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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18화


1253화

따뜻한 햇볕이 투명한 창을 넘어 들어온다.

창틀에 앉아 따끈따끈한 햇빛을 즐기며 밖을 바라보던 존 워스의 눈에 푸른빛이 스쳐 간다.

“침식이 순조롭게 진행 중인 것 같군.”

나지막한 읊조림. 하지만 혼잣말은 아니었다.

“응? 침식?”

존 워스의 반대편. 햇빛이 닿지 못하는 방의 안쪽, 소파에 앉은 남자가 존 워스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침식이면,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말인가?”

하얀 로브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이는 이전 엘라임 백작의 살해 사건 당시 프란시스 백작가 하늘에 떠 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아, 그 이야기가 맞네.”

“흐응. 자네가 꾸민 일은 잘 돌아가는 모양이군.”

“내 계획이 아니라 우리 계획이라고 해야겠지.’

하얀 로브와 존 워스. 두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바이트 타블렛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심지어 그 상태에 대한 중요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침식이라니.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바이트 타블렛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탑주가 들었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새파래진 얼굴로 펄쩍 뛰었을 소리다. 그러나 미완의 마탑에 있어 더없이 중요한 바이트 타블렛이 이 자리에서는 더없이 가볍게 다뤄지는 중이다.

“흥, 나는 그 물건에 손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사전에 들은 기억이 없는데?”

“잘 찾아보면 있을 거네. 그리고, 내일은 곧 자네 일이기도 하단 말이야. 모른 척해서는 곤란해.”

존 워스가 창틀에서 일어났다.

“내가 언제 모른 척했다고 그런 말을 하지?”

“지금 그러고 있잖아. 여태 밖에서 드래곤들과 늘어지게 게으름 피웠으니, 이젠 바쁘게 일할 때야. 안 그래?”

・………우선 방금 언급한 그 부분부터 좀 따져 볼까?”

하얀 로브는 ‘게으름을 피웠다’는 말이 심히 불쾌한 듯 입꼬리를 싸늘하게 말아 올렸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의 드래곤을 쉬는 시간 없이 견제해 왔다. 그것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고 놀다 왔다’고 하면 아무리 그라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외계에 남아 있는 혼돈의 파편들이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존 워스의 목을 조르기 위해 달려오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존 워스는 이런 하얀 로브의 반응을 태연히 받아넘겼다.

“그런 건 천천히 하고. 어떤가. 이 세상은 좀 익숙해졌나?”

“대놓고 말을 돌리다니. 그 얼굴로 오래 살아서 그런가. 뻔뻔해졌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쯧, 익숙해졌냐고? 그래. 익숙해졌네. 따로 적응할 필요도 없었어. 초인이란 놈들이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바뀔 세상은 아니잖아. 이미 멈춰 버린 지 수백, 수천 년이 된 곳이야.”

“완전히는 아냐. 차원의 인의 주인으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했지.”

“알잖아. 그 정도 기름칠로는 아직 어림도 없어.”

하얀 로브는 하얗게 웃으며 멍청한 세상을 조롱했다.

하얀 로브, 아니. 혼돈의 파편 중 하나인 무우. 그들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렇게 진화와 발전을 잊어버리고서 멈춰 버린 세상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게르만 때문에 좀 일찍 깨어나긴 했지만, 그들이 가진 본래 목적을 생각하면 어차피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깨어나 그레센에 멸망을 가져왔으리라. 물론 이드의 존재가 없었다는 조건이 붙었겠지만 말이다.

반대로 말해서, 어쩌면 게르만이 혼돈의 파편을 깨우지만 않았다면 이드가 가져온 무공 덕에 혼돈의 파편이 깨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혼돈의 파편이 재촉하기 전에 세상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어차피 쓸모없는 이야기다.

자신들, 혼돈의 파편은 이미 깨어났으니까.

“아무튼, 어려움 없이 잘 다니고 있어. 자네의 부탁대로 처분해야 할 인간들도 착착 정리 중이고.’

“그 부분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내가 누구 부탁으로 겨우 암살자 흉내나 내고 다녔겠나.”

무우가 더, 더 고마워하라며 히쭉 웃었다. 아이처럼 우쭐한 그 모습과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지금 말하는 사건이 현재 카논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카논 제국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암살 사건으로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심지어 암살의 범인은커녕 목적도 밝혀내지 못했다.

벌써 당한 사람만 서른이 넘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다.

하지만 이렇게 죽어 나간 인물이 하나같이 실력 있는 기사, 귀족들이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없었다.

애초에 어디 평민들이 사망하는 사건 정도였다면 서른이 아니라 삼백이 죽어 나갔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기사 이상의 귀족만을 노렸기에 모든 귀족이 경각심을 갖고 살피는 사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여태 밝혀진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범행과 범행 동기는 물론이고, 그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침입 방식에서부터 살해 방법까지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 점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백악궁이 날아가는 사건으로 고심 중인 카논을 더욱 머리 아프게 만드는 중이었다.

한데 정작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힌 사건의 의뢰인과 실행범이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제 목덜미를 잡는 사람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특히 지금도 위에서 내려오는 재촉에 쉴 사이 없이 사방을 뛰어다니는 조사관들의 경우는 억울해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 카논 제국의 아래위를 힘들게 만든 암살 사건은 사실 그리 엄청난 목적을 가진 게 아니었다.

무공으로 인해 갈라진 세력을 하나로 정리하고, 그 후 카논에 대한 혼돈의 파편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단순 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무우가 당당히 고마워하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일은 결코 그가 직접 나설 만큼 대단한 규모가 아니었으니까. 그야말로 드래곤을 잡을 칼로 닭을 잡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알아. 그래도 좀 더 고생해 주길 바라네. 그리고, 하는 김에 이것도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어.”

존 워스는 그런 무우에게 하나의 일거리를 더 떠넘기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무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왜 내게 넘기려는 거지?”

“자네가 최선이니까.”

“그러니까 왜 자네가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느냐는 말이야.”

“현재 난 너무 드러나 있어.”

“바보 같은 소리로군. 그거야 존이라는 이름과 얼굴만 버리면 끝나는 일이잖아.’

“그럴 수 없어. 아직 이 얼굴로 해야 할 일들이 남았거든. 이 얼굴을 찾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다면 자네도 쉽게 버리라는 소린 못할 거야. 여유가 없어.”

“어설픈 변명이군. 겨우 그 정도로 여유가 없을 자네가 아니잖아.”

그야말로 ‘변명을 위한 변명’이라는 무우의 말이다. 기실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이드를 제외하고 현재 존 워스를 찾는 이들 중 그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여유가 없다며 일을 떠넘기려 하다니.

무우는 불평불만을 쏟아 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 걸까. 투덜거리는 입과는 달리 그의 손은 존 워스의 손을 잡았다.

스으으으ᅳ

마주 잡은 두 손을 따라 희미한 빛이 흘렀다. 존 워스의 손에서 무우의 손으로 빛은 스며들 듯 무우의 손에서 사라졌다.

직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무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파앗.

그러자 그 앞에 작게 축소된 바이트 타블렛의 영상이 떠올랐다. 다만 영상 속 바이트 타블렛은 에메랄드를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탑주 연구실의 그것과는 그 모습이나 구조가 사뭇 달랐다.

영상 속의 바이트 타블렛은 중간 부분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또 그렇게 희게 빛나는 부분에서 뻗어 나온 기운들이 마치 촉수처럼 아래위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을 휘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얀 부분이 아래위를 삼켜 버릴 것 같은 그 형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섬뜩했다.

앞서 ‘침식’이라는 게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되는 모습이랄까.

무우는 영상 속 바이트 타블렛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보고는 곧 영상을 지워 버렸다.

“완전 침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어. 내게 넘긴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물론 그런 이유도 있어. 그런 쪽의 섬세한 작업은 자네가 더 나으니까.”

“그딴 헛소리는 때려치워. 손대 봐야 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소린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만 감추고 속내를 꺼내 놓으라는 듯한 무우의 재촉에 존 워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조만간 아나크렌 제국으로 넘어갈 생각이네.”

“아나크렌이면, 그 검왕이라는 자를 만날 생각인가? 아니면 미완의 마탑에?”

“둘 다 볼일이 있기는 하지.”

긍정에 가까운 존 워스의 대답.

무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에 머리에 걸쳐 있던 로브가 넘어가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젊은 청년의 얼굴에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눈동자가 존 워스를 향했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마탑 놈들에게 더미를 넘겼으면 충분하잖아. 이제 침식이 끝나고 바이트 타블렛이 완성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지금 정황이 상당히 불안해. 이대로라면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보지 못할 수도 있어. 그 전에 손을 써야 해.”

“…..그 말. 지금 저쪽에 누가 있는지 알고서 하는 말인 거지?”

“훗, 설마 모르겠나.”

존 워스가 무슨 말이 그러냐며 피식 웃었다.

“잊었나 본데. 한동안은 같은 성안에 있기도 했다고. 그 차원의 인의 주인과 함께 말이야.”

“그때는 자네 정체를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젠 다르잖아. 소멸당할 수도 있어. 그는 위험하다고.”

소멸을 언급하는 무우의 표정은 무감정해 보였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두려운 나머지 표정이 없어졌을 뿐이었다.

“그건 자네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메르시오의 최후를 지켜본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말이 그거야. 그걸 알면서 그곳으로 가겠다니까 하는 소리 아니냐고.

“걱정 마. 어차피 내가 볼일이 있는 건 검왕과 마탑이야. 차원의 인의 주인이 아니라고.”

지금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을 찾고 있는 검왕.

그 이유에 대해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존 워스의 눈이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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