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09화
1244화
허락을 받은 이드가 연무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등장에 바삐 움직이던 기사들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인사하더니, 이내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 돌을 치웠다.
그런 기사들의 움직임 때문인지, 안쪽에 있던 검후가 이드를 발견하고는 손짓을 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답해 주고는 쉴라에게 말했다.
“기사들을 물려 주겠어요?”
“연무장 밖으로 이동시킬까요?
“위험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저기까지만 물러나 있도록 하면 될 것 같네요.”
이드는 지금은 철거된, 한때 연무장 벽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그에 쉴라는 곧장 기사들을 물러나게 했고, 연무장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제가 도울 건 없나요?”
“혼자 해도 되는 일이에요, 일리나.”
“어쩌려는 건데요?”
일리나에 이은 라미아의 물음에 연무장의 크기를 가늠하던 이드가 가볍게 답했다.
“뭘 어째. 새로 깔아야지. 상태가 저런데 고쳐 쓸 수는 없…………… 을 것 같은데. 혹시 마법으로 가능해? 아니, 가능하겠지.”
“가능하죠.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그리고 이드 말처럼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고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로 까는 게 훨씬 간단하죠. 바란다면 제가 해결하고요.”
“아니, 내가 할게. 라미아는 중간에 조금만 도와주면 돼. 오랜만에 힘 좀 써 보자고.”
“무슨 힘을 쓴다는 말이에요?”
갑자기 기사들을 물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어느새 다가온 검후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이럴 땐 보통 쉴라가 나서서 설명을 대신하지만, 이번엔 그녀도 한발 물러서서 침묵 중이다. 과연 그녀의 일 처리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이드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머릿속에 집어넣고는 검후의 질문에 답했다.
“연무장을 좀 고칠 생각입니다, 검후님.”
“그걸 굳이 명예 후작께서 직접 수고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집사와 기사들이 처리할 텐데요.”
“그렇겠죠. 그런데 듣자 하니, 오늘 여기서 기사단 입단 시험을 본다면서요. 그런 중요한 시험을 이런 엉망인 장소에서 볼 수 없잖습니까.”
“쉴라 단장에게 들으셨습니까?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어차피 실전은 이보다 더하니까요.”
“스폴 경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전은 실전이고 시험은 시험이죠. 이전엔 실전처럼 꾸미고 하지 않았다면서요. 왜 하필 오늘만 이런 상황에서 시험입니까?”
“그거야…….”
‘도대체 왜 오늘’이냐며 은근히 따지고 드는 이드에 검후는 눈을 껌뻑이며 말을 삼켰다.
사실 실전 상황이란 아이디어도 즉흥적으로 나온 것으로, 달리 속 깊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검후의 반응을 알아차린 이드가 힐난하듯 한 마디를 더했다.
“검후, 시험은 공정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야 불만이 나오지 않아요.’
“아니, 시험 환경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더욱이 기사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줄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그런 건 다음부터 하고, 오늘까진 하던 대로 하세요. 어제 검후를 본 두 사람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뻔히 알면서 그럽니까?”
“……전장에서 만난 적은 긴장했다고 봐주지 않습니다.”
검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드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야단맞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드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최소한 검후를 처음 대면하는 기사들에게 있어, 그녀는 강력한 적보다 두려운 존재인 게 사실이었으니까.
바인과 해쉬도 그랬다.
검후와의 첫 대면에서 그녀들은 굳어 버렸다 싶을 정도로 바짝 긴장한 상태였으며, 은색 기사단의 면면을 보고서는 감격해 어쩔 줄 모르는 눈빛이었다.
즉, 그녀들은 현재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이 걸려 넘어질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태인데.
그런 두 사람을 이 울퉁불퉁한 곳에 세우겠다고?
신종 괴롭힘인가?
그래서야 두 사람의 실수가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토록 존경하는 검후 앞에서 망신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불쌍할 지경이다.
“보통 전장의 적을 사랑하진 않지요. 하지만 두 기사가 검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잘 알잖아요.”
“크흠.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복구가 쉬울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랑한다는 말 때문일까.
금세 기분이 풀린 검후가 연무장을 보며 물었다. 그녀가 떠올린 방법은 파괴된 연무장의 표면을 깎아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깊이 파인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에 대한 이드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서 연무장을 새로 깔 겁니다.”
“뭘・・・・・・ 새로 깐다고요?”
“연무장이요. 어차피 돌바닥만 새로 깔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검후도 저기 뒤로 물러나 계세요. 열기가 제법 뜨거울 겁니다.” 새로 새를 쫓듯, 손을 팔랑거리는 이드에 검후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드는 검후가 라미아와 일리나 옆에 붙어 서는 것을 본 후에야 연무장을 보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연무장의 크기와 모습을 머리에 담았다. 직후 연무장 한옆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들썩.
무형의 무극신기가 대기를 밀어내고 돌무더기 주변의 공간을 채우자, 크고 작은 돌들이 하나둘 둥실 떠올랐다.
아기 주먹만 한 돌은 물론, 성인의 상체만 한 커다란 바위까지 마치 무게가 없는 솜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가히 놀라웠다.
이런 모습에 뒤로 물러서 있던 기사들이 하나같이 입을 벌려 ‘오!’ 하고 외쳤다.
그녀들 중 돌을 들어 올린 원리는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검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사들이었다.
즉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내공을 투사해 물건을 움직여 본 경험 정도는 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드가 보여 주는 것과는 규모에서부터 크기, 무게 등 모든 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작은 돌무더기지만, 그게 모이고 모여 그 무게는 이미 수 톤에 이르렀으니까.
내공이 아니라 온몸의 힘을 다해도 들 수 없는 무게. 그걸 손도 대지 않고 오직 내공만으로 들어 올리다니.
“이것도 장관이네. 마치 마법 같잖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시잖아.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렴. 정신의 관과 쉐어 가든에서 싸우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저건 아무것도 아니지.”
“원리 자체는 간단하다고.”
“간단은 개뿔. 서류 한 장 띄우는 것도 얼마나 진땀 나는데!”
“그게 바로 바보와 명예 후작님의 차이지.”
“요게~?”
“아하하하하…… 케켁!”
놀랍고 경이롭다. 동시에 같은 편이기에 든든하다.
그런 감정들을 여과 없이 끄집어내며 장난을 치던 때였다. 자신을 노려보는 동료의 눈길을 웃어넘기던 기사 하나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격한 기침에 꼴좋다고 비웃던 또 다른 동료는 이내 상대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그 시선을 따라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대로
숨을 멈춰야 했다.
뜨드드드드,
이유는 간단했다.
바닥에 누워 있던 거대한 연무장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비유가 아니었다. 가로세로 각각 이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연무장. 그것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저 돌무더기의 크고 작은 돌처럼.
거대한 연무장이 떠오르는 모습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높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머리 높이. 이 미터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거대한 돌덩이가 주는 무게감은 당장이라도 자신이 거기에 짜부라지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더 높이 떠오르면 사람들 눈에 보일 텐데요.”
일리나가 말했다.
어디 보이다 뿐인가. 그렇지 않아도 아직 주택가 주변에 남은 기사와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아마 기겁해서 달려오지 않을까.
더욱이 그 열선이 뿜어진 기억이 아직 생생한 시점이다.
“괜찮아요. 그러지 않을 거니까요.”
이드가 말했다.
그야말로 수십 톤. 아니, 수십 톤이 뭔가. 이제 백 톤은 가볍게 넘어갈 무게였다. 한데 그걸 오직 내공만으로 허공에 띄운 상태에서, 태연히 입을 열다니. 더욱이 힘든 기색은 물론이고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그 모습에 검후가 혀를 내둘렀다.
“우리 아이들이 저게 내공만 많다고 되는 일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할 텐데.’
과연 그걸 알아서 달라질 게 있을까?
내공의 양이든, 내공의 질이나 운용법이든, 어느 쪽이건 까마득한 경지라는 것은 바뀌지 않을 텐데.
“그런데, 연무장을 통째로 들어내서 어쩔 생각인 거지요?”
그건 검후만의 궁금증은 아니었다.
이드는 이에 대한 답을 곧바로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콰득. 콰드드드득.
꾸욱 움켜쥐는 두 주먹을 따라, 넓은 판 형태의 연무장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졌다. 하나로 뭉쳐진 돌조각들은 어지간한 주택만 했다. 연무장을 만들 때 워낙 신경을 써서 만들어 재료를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데 뭉친 돌조각을 여전히 허공에 띄운 이드는 천천히 단전을 달궈 화륭기를 끌어 올렸다.
화행대천공의 화공.
이내 무극신기가 삼매진화에 근간한 순수한 화기를 머금고서 돌조각 사이사이로 내달렸다.
쿠구구구구.
태양을 옮겨 온 듯, 화륭기의 열기는 엄청났다. 이드는 난폭한 열기가 밖으로 뿜어지지 않도록 화륭기의 목표를 정하고 안으로, 안으로 수렴시켰다. 그에 따라 뜨겁게 달아오른 돌들이 시뻘겋게 변하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녹기 시작하나 모든 돌이 붉은색을 발산하는 용암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기사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연무장을 뽑아 올린 것만 해도 기겁할 일인데, 그걸 손대지 않고 부순 후에 모조리 녹여 버리다니.
“진짜…… 마법이었네.”
어느 기사의 입에서 몽롱하니 꿈꾸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연 그녀는 알까. 어차피 모든 진리는 통하기 마련. 만류귀종이라는 말은 무공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지고의 경지에 오른 마법이나 무공 역시 그 경계가 흐려지게 마련.
결국에는 뜻에 따라 변형되는 하나의 의지만 남게 될 뿐.
그렇게 누군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고한 무언의 한 구절이 흘러나오거나 말거나, 이드는 다음 작업을 이어 갔다.
“일단 틀을 잡고.”
꾸구구구구
이드의 의지에 따라 거대한 용암 덩이의 모양이 이리저리 변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이리저리 겹쳐지던 용암 덩이는 끝에 가서는 육각형의 커다란 주사위 모양으로 틀이 잡혔다.
“라미아, 이제 식혀 줘.”
“윈드, 프리징.”
이드의 요청에 차가운 얼음 바람이 용암 덩이를 감싸며, 용암은 순식간에 그 모양 그대로 굳어졌다.
곧이어 일라이져가 저절로 뽑혀 나와 굳어진 돌덩이에 칼자국을 냈다. 일라이져가 지나는 자리를 따라 버터처럼 갈라진 돌조각은 순식간에 수백의 조각으로 나뉘어졌고.
쿠쿠쿠쿠쿵!
그것들은 이드의 손짓에 따라 하나하나 연무장 바닥ㅇ레 떨어져 내렸다.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