데 같기는 한데.”

그래도 입단 시험에 이래도 되는 것일까?

물론 입단 시험으로 무엇을 내놓건 그거야 기사단 주인의 마음이긴 하지만. 바인과 해쉬는 자신과 관계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보통 입단 시험을 이런 상태에서 치르지는 않겠죠?”

“당연히 아닙니다. 시험이 이번처럼 갑자기 이뤄지는 것 자체가 드문 경우기는 하지만, 그래도 준비를 잘해서 진행하는 편입니다.”

검후가 은색 기사단을 아끼는 만큼, 입단 시험도 당연히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 현장은 뭔가.

“혹시 이번에 시험을 칠 기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던가요?”

“반대입니다. 오히려 마음에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험 환경이 왜 이렇게 열악해요? 달리 방법은 있었을 텐데.”

“저도 그게 잘…… 하하.”

쉴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에 나온 것도 두 사람을 응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시험 내용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각각 맨손과 무기를 이용한 개인 연무와 막내 기사와의 대련입니다.”

“어, 막내 기사라면?”

은색 기사단의 막내라면 뻔했다.

“네, 잘 아시는 케마란과 네리베르입니다.”

이드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이래서야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기도 좀 그런데.”

심정적으로야 시험을 치는 입장인 바인과 해쉬를 응원하고 싶지만, 그러면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많이 섭섭해할 것이다.

“뭐, 응원이야 일단 뒤로 하고, 시험 환경이나 좀 바꿀까요?”

“네?”

응원이야 둘째 문제다. 이드는 우선 불공평한 시험 환경부터 바꾸기로 했다.

“쉴라 경, 내가 연무장을 좀 고쳤으면 하는데 괜찮겠죠?”

“안 된다고 하면 손대지 않으실 건가요?”

뭘 당연한 걸 묻나. 이드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검후께서 말리시겠죠.”

아무래도 상대가 이드이기 때문일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책임을 온전히 검후에게 떠넘겨 버리는 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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