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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11화


1246화

대련의 수준은 쉴라가 무심코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케마란과 바인, 기본 검법을 사용한 두 사람의 검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진솔하고 자유로웠다.

검사로서의 장단점은 물론 인간으로서 가진 성향과 가치관 등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대련이니, 사람을 살펴야 할 쉴라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순간이었으리라.

“이런 대련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쉴라가 짧게 감상을 말했다.

충분히 이해되는 그 말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 검법을 사용한다고 무조건 지금 같은 장면을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현재에 충실하고, 모든 정신과 온 힘을 다해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게 바로 눈앞의 대련이다.

그 말은 곧, 케마란과 바인이 그만큼 대련에 진심이라는 소리였다.

“슬슬 멈춰야겠어요.”

“네.”

승부의 추는 기울었다.

케마란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바인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한 수는 없지만, 그간 쌓아 온 기본기가 분명한 차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기본 검법이라도 수준의 차이가 났다.

오색 기사단의 주요 검법에는 크든 작든 모두 검후의 손길이 닿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기본 검법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뛰어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은색 기사단에 입단한 후 선배 기사들을 비롯해 스폴과 쉴라, 그리고 검후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가장 큰 차이였다.

바인에겐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련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바인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저대로라면 일어서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계속하리라.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입단 시험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결국 거부하지 못할 위엄을 담은 쉴라의 일갈이 연무장에 붙어 선 케마란과 바인의 사이를 갈랐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대련이 멈췄다.

승부의 추는 분명히 기울었지만, 승패는 없었다.

“다음. 네리베르 경과 해쉬 경은 연무장 위로!”

“충!”

“충!”

쉴라의 명령에 두 기사가 연무장에 올랐다.

두 기사는 각자의 이름과 사용할 검법을 밝혔다. 앞서 두 사람과 같이 기본 검법을 이용한 대련이었다.

곧이어 쉴라의 시작 신호가 떨어지고, 대련이 시작되었다.

채쟁!

검이 가볍다.

서로 상대가 사용할 검법을 충분히 살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일까. 둘 다 앞서와 같은 검법을 사용하면서도 그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앞의 대련 주제가 힘이었다면, 네리베르와 해쉬가 택한 주제는 속도와 기교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바인과 마찬가지로 해쉬도 이 대련이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련도 보기 좋네요.”

“좋은 인재를 소개해 주신 덕분입니다.”

이드의 말에 쉴라가 포기한 듯 순순히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은 연무장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이드 역시 마찬가지.

“남은 시험이 더 있습니까?”

“네. 하루 더 체력과 실력을 살피고, 기사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기본 상식을 확인한 다음 끝이 납니다. 삼 일 동안 이어지는 거지요.”

“삼 일이라…… 그건 그사이 사람 됨됨이나 인성을 보기 위해서인가요?”

크게 복잡하지 않은 시험에 삼 일은 너무 길었다.

“기본적으로 기사단에 어울릴 수 있는지는 확인해야 하니까요. 또, 뒷조사에 필요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무렴 과거가 더러운 인간을 은색 기사단에 들일 수는 없는 일.

인간성을 다 살피기에 삼 일은 턱도 없이 모자라지만, 최소한 뒷조사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라는 거다.

그리고 정말 특별한 인간이 아니고서는 이 단계에서 모두 걸러진다.

“그럼 저 두 사람의 뒷조사도 하는 겁니까?”

원래 카논 제국의 기사였으니, 따지고 보면 의심스러운 점이 여럿이다. 그러나 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드 님께서 저 두 사람을 들인 순간, 바벨에서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를 끝냈더군요. 두 사람과 함께 내용도 넘겨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라울이 생각보다 준비를 잘해 온 것 같다.

“그래서, 입단 시험에 합격할 것 같아요?”

“아직 남은 시험이 있기에 무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 시험을 기준으로 보면 어때요?”

굳이 답을 듣겠다는 이드에 쉴라가 작은 한숨과 함께 자신만의 점수표를 공개했다.

“・・・・・・ 기초는 상하. 실력은 중상. 승부욕 상하. 잠재력 상하. 현재 기준으로 보면 무난히 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 기다리던 결과네요.”

“시험 중인 두 사람에겐 비밀입니다. 그리고 남은 시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 괜히 두 사람에게 말해 줘 봐야 마음만 뒤숭숭해질 텐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대신 두 사람에게 줄 합격 선물이나 미리 준비해야겠네요.”

“선물을 말입니까?”

“저 때문에 카논에서 얻은 모든 걸 내려놔야 했으니까요.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이런 이드의 말 때문일까. 잠깐이지만 쉴라가 연무장에서 눈을 뗐다.

“그거 아십니까?”

“뭔데요?”

“이드 님은 전해 듣던 것보다 몇 배나 마음 따뜻한 분이라는 것 말입니다.’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쉴라의 칭찬에 이드는 괜한 헛기침 후 말했다.

·쉴라 경 선물도 같이 준비하면 될까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시원시원한 대답을 남긴 쉴라가 다시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반달이 된 그녀.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 아니겠지?


이드는 대련에 집중한 사람들을 두고 라미아와 일리나를 불러 연무장을 나섰다.

“끝까지 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정도면 충분해요. 쉴라 경이 합격할 거라고 했거든요. 당연히 두 사람에겐 비밀이에요. 아직 시험이 남았다고 하니까.”

쉴라가 비밀을 부탁하긴 했지만, 라미아와 일리나는 제외다. 분명 ‘시험 중인 두 사람에게’라고 했으니까.

라미아가 물었다.

“그럼 어딜 가자고 부른 건데요?”

“시험이 끝나면 두 사람에게 줄 선물을 좀 미리 사 두려고.”

“선물이요? 굳이?”

“어. 아무래도 두 사람 다 맨몸으로 국경을 건넜잖아. 수중에 챙겨 온 돈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좀 챙겨 줄까 하고.”

“하긴, 카논에 있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고아 출신으로 갈 곳 없는 두 사람은 개인 물품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크고 작은 가구 같은 것이야 어차피 들고나올 수도 없었다지만, 하물며 그 외의 옷가지 따위도 많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 두 사람이 소속되어 있던 기사단에 충실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물론 그런 평소의 노력 덕분에 쉴라에게서 좋은 대답이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드가 보기에 빈손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번 은색 기사단에 편히 안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선물을 안겨 주고 싶었다.

“저도 괜찮은 생각 같아요.”

“두 사람이 찬성이면 저도 따라야죠. 그래서, 어떤 선물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라미아가 저택의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에 물었다.

“일단 기사 생활에 필요한 기본 물품들. 그리고 갑옷과 검 정도를 생각 중이야.”

“기본 물품은 이해가 되는데, 갑옷과 검은 기사단에서 지급하잖아요.”

지급할 뿐인가. 은색 기사라면 당연히 은색 기사단을 상징하는 갑옷과 검을 사용해야 한다.

“그거야 알지. 그런데, 전에 자작가에서 두 사람을 대리 기사로 내보낼 때 내가 빌려줬던 갑옷과 검을 사용하면서 굉장히 좋아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말이야.”

그걸 싫어할 기사는 없죠.”

“그렇지. 하지만 그걸 줄 수는 없잖아.”

“주면 큰일 나죠. 여러 가지로.”

정말 줄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걸 그들에게 주었다가는 두 기사가 불행해질 것이다. 절대로.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살해당한 채 발견될지도 모른다.

은색 기사단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 쉽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결국 보물에 눈이 먼 인간은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이런 위험보다 더한 걱정은, 그런 선물이 자칫 은색 기사단 내부에서 두 사람을 차별받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체를 감춰야 할 때나, 특별한 상황에 사용할 적당한 갑옷과 검을 준비해 주려고.”

“그건 괜찮을 것 같네요. 가장 좋은 건 집이겠지만. 그거야말로 선물로선 과하죠.’

보금자리가 없는 두 사람의 둥지가 될 가장 좋은 장소는 집이다. 하지만 라미아의 말처럼 선물로서는 과하다.

두 사람의 집은 그녀들의 마음이 은색 기사단에 확신이 들었을 때. 스스로 장만하도록 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럼 대장간 거리로 갈까요?”

사야 하는 물건이 정해지자 자연스럽게 목적지가 나왔다. 이드는 잠깐 생각한 후 고개를 저었다.

“일단 명품 거리부터 가 보자. 아무래도 그쪽에 좋은 물건이 많을 테니까.”

“하긴, 가격이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니까. 그래요.’

“마차를 부를까요?”

이드는 일리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그녀와 라미아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같이 걸어요. 햇살도 좋은데.”

“찬성이에요.”

반대는 없었다. 한쪽씩 팔을 잡은 세 사람이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그야말로 그린 것 같은 선남선녀의 출현에 거리를 걷던 사람들 몇이 돌아보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설프게 세 사람을 방해하는 바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드와 일리나의 허리에서 흔들리는 검이 너무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수도는 항상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건 비싸고, 귀한 물건을 주로 판매하는 고급 점포가 많이 들어선 명품 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히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발을 들이기 부담스러운 점포들이 주르륵 서 있지만, 그곳을 찾아 드나드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그만큼 수도에 부자들이 많다는 소리일지, 아니면 분수를 모르는 바보가 많다는 것일지는 알 수 없는 일.

이드와 일리나, 그리고 라미아는 그런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비싸 보이는 마차들이 사람만큼이나 많았지만, 누구도 세 사람을 보고 비켜서라 소리치지 못했다.

아니, 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마부들이 그랬다. 명품 거리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소리칠 수 없고, 행패를 부릴 수 없었다. 평범하게 걷고 있는 사람이 어느 명문의 귀족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드는 편히 가게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일까.

방문한 가게에서 드디어 마음에 드는 갑옷 두 벌을 발견했을 때였다.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구매를 결정한 이드를 대신해 불쑥 내밀어지는 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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