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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10화


1245화

가로세로 이십 미터의 연무장이다.

높이만 두 뼘 두께에 가로세로는 각각 일 미터가 되는 석판이 무려 사백 장이나 필요한 그 대공사를 즉석에서 해치워 버리고서 한다는 말이 고작. 

“완성.”

저거라니.

검후는 뭐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냈다.

“누가 보면 겨우 수프라도 완성한 줄 알겠어요. 뭐가 그렇게 간단해요?”

“뭐, 실제로 제게는 수프를 만드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니까요.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지요.”

“…..잘나셨습니다. 대단해요.”

“칭찬 감사드립니다. 후후.”

이드는 어이없는 표정의 검후에게 능청스럽게 웃어 보이고는 자신이 만들어 낸 연무장을 살폈다.

무극신기로 반죽한 돌은 단단했고, 검강으로 잘라 낸 표면은 매끈했다. 또 딱딱 맞물린 석판은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갈 틈도 없이 이가 잘 맞았다.

“이 정도면 연무장으로 쓰는 데는 문제없겠지요?”

“연무장이 아니라, 대전용 바닥으로 쓰기도 아까워요. 내공으로 녹이고, 검강으로 자른 석판이라니.”

바닥에 깔린 석판에는 아직도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과연 검후의 말처럼 황궁에서도 쓰기 어려운 재료였다. 어느 할 일 없는 그랜드 소드가 돌이나 자르고 있겠는가 말이다.

“그럼 입단 시험은 여기서 진행하는 겁니다?”

“당연하죠. 멀쩡한 연무장을 두고 일부러 이상한 곳을 찾을 이유가 없잖아요.”

말이 좋아 실전이지, 결국 적당한 공간이 없었을 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마는 검후였다.

어떻게 보면 고집에서 밀렸다고 할 수 있건만, 그런데도 그녀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무장이 이래서 당분간 기사단 수련을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해결이 되네요.”

저 말을 들은 이드는 왠지 기사단에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열심히 수련하면 실력이 늘 테니.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기사들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새로 만들어진 연무장이 자신들의 피땀을 빨아들일 마물이 되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들은 어느새 신기한 표정으로 연무장의 석판을 만져 보고, 비벼 보고, 심지어 맛보기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작 과정을 직접 본 그녀들에게 눈앞의 석판은 더 이상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었다.

위대한 무공의 정수가 녹여 낸 무학의 증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연무장에 도착한 바인과 해쉬로서는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지?”

“봐 봐. 연무장이 새로 정리됐어. 설마 우리 입단 시험을 위해서 일부러?”

“그건 그렇다 치고, 연무장의 돌은 왜 핥는 건데?”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그렇게 찰나간 동글동글 눈만 굴려 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두 사람도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카논에서부터 오늘까지. 보살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기사들의 정체 모를 행동의 원인을 알게 된 바인과 해쉬는 이드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지간히 감격한 듯 그녀들의 눈에는 감사와 감동이 넘쳐 흘렀다.

왜 그렇지 않을까.

버림받은 그녀들을 보듬어 주고, 검후 앞으로 이끌었으며, 은색 기사단 입단 기회까지 주었는데.

정작 이드가 미안해하는, 카논에 버려 두었다는 사실도 그녀들을 서운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 보답은 오늘 입단 시험을 잘 보는 것으로 받겠습니다. 합격할 자신 있죠?”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드는 바인과 해쉬의 힘찬 대답에 만족했다.

거창한 말은 아니었지만, 쓸데없는 긴장을 풀고 의욕에 불을 붙이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적당히 뜨거워진 듯하니 이제 시작해야 할 때다.

“시험을 시작하시죠?”

“・・・정말,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단장?”

다른 사람에 들리지 않게 투덜거린 검후가 쉴라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쉴라는 바인과 해쉬를 불러 시험의 내용과 순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볼 것은 두 사람의 실력입니다. 바인 경의 연무부터 보겠습니다. 연무장으로 올라가세요. “

“네.”

“목소리는 크게!”

“넷!”

바인을 연무장 위로 올려 보낸 쉴라는 그대로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단단한 모습으로 도열한 기사들이 서 있었다. 입단 시험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쉴라는 그런 그녀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은색 기사단 입단 시험을 시작한다. 저 앞에 있는 바인 경은 결과에 따라 귀관들의 새로운 동료가 될 것이다. 귀관들과 목숨을 함께할 동료이며, 아껴 줘야 할 막내 기사 말이다. 그러니 바인 경에게 그런 자격이 충분한지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라. 우리는 지금부터 그녀의 인상을 본다. 그 검에 배어 있을 피와 땀에 경의를!”

“바인 경의 인생과 피와 땀에 경의를!”

한껏 진지한 얼굴로 한데 목소리를 높이는 은색 기사단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무엇보다 그 명성 높은 기사단의 단원 전부가 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렇다. 은색 기사단의 입단 기회를 얻은 것. 그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며, 인정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만큼 얻기 힘든 기회인 것이다.

연무장에 올라 있던 바인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와 함께 다시 한번 이드에 대한 감사를 가슴에 새겼다.

만약 이드가 알았다면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녀들이 입단 시험을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들이 지금껏 성실히 쌓아 온 무공 실력과 기사로서의 인성 때문이다. 그녀들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면 검후는 아무리 이드가 추천했어도 결코 시험을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런 예우를 받은 이상, 적당히 할 수는 없어. 죽을 힘을 다해!’

‘물론이야!’

바인과 해쉬가 짧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검을 쥔 손과 배에 힘을 꽉 줬다. 처음부터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연무와 대련으로 이어지는 오늘 시험에서, 대련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연무에 너무 신경을 쓰면 이어질 대련에 여러 가지로 불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데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연무도, 대련도, 한 조각 미련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바인 경은 연무를 시작하시오.”

“넷! 제 무공은 카논 기본 검법 베르롤과 수칵 가문 기본 검법 블레인입니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은 두 가지였다.

둘 다 세간에 공개된 기본 무공으로, 제한 없이 익힐 수 있었다. 본래 그녀가 가장 노력하여 갈고 닦은 수칵 기사단의 정규 검술은 사용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수칵 기사단의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본 무공이기 때문에 한계는 분명하며, 깊이가 없어 간소하다 못해 간단하다.

하지만 바인은 그런 베르롤과 블레인에 열과 성을 다했다. 검초의 사이에 있는 내려치기, 회전하기 위한 발 구름 하나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그렇게 온 정신을 쏟았기 때문일까.

그저 기초 무공을 펼치는 것임에도 바인은 흠뻑 땀을 흘려 댔다.

그리고 이런 바인의 노력을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은 알아주었다. 그녀의 인생을 본다는 말, 검에 깃든 피와 땀을 보겠다는 말은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간 그녀들을 가르친 검후의 가르침이 단순한 베기와 찌르기 속에서도 깊이를 살필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었다. 그 때문이었다.

바인이 숨을 헐떡이며 연무를 마쳤을 때,

짝짝짝짝!

기사들이 온 힘을 다해 손뼉을 친 것은.

“다음은 해쉬 경이 연무장에 오르시오!”

“넷!”

그리고 이런 모습은 지켜보고 있던 해쉬에게도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혹시 기본 무공만을 사용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가졌던 해쉬에게 연무 내내 진지하던 은색 기사단원들의 모습과 진심을 담을 박수는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연무장 위에 오른 해쉬는 한결 당당해진 목소리로 외칠 수 있었다.

“제 무공은 베르롤과 블레인입니다. 지금부터 연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한 땀이 흘렀던 연무가 끝이 나고 이어진 시험은 대련이었다.

바인과 해쉬의 상대는 네리베르와 케마란이었다.

쉴라와 스폴이 이 둘을 각각 따로 불러 대련의 규칙과 유의해야 할 점에 대해 말했다. 특히 스폴의 경우는 마치 호랑이 같은 얼굴로 경고를 더했다. 

“은색 기사단의 기사로서 멍청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아! 패배해도 괜찮아! 하지만 패배할 때도 기품과 절도를 잊지 마라!” 

“충!”

도대체 절도 있는 패배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스폴에게 묻는 것은 의미 없음을 알았다. 그저 열심히 할 뿐.

“그럼 처음은 케마란 경과 바인 경의 대련부터 시작하겠다. 두 사람은 연무장 위로!”

“충!”

…..!”

케마란의 구호를 들은 바인은 무슨 생각인지 그 구호를 따라 외치며 연무장에 올랐다. 직후 검을 뽑아 든 두 사람 중 케마란이 외쳤다.

“상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인 경. 제가 대련에 사용할 무공은 은색 기사단 기본 검법 샤인입니다.”

“명성 높은 은색 기사단의 기사를 상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사용할 무공은 블레인입니다.”

케마란이 기본 검법만을 사용하겠다는 이유를 어떻게 모를까.

바인은 살짝 감격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검을 들었다. 쉴라는 두 사람이 준비가 끝이 난 것을 보고는 외쳤다.

“대련을 시작하시오!”

쩌엉!

두 자루의 검이 그야말로 순수하게 부딪혔다. 기본 무공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사용자의 노력과 마음, 정신을 담기 가장 좋은 그릇.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존경을 담은 두 사람의 검은 치열했다. 존경하기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의 몸에 상처가 생겨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대련이라면 정도를 알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피. 그러나 정작 대련 중인 두 사람은 그런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검을 휘두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바보가 또 머리에 열이 올랐어!”

그리고 이런 모습에 네리베르는 평소처럼 이마를 감싸 쥐었다.

스폴이 그렇게 강조하던 기품과 절도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대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네리베르의 반응과 달리, 쉴라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철과 같은 자세와 목소리로 시험을 주관하던 그녀의 눈매가 어느새 살짝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그런 쉴라의 변화를 본 이드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마음에 든 것 같습니다. 시험에 통과할 것 같습니까?”

“네. 아…….”

무심코 대답해 버리고 아차 하는 쉴라와 기분 좋게 웃는 이드의 모습이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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