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22화
1257화
혼돈의 파편,
이드가 언급한 그 이름에 라울이 무겁게 답했다.
“미완의 마탑에 대한 공격을 결정하고 나니, 혼돈의 파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제가 몇 번인가 강조했었죠.”
이드가 토벌에 함께하려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정신의 관에서 날뛰던 혼돈의 파편..없지요.”
영혼의 관을 공격해 초인 마법의 회수하기로 결정한 바벨.
이런 바벨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든 존재가 바로 혼돈의 파편이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그들과 미완의 마탑 사이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그 계획에 위험 요소는 많았다. 당장 초인기 무력화 마법이 가장 위험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초인 마법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예상이 가능한 위험은 바벨이 지금까지 쌓아 온 역량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초인 마법이 아무리 초인에게 위협적이어도 그건 영원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아티팩트뿐 아니라 기사와 마법사 전력도 있었고, 하다못해 외부 전력을 초빙하는 방법도 있었다.
정말 바벨이 단단히 마음먹고 하고자 한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감도 혼돈의 파편 앞에서는 굽혀야만 했다.
바벨이 파악한 혼돈의 파편은 매우 강력하고 위험했다. 이드와 검후를 제외하고 혼돈의 파편의 위험성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바벨이었다.
정신의 관 토벌과 쉐어 가든 붕괴가 그 계기였다.
이를 통해 혼돈의 파편이 얼마나 파괴적인 존재인지를 확인한 바벨에서는, 이들이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자연재해와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과거의 드래곤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벨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들에게 있어 혼돈의 파편은 피하고 외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장 영혼의 관에 대한 공격만 해도 마주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바벨이 파악하기로,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바벨이 보유한 최고의 초인 대부분을 소집해야 했다. 어중간한 전력으로는 절대 맞붙을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러자니 초인 마법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전력을 다해야 할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 갑자기 초인 마법이 방해를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혼돈의 파편은 영혼의 관에 대한 공격만 막아서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 바로 초인을 폭주하게 만드는 버서커의 근원이었다.
혼돈의 파편과 가까워질수록 버서커는 강렬하게 발생한다. 혼돈의 파편과 싸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부터 이겨야 하는 것이 초인이 짊어진 짐이었다.
하지만 버서커를 극복할 수 있는 초인은 그야말로 극소수. 대부분은 그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신을 놓고 폭주하는 아군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자연히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은 최정예가 나설 수밖에 없다.
자, 이런 상태에서 최악의 시나리오 하나를 생각해 보자.
정신없는 전투에서 버서커 현상이 발생하고, 그 틈을 노려 초인 마법의 무력화에 당하게 된다면 어떨까.
“최악이야! 그건 더 이상 초인이 아니야. 술 취한 진상이지!”
회의 당시,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 결과에 바벨의 지도부는 일제히 악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확실한 해결 방법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버서커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기 전에는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영혼의 관을 그냥 놓아 둘 수도 없는 일.
그 시점에서 지도부는 인정해야 했다. 바벨의 힘만으로는 영혼의 관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부의 힘으로 모자란다면 외부의 힘을 빌리자 무력감과 자괴감이 들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자 답은 저절로 드러났다.
아나크렌 제국의 뜻을 무시하고 바벨과 함께 영혼의 관을 공격해 줄 수 있는 자.
그리고 바벨조차 최정예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혼돈의 파편을 단독으로 상대하고, 심지어 죽일 수 있는 자.
바로 이드였다.
더욱이 이드 옆에는 이후 제국과 일어날 문제를 중재해 줄 수 있는 검후가 있으며, 무력화된 초인을 지켜 줄 은색 기사단이라는 훌륭한 기사 전력도 함께했다.
이런 결론에 따라 라울이 오늘 저택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드를 붙잡고 억지를 부리거나 한 이유도 전부 여기에 대한 협조를 얻어 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짓거리였지만 말이다.
라울은 이런 사정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추려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드와 검후를 보며 정중히 요청했다.
“바벨의 이름으로, 두 분께 영혼의 관을 함께 공격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나까지 필요할까? 바벨이 진짜 필요한 건 명예 후작뿐인 것 같은데.”
검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에 라울이 단호한 어조로 부정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 후작님도 그렇지만, 검후님과 은색 기사단의 도움 역시 절실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스터께서 드리는 정식 요청서입니다.”
라울이 봉인된 두 장의 요청서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이드는 보지도 않고 검후에게 건넸다. 어차피 안에 든 내용은 방금 라울을 통해 다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드와 달리 봉인을 뜯고 찬찬히 요청서를 읽은 검후는 편지지를 다시 곱게 접고는 말했다.
“바벨 마스터의 요청서는 잘 받았다. 쓸데없는 헛소리는 빼고 처음부터 이걸 내놓지 그랬나.”
“아무래도 두 분 모두 모시기 어려운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승낙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라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다른 지도부의 결정이었으리라. 그에 검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날 상대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자네 발언권이 그렇게 약한 줄은 몰랐군.
“크흠. 제힘이 약한 것이 아니라, 다수결로 정해진 사안이라 따랐을 뿐입니다.”
약해 보이는 것이 싫은 걸까? 라울이 조금 발끈한 태도로 반박했다.
설마 저 바벨이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고 있을 줄이야. 새로운 사실 하나를 머리에 집어넣은 이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이 요청서가 어디어디에 전해진 겁니까.”
“두 분뿐입니다. 두 분께서 요청을 받아들이신다면 다른 곳으로 요청서가 나갈 일은 없습니다.”
“전력이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지금 절 떠보시는 겁니까?”
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그런 뜻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제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바벨이 여러분의 전력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요청서가 두 분께만 나가는 것도 그에 기초한 것이고요.”
“흐음. 흥미로운 말이네요. 더 이상의 외부 전력은 필요 없을 정도로 저희 전력을 강력하게 판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의 관 토벌과 쉐어 가든의 전투는 저희도 대부분 파악하고 있습니다. 명예 후작님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분 명예 후작 부인의 전력만 해도 영지 대여섯 개는 우습게 뒤집어엎을 수준이지 않습니까. 특히 라미아 님께선 최소 9클래스의 최고위 마법사이시기도 하고 말입니다. 은색 기사단 정도가 아니고서는 세 분 외 어지간한 전력은 머릿수를 더하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혹 틀린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뭐,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네요.”
이드는 기다, 아니다 하는 말 없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바벨의 전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나요?”
검후 옆에서 이드 앞으로 온 요청서를 읽은 일리나가 물었다.
“물론 저희 쪽에서도 최고의 전력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버서커를 대비해서 머릿수가 아닌 최정예로 구성될 겁니다. 당연히 바벨에 소속된 마법사와 기사도 참가하고요.”
아무리 믿고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초인 외 전력을 온전히 외부에만 맡길 수는 없을 테니까.
그야말로 만약을 대비한 전력.
가정하고 있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은색 기사단과 이드 직접 나서는 일도 없을 것이다.
“좋아. 바벨의 뜻은 잘 알았네. 그럼 이 요청을 받아들였을 때의 대가는? 요청서에는 그에 관해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던데. 설마 무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일리나에 이은 검후의 말에 라울이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사실 가장 고심한 부분입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두 분이 만족해하실 만한 걸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검후는 최강대국인 아나크렌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다. 그녀가 가지고자 한다면 가지지 못할 것이 없다.
이드 역시 마찬가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로서, 그를 자국에 주저앉히기 위해서 무엇이든 내놓을 수 있는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상대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상대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을 텐데. 바벨은 아직 이드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자 노력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바벨이 이드에 대해 조사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점이 바로 그의 과거였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이드가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이드와 대륙의 첫 인연이 바다에서 이뤄졌다는 정도였는데.
그 사실은 오히려 혼란만 가져왔다.
도대체 이드는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그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던 것일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에 바벨은 결국 이드의 과거에 대해 추적하는 일은 그쯤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요? 설마 정말 공짜로 움직여 달라는 건 아니시겠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가는 직접 말씀해 주시면 그걸 들어 드리는 형태로 지불하고자 합니다.”
그야말로 원하는 그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바벨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결코 헛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드와 검후를 상대로 그렇게 쉽게 꺼낼 말도 아니었다.
“흠. 그건 우선 요청을 받아들일지 말지 가부를 결정하고 정하도록 하지.”
“그야 물론입니다.”
“우리끼리 상의를 좀 하고 싶은데. 잠시 나가 있어 줄 텐가? 아니면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와도 좋고.”
“아닙니다.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요.”
라울의 말에 이드는 바로 하인을 불러 그를 또 다른 접객실로 안내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두 아내와 검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