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23화
1258화
검후가 두 손으로 찻주전자를 감싸 쥐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차나 마시면서 잠시 한숨 돌려요, 우리”
쪼르륵.
검후가 각자의 잔에 차를 따랐다. 내력 덕에 순식간에 데워진 차는 딱 마시기 좋을 정도로 따끈해져 있었다.
“하긴, 우리가 급할 건 없으니까.”
이드는 손으로 전해지는 차의 온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 너머로 찻물을 넘겼다. 그건 라미아와 일리나 역시 마찬가지.
긴 시간 말소리가 멈추지 않던 방 안이 잠시간 조용해졌다.
호로록.
침묵은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바쁜 라울의 이야기에 덩달아 급박해졌던 기분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급한 건 어디까지나 바벨과 라울이다. 그들을 따라 함께 급해질 이유가 없었다.
이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검후를 물끄러미 보았다.
성급히 묻는 자신에게 차를 권하던 그녀. 과연 백 년의 연륜은 가볍지 않았다. 첫 만남의 기억 속에서 선명하던 작고 귀엽던 시르피의 모습이 급격히 희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묘하게 섭섭하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차 온도가 딱 좋다고.”
이드가 어물쩍 말을 받아넘기자 검후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속을 이해한 라미아와 일리나가 키득거리며 작은 웃음소리를 낼 뿐이다. 그렇게 각자의 찻잔에 든 차가 절반 정도 비었을 때였다. 검후가 말문을 열었다.
“설마 기다리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요.”
“라울 자작 말이죠?”
일리나가 검후의 말을 받았다.
“네. 전 당연히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만큼 저들이 이번 일을 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겠죠. 더욱이 자작의 반응을 보면 그걸 딱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고 말이에요.”
원래 협상이란 아쉬운 쪽이 지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서는 급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 라울은 굳이 그러한 심정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만큼 이쪽을 신뢰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와 저들 사이에 신뢰가 쌓일 정도는 아니죠. 저것도 다 수작이에요.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서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수작.”
검후의 평가는 냉정했다.
라울을 대할 때면 항상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번만은 이드도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분명 바벨의 상황이 급한 건 사실이지만, 라울이 문밖에서 기다릴 정도인가 하면 또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영혼의 관 공격에 정예를
준비시킨다고 했는데, 그것만 해도 하루 이틀에 끝나지는 않는다.
그러자 분위기가 너무 한쪽으로 쏠린다 싶었는지 라미아가 라울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렇지만 바벨 사정이 급해진 것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라미아는 누구 편이에요?”
“내가 누구 편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잖아.”
갑자기 말꼬리를 잡고 투닥거리기 시작한 검후와 라미아.
이드는 헛기침으로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 후 말했다.
“크흠, 우리 쪽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물어볼게. 바벨의 요청,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가야죠.”
“바벨을 멈출 수 없다면 함께해야겠죠.”
라미아와 검후가 동시에 답했다. 투닥거리던 것과 다르게 결국 가야 한다는 의견은 같았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이드가 이번엔 일리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두 사람과 같은 의견이에요. 혼돈의 파편과 관련이 있는 곳을 공격하는 일에 우리가 빠질 수는 없죠.”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나의 말이 맞아요. 혼돈의 파편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바벨의 요청은 받아들이는 걸로 정하고.”
“잠깐만요. 결정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드의 결정을 검후가 막고 나섰다.
“먼저 해야 할 일?”
“네. 라울에게 대답을 해 주기 전에, 황제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그래야 혹시 생길지 모를 혼란도 막을 수 있으니까요.”
“아, 그걸 깜빡했네.”
이드가 놀란 얼굴로 손을 마주쳤다.
황제의 권위도 권위지만, 혼돈의 파편과 함께 자신의 진짜 정체까지 밝힌 이상 황제도 이제 한배를 탄 동료였다. 응당 이런 큰일은 그에게도 미리 알려야 했다. 그래야 소외되었다고 서운해하는 일이 없고, 검후의 말처럼 손발이 맞지 않아 생길 혼란을 사전에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선전 포고와 도발로 마스의 시선을 돌려 줄 수도 있고 말이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길 바라지는 않지만요.”
영혼의 관을 공격할 때 마스가 막아서는 경우가 생기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물론 바벨이 하는 일인 만큼 그런 멍청한 사태가 일어나는 걸 그냥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바벨이라면 분명 영혼의 관에 대한 공격 이전에 필요한 사전 준비도 철저히 해 뒀을 터였다.
그중 마스의 눈을 돌리는 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일 테고 말이다.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대처는 빨랐다. 라미아가 즉석에서 황궁으로 통신을 열어 황녀를 통해 사정을 전달한 것이다.
황녀는 곧장 황제에게 보고한 후 다시 답을 주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황제가 곧장 달려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 차라리 이야기하기는 편하지. 그리고 황제께서 직접 방문하신다면 겸사겸사 검왕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고 말이야.’
“굳이……?”
이드는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검후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너무 질색하지 말고, 들어 봐. 일단 지금 검왕이 영혼의 관 인근에 진을 치고 있는 상태잖아. 근데 그런 상황에 바벨이 영혼의 관을 공격하게 되면, 높은 확률로 검왕이 알아차리지 않겠어?”
사실 검왕이 있는 곳에서 영혼의 관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지간해서는 아무리 그라도 영혼의 관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영혼의 관을 공격하는 일은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신의 관 때와 마찬가지로 그건 결코 조용히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행여 광격 마법이라도 터지는 날에는 블레인 영지 밖에서도 알 것이고.
그 와중에 혹 혼돈의 파편이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세상이 다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검후의 반응은 그야말로 삐딱했다.
“그래 봐야 그놈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뭘 할 수 있냐는 것보다는 혹시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의미지.”
원래 댐도 작은 균열에서 시작해 무너지는 법이다. 하물며 검왕은 변수로 작용할 요소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능력만이 아니라 욕심도 흘러넘쳤으니까. 만에 하나 영혼의 관과의 전투에 그가 개입해 초인 마법이라도 빼돌린다면? 그때는 문제는 아주 심각해질 수 있었다.
‘나야 상관없지만, 제국과 검후 입장에서는 꽤 골치 아프겠지. 바벨은 난리가 날 테고.’
어쩌면 바벨은 영혼의 관을 공격한 것처럼 소드 팰러스를 치려고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상황은 복잡하게 꼬일 수 있었다. 제국와 검후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휴우. 이게 다 제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업보예요.”
이런 불길한 가능성들에 검후가 한탄하자, 이드가 그녀를 위로했다.
“업보는 무슨. 내 고향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어. 자기 속도 온전히 모르는 것이 사람인데, 남의 속을 어떻게 다 알아.”
“그래도요. 저와 같은 위치에 있다면 그 어려운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단 말이에요. 백 년이나 살았으면서, 이드 님도 제가 바보 같죠?”
“아니, 갑자기 답지 않게 왜 그러는데?”
갑자기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검후에 이드는 괜히 검왕에 대한 말을 꺼냈나 하고 뒤늦게 후회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검후를 붙잡고 괜찮다, 괜찮다를 반복하던 이드는 결국 라미아와 일리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서야 겨우 검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라미아가 꺼내 놓은 통신구가 반짝였다.
“제가 지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황제였다.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택으로 왔다. 언제 나와 같이 황녀만 대동한 상태였다.
“바벨이 영혼의 관을 공격한다고요?”
“그러하오, 황제.”
전해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황제를 앞에 두고 검후와 이드는 라울과 주고받았던 대화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가만히 앉아 모든 이야기를 들은 황제가 설명이 끝난 후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작자들이 있나. 감히 제국의 행사를 어찌 보고!”
“황제, 체통을 지키시오.”
“지금 체통이 문제겠습니까. 저 바벨이 제국은 물론 황제인 저를 무시하고 날뛰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과 제국이 동시에 무시당했다고 여긴 황제가 화를 감추지 않았다.
이드는 그런 황제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바벨도 갑자기 튀어나온 초인 마법에 다급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라울 자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를 만나야겠습니다.”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지 않는 황제의 모습에 이드가 곤란해할 때였다. 검후가 별 고민 없이 라울이 다른 접객실에 있음을 알렸고, 황제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곳으로 향했다.
달깍.
이드는 뒤늦게 닫히는 문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검후를 돌아보았다.
“괜찮은 거야? 상당히 흥분하신 것 같던데. 더욱이 호위도 없이 라울을 만나는 것도 그렇고.”
“아무렴 이드가 여기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리고 황제가 흥분한 모습을 보인 건 진짜가 아니에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가 아니라니? 그럼 일부러 화를 냈단 말이야?”
“그렇죠. 아마 황제는 이야기가 끝나기 전부터 라울이 아직 저택 안에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그가 들으라고 언성을 높인거죠. 내가 너희의 무례에 이만큼 화가 났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신호로. 그렇지요?”
별거 아니라는 양 눈을 찡긋한 검후의 물음에 황녀가 배시시 웃음으로 답했다.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뜻이었다.
“어째서?”
일부러 그런 모습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 그런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황제에 의해 쉽게 풀렸다.
“제국은 바벨이 영혼의 관을 치는 것을 묵인합니다. 그 대신, 바벨은 제국과 마스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황제의 목적은 처음부터 바벨의 협력이었다.
“과연. 그것 때문에…………….”
상황을 파악하자 이드는 곧장 황제의 행동을 이해했다. 황제는 애초에 바벨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기실 옳은 판단이었다. 바벨이 제국에 속한 조직이 아닌 만큼, 제국의 영향력도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