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12화
1247화
“드셔 보십시오. 이 집 차와 케익 맛이 수준급이라, 만족하실 겁니다.”
주문한 차와 케익이 나오자 라울이 권했다.
마치 이 가게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했지만, 사실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한다.
올라오는 향이 제법 좋기는 하다.
“호로록. 음. 확실히 좋네요.”
차를 한 모금 넘긴 이드가 일리나와 라미아 앞으로 케익을 밀어 주고는 라울을 보았다.
“카페를 소개해 주려고 온 건 아닐 테고요.”
“하하하. 그게 이유기도 합니다. 좋은 건 공유해야지요.’
공유라.
과연 그 말을 검후가 들으면 뭐라고 할까. 강제로 무공을 공유받고자 납치, 감금되었던 검후가 아니던가. 어쩌면 라울이 지금 마치고 있는 차를 입이 아닌, 머리로 마시게 될지도.
“그럼 갑옷값을 계산한 건 무슨 이윱니까?”
앞서 가게에서 계산을 외친 손의 주인.
그건 바로 눈앞에 앉은 라울이었다. 바람처럼 나타난 그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계산을 해 버린 것이다.
덕분에 고가의 갑옷 두 벌을 공짜로 얻기는 했지만.
아직 라울이 갑자기 계산한 이유를 듣지 못한 이드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순수한 의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의도가 있다고 해도 고작 갑옷 가격으로 부담을 느낄 이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갑옷 그거 얼마 한다고, 그걸 공짜로 받았다고 부담이나 고마움을 느낄까.
물론 공짜가 반갑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할인과 공짜는 언제나 옳으니까!
“카논에서의 일을 도와주신 것에 대한 소소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그 갑옷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 갑옷값은 지금 같이 마주 앉은 것으로 치른 것이나 마찬가지.
이드는 말을 돌리는 라울을 굳이 더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 순순히 답해 주었다.
“바인 경과 해쉬 경의 기사단 입단 선물입니다.”
“음? 두 사람의 입단이 벌써 결정된 겁니까?”
“1차 시험에 합격한 거지만, 나머지 시험도 무난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미리 준비한 겁니다.”
“명예 후작님께서 그렇게 보셨다면 합격이나 다름없겠지요. 그런데 두 사람을 상당히 신경 쓰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 두 사람이 누구 때문에 카논을 떠나 여기 오게 되었는데요.”
“하하. 저보고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들으라고 한 말 맞다.
바인과 해쉬가 카논을 떠난 이유에는 이드뿐 아니라, 바벨도 관련이 있으니 말이다.
무언가 일을 하다 보면 주변에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다. 인과라는 것이 본래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질 수는 없다. 그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 이드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피해자를 모른 체할 생각은 없었고, 그것이 두 사람을 챙기는 이유다.
“아닌 것 같습니까?”
“・・・・・・ 갑옷은 바벨의 선물로 해 주십시오.”
“그럼 티타임은 이걸로 끝낼까요?”
“계산서・・・・・・ 보내 주십시오.”
낯빛이 흐려진 라울의 말에 이드는 자신의 아내들과 주먹을 부딪쳤다.
이 순간 다음 구매 순서인 검의 등급이 두 단계 상향되었다. 그야말로 명문가 후계나 들 수 있을 명품급. 며칠 후 일이지만 이날 구입한 검의 영수증을 받아든 라울이 하루 종일 우울해했다는 후문이 돌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용건은 뭡니까? 진짜 카페나 소개해 주려고 나타난 건 아닐 테죠.”
“물론입니다.”
라울은 곧바로 봉투 하나를 꺼내 이드 앞으로 밀었다.
스윽.
봉투의 색은 붉었다. 불길하고 음침한 색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붉은색의 봉투. 그 안에는 황금으로 만든 것 같은 손바닥만 한 카드가 들어 있었다. 언뜻 용병패가 떠오르는 모양이지만, 그보다 백배는 고급스럽다.
앞면에는 섬세한 솜씨로 교차하는 세 개의 원이 양각되었고, 뒷면에는 바이젠이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 개의 원과 이름. 그 말고는 그냥 반짝이는 금일 뿐, 어떤 특별한 장치나 마법도 깃들어 있지 않았으며, 초인력도 느낄 수 없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카드.
이드는 그걸 라미아와 일리나에게 살펴보라고 넘겨주고는 라울에게 추가 설명을 요청했다.
“이건 뭐죠? 전혀 이유를 모르겠는데.”
“초대장입니다.”
“……바벨의 건립 파티라도 열리는 겁니까?”
난데없는 초대장에 대한 감상에 라울이 마른 웃음을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바벨에서 건립일을 챙기기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진행하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바벨의 건립일은 9월 21일입니다. 아직 한참 남았죠. 그건 마스터로부터의 초대장입니다.”
라울이 마스터라고 부를 사람이라면 하나뿐일 것이다.
“바벨의 주인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제 일이 있고. 아, 스케스틱 님과의 대련이 아니라 그분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무튼 그 일을 보고 드렸더니. 마스터가 보내오셨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명예 후작님과 스케스틱 님을 꼭 뵙고 싶으시다고.”
“그런 초대장이로군요.”
이드는 라미아의 손에 들린 황금의 카드를 힐끔 바라보았다.
내심 납득은 갔다. 그리고 새삼 느낀다. 저 엉덩이 무거운 바벨의 마스터도 움직일 정도로 드래곤의 존재가 대단하다는 것 말이다. 하긴 라울을 통해 스케스틱의 힘을 확인한 이상 바벨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특별한 하나의 존재도 아니고.
그만한 힘을 가진 수십의 드래곤이 돌아온다.
그건 대륙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거대 조직인 바벨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이런 초대장이 아니라 언제든 저택으로 직접 찾아오면 될 일인데요.”
“하하. 그러면 좋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마스터는 명예 후작님과 스케스틱 님 두 분만을 따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검후가 방해인가요?”
“방…방해는 아니고. 워낙 대단한 분이라 부담스러운 것이지요. 황제도 고개를 숙이는 분이지 않습니까. 바벨의 마스터도 무서워하실 분이죠.”
“그러는 자작은 검후를 잘만 상대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미 찍혔으니까요. 미운 정도 정이 아니겠습니까.”
미운 정이라. 이드는 과연 검후가 이 말을 들었으면 어떨까 싶었다. 라울의 이름만 나오면 일단 이빨부터 갈아 대는 그녀가 아니던가.
그 정도면 미운 정이 아니라 원한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두 당사자 중 하나가 미운 정이라니. 일단 그런 것으로 정리하고.
“바벨의 생각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일을 검후에게 숨길 생각은 없어요.
“괜찮습니다. 그분께 굳이 비밀로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럼 저택으로 찾아와도 됐을 텐데요.”
“아무래도 미움받고 있는 몸이다 보니, 그러기가 힘들어서 말입니다. 갈 때마다 검후께서 어찌나 절 괴롭히려고 하시는지. 어제 대련 때문에 몸도 좋지 않은 상태라서 이번엔 어떻게든 피하고 싶더군요.”
이드는 그의 엄살에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어제 대련에서 다치지도 않은 사람이 몸이 좋지 않을 건 뭔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되도 않는 핑계를 댈 정도로 검후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했다. 저러면서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신나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말이다.
가만 보면 나름 검후와 라울의 사이도 그렇게 최악은 아닐 것 같다는 것일까.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는 보기 힘든 관계였다.
물론 스톡홀름 신드롬 같은 건 절대 아니다. 검후의 정신은 그런 걸 겪기에는 너무나 단단하니까.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뭐, 그건 그렇다치고, 이 초대장 날짜는 어떻게 되는 거죠?”
“날짜는 따로 없습니다. 언제든 원하는 때에 말씀해 주시면 적당한 시간을 만들면 되니까요. 사실 초대장이라기보다는 인장 같은 겁니다. 귀족들이 사용하는.”
귀족들은 자신의 증표로 사용하는 것 중에 가문의 표식이 그려진 물건을 내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을 통해 권위를 빌려주기도 하고, 인장을 가진 자에게 몇 가지 권한을 내어주기도 한다. 그중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것이 바로 방문 허가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절대 명예 후작님을 가볍게 보거나, 아랫사람으로 생각해서 인장을 내어 드린 것은 아닙니다. 마스터의 그 인장은 바벨에도 딱 세 장 밖에는 만들지 않은 겁니다.”
즉,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벨이라는 거대 조직의 수장을 필요할 때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인장. 권력에 욕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간절히 얻기를 바라는 물건임에는 분명했다.
“세 장이라. 귀하긴 하네요. 궁금해서 그러는데. 한 장은 제가 받았고, 두 장은 바벨에게 있나요?”
“한 장이 있습니다.”
“그럼 저 말고 누가?”
“곤란한 질문을 하시네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지만, 거절의 뜻은 분명하다.
이드는 세 장뿐인 이 황금 초대장을 가진 한 사람이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세 장 중 하나다.
대충 각국의 지배자나 공후백 이상의 고위 귀족이거나, 아니면 정말 개인적인 관계의 인간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꼭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아직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바벨의 마스터가 아닌가.
그때 한참 동안 인장을 바라보고 있던 일리나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적힌 바이젠이라는 분이 혹시?”
“지금 짐작하고 계신 대로 마스터의 이름입니다. 사정이 있어 따로 성은 새겨 넣지 않았습니다만. 아마 직접 만나시게 되면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성이 중요한 건 아니죠. 그럼 여기 앞에 새겨진 세 개의 원도 의미가 있는 건가요?”
“마스터의 상징…… 같은 겁니다. 초기 바벨에서 사용하던 표식이기도 했지요.”
가만히 생각하고 들으면 의미심장한 말이다.
바이젠이라는 바벨의 마스터의 인장을 바벨이 사용했다고 해도 그렇고, 초기 바벨의 인장을 온전히 바이젠이 물려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가진 의미는 매우 크다.
그만큼 바벨에 있어 바이젠이 가지는 의미가 대단하다는 뜻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건 받아 두기로 하죠. 혼돈의 파편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만나야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쪽 마스터에게 전해 줘요.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쪽에서 만나러 와도 좋다고. 아, 그리고 나는 따로 초대장은 없어요.”
“하하하. 그렇게도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