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28화
1263화
안티로스에서 7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닥스 영지.
닥스 자작이 다스리는 이 땅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 영지다. 그리고 어젯밤.
같은 집단에 소속된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이 영지에 나타났다. 하지만 영지민과 영주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타난 인물들이 영지의 외곽, 아무도 찾지 않는 공터로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밤사이 공터를 정리하며 모종의 작업을 이어 갔다.
그렇게 밤이 가고 날이 밝은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작업을 마친 사람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와중.
파칙.
공터 가운데에 마나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오신다. 준비해라!”
인물들을 이끌고 온 누군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마나의 불꽃이 사라지며 공간이 쩍 하고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수십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은 라울이었다.
그 뒤를 따라 이드와 라미아, 일리나. 그리고 검후가 차례차례 걸어 나왔다.
“마스…… 는 아닌 것 같은데?”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답했다.
“안티로스로부터 800킬로미터 정도 이동한 것 같아요.”
“명예 후작 부인의 말씀이 정확하십니다. 여긴 안티로스와 마스의 국경 중간 정도에 위치한 닥스 영지입니다.”
“번거롭군. 곧바로 마스까지 이동하는 게 아니었나?”
“하하하. 그러면 좋지만, 아무래도 공간 이동으로 마스까지 곧장 가기에는 인원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더욱이 현재 상황을 아시잖습니까. 이 정도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저희 바벨이니까 가능한 겁니다.”
검후의 타박에도 라울은 오히려 바벨의 저력을 자랑했다.
라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차원진이 있은 후, 공간 이동이 어려워진 건 모든 국가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동하려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인원이 많아질수록 난도와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까놓고 말해서 은색 기사단 전원을 닥스 영지까지 이동시키는 건 지금의 제국이라도 고개를 저을 만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바벨은, 비록 돈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크게 어렵지 않게 일을 해치웠으니 라울이 충분히 자랑할 만했다.
“그럼 대충 두 번 정도 더 공간 이동하면 블레인 영지에 도착하는 겁니까?”
이드의 질문에 자신만만하던 라울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마법사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조금 어렵습니다. 해서 여기서부터 국경까지는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설마 또 마차는 아니겠지요.”
저택을 나선 일행은 라울을 따라 발터의 저택으로 향했고, 그곳에 준비된 마법진을 타고 여기까지 이동했다.
그 과정 중 저택에서 발터의 저택까지의 이동에는 마차가 사용되었다. 전원 여성으로 이뤄진 은색 기사단이 저택을 나서면 너무 눈에 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하하, 그랬다가는 내일이 아니라 다음 달에 도착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여기서부터 국경까지는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이미 그걸 위한 준비도 끝난 상태입니다.”
말을 마친 라울의 손짓을 따라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동에 저들의 초인기가 사용될 모양이다.
“국경까지라면, 거기선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까?”
“국경에 도착하면 마법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 블레인까지는 다시 공간 이동으로 갑니다. 아무래도 전시 상황이라서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가는 너무 눈에 띌 가능성이 커서 말입니다.”
제국 안에서야 황제의 허락을 받은 일이라 문제가 없지만, 마스의 경우는 달랐다.
“국경에서 블레인까지 또 공간 이동인가. 마나석 소비가 상당할 텐데?”
“하하하. 검후님의 걱정은 감사하지만, 저희는 바벨입니다. 그 정도 마나석은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겠지. 바벨은 마나석이 없는 게 아니라, 마법사가 없는 것이니까.”
“…..꼭 그렇게 아픈 곳을 찌르셔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검후의 말에 라울이 처량한 눈빛을 쏘아 냈다. 하지만 검후는 오히려 그런 반응이 기껍다는 반응이다.
“당연하지 않나? 자네가 괴로운 만큼 나는 즐겁다네.”
“……”
“그나저나, 이번 일에 자네가 동행하는 것은 의외야. 내 알기로 자넨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응당 발터의 저택에서 헤어질 줄 알았던 라울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장 먼저 공간 이동 마법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런 라울의 적극적인 모습이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검후다.
“검후님과 명예 후작께서 직접 행차하시는 일인데, 제가 지켜만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라도 성의를 보여야지요.”
“흥, 개도 안 물어 갈 신소리는 그쯤하고.”
“큼. 어지간한 일이라면 그렇게 처리했을 겁니다만, 이번엔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검후님과 명예 후작님이 도와주시는 만큼, 영혼의 만에 하나 초인 마법의 단서를 남겨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관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때문의 동행인가.”
생명의 관도 그랬고, 정신의 관도 그랬듯 영혼의 관도 상당한 크기로 예상되었다. 그 넓은 곳에서 초인 마법에 대한 것을 골라내는 일은 어쩌면 전투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더욱이 중요한 연구 자료를 꼭꼭 숨겨 두는 마법사들 특유의 버릇을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골치 아파진다.
모든 일이 끝나고, 뒤늦게 영혼의 관을 찾은 누군가가 감춰져 있던 연구 자료라도 얻어 봐라. 그래서는 지금의 이 고생이 모두 헛것이 되어 버린다. 라울의 동행은 바로 이런 끔찍한 상황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초인기 골든 아이라면 숨어 있는 공간도 놓치지 않고 살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타시죠.”
일행들 앞으로 여러 개의 양탄자가 깔렸다. 넓은 양탄자의 네 귀퉁이에는 초인들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아마도 저들이 양탄자를 이용해 일행들을 태워 나를 모양이었다. 대충 그 과정이 예상되는지, 기사 중 몇몇이 새파래진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고소 공포증이 있는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고소 공포증이 없더라도 긴장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하늘을 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드와 라미아, 그리고 특히 일리나는 상당히 기대감에 가득 찬 모습이다.
“그건가? 나는 양탄자.”
“두근두근해요. 알라딘이라니.”
“이번에 타 보고 괜찮으면 우리도 하나 만들어요.”
이런 반응의 이유는, 며칠 전 감상한 알라딘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렇게 기대와 걱정을 담고, 양탄자가 출발했다.
슈화화화확!
“야호~’
“꺄아악! 너무 높아! 너무 빨라!”
“진정해! 그렇게 날뛰다간 떨어진다고!”
상당한 소란을 싣고서.
양탄자 비행은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바람을 탄다는 라울의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네 명의 초인은 말 그대로 대기를 자유롭게 조종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통째로 이동시켰다. 쉽게 말해 대기를 딱딱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투명한 막을 더해서 그걸 움직였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비행은 안정적이었다. 쏟아지는 바람에 고생할 일도, 파공음에 괴로워할 일도 없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양탄자는 그저 투명한 바닥을 가려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한 장치였을 뿐, 실질적인 장치가 아니라는 것일까. 아무튼, 그렇게 반나절을 비행한 그들은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경 인근에 바벨이 마련한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편히 쉬고, 내일 마스로 출발하겠습니다.”
“이대로 바로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요. 밤에 하늘을 날면 발견된 일도 없을 거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방심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방법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마스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이드는 간단히 인정했다.
괜히 방심하다가 일이 틀어질 경우 상황만 복잡해진다.
“그보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번 일에 함께할 마법사와 기사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바벨의 초인들은 없는 겁니까?”
“그쪽은 다른 방향에서 진입을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지역으로 흩어져 있던 전력이라서 말이죠.. 이드와 검후는 라울의 설명을 들으며 그를 따라 이동했고,
그곳에 모인 인물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 반 감격 반의 심정으로 이드와 검후를 반겼다.
바벨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기사와 마법사인 이상 검후와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에 관심이 없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들을 살핀 검후는 이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초인은 몰라도, 이들과의 협력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소속이 다르면 알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반응만 봐서는 검후의 명령이면 어지간한 것은 충실히 따라 줄 듯 보였다.
“그대들만 좋다면 우리 기사들과도 통성명을 하는 게 어떠한가? 이제 곧 함께 싸워야 할 동료로서 서로 얼굴은 익혀 두는 편이 좋지 않겠나.”
“으, 은색 기사단! 영광입니다.”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무렴 어떤 분의 권유인데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라울이 센스를 발휘해 간단한 술과 고개도 제공해 준 덕분에 은색 기사단과 바벨의 기사들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술을 더한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다들 전날 마신 술기운은 흔적도 비치지 않는 모습으로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마법사들은 마법진과 마나석을 준비했고, 초인들은 공간의 안정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공간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공간이 쩌억 갈라지며 검은 속을 드러냈고, 또다시 라울이 가장 먼저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출발!”
현재 블레인은 마스 정규군에 의해 지켜지는 중이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군이 지키고 있는 건 영주성이 있는 영지의 중심이 아니라, 외곽에 가까운 작은 마을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혼의 관이 바로 그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지간해서는 정규군이 움직이는 일은 잘 없다. 즉, 그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심상치 않은 사태를 의미했다.
하지만 정규군이 움직였음에도 현재 블레인의 상태는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