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29화
1264화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블레인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수많은 병사를 본 영지민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떨었다. 그나마 창고에 숨거나 도망치지 않은 것은 병사들의 분위기가 험상치 않은 덕분이었다.
영지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까지 훈련이라도 하러 왔나?”
“영지전은 아니겠지?”
“그건 아녀. 중앙에서 영지전에 참견을 왜 허나.”
“그건 그려. 그보다는 어디 뭐 오크 무리라도 나타난 거겠지.”
“끌끌. 걱정들도 팔자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우리 같은 것들은 그저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최고야. 영주님만 믿고 있으면 된다니까.”
하지만 이런 관심도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며 점차 누그러졌다.
당장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고, 병사들이 민가에 피해를 주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군은 넓게 흩어지는 대신 영지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움직이지 않아 그 인근의 사람이 아니면 마주칠 일이 없었다.
영지민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군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온전히 마음을 놓지도 못했다. 그래서 오늘도 한쪽 눈과 귀를 서쪽을 향해 열어 두고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모든 관심이 서쪽을 향해 있는 덕분에 반대로 극히 조용해진 영지의 동쪽 끝자락. 그곳에는 다섯 봉우리가 한데 어우러져 똬리를 틀고 있는 산이 있었다.
나무가 우거져 사람의 발길이 뜸한 이 산은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든 손님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데 이 손님들이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단단한 나무들이 힘없이 픽픽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 귀퉁이 한쪽에 부분 탈모가 생기고, 그 이후로 몇 시간 뒤, 산이 갑작스러운 탈모에 슬픔을 갈무리하기도 전 다시 새로운 손님들이 산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산?”
검은 공간을 벗어난 이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옹기종기 모인 다섯 봉우리였다.
“블레인 영지 동쪽에 있는 포이브라는 산입니다.”
“영혼의 관은 영지 서쪽에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공간 이동으로 바로 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영혼의 관까지는 직접 이동해야 합니다.”
“마탑에서 공간 이동을 감지할 가능성 때문이군요.’
“마탑 뿐 아니라 마스의 군도 넓게 진을 치고 있어서 말입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마중 나오기로 한 겁니까? 일단 적의를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불청객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라울과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둘러본 이드의 눈이 우거진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멈췄다. 그러자 이드를 따라 하나둘 모여드는 눈동자들.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안광만으로 그 일단의 나무를 밀어 버리기 직전.
나무들 사이에서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흠. 저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피식.
은색 기사단의 것일까. 이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코웃음 소리를 들었다.
하긴, 자신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봤지만 스스로 수상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인간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한데 라울이 그 수상한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러자 나무 그림자에 숨은 목소리가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맞아, 라울, 나 플레타야, 우리 꽤 오랜만이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리 나오시죠?”
“하하하. 그……. 럴까요?”
이드의 말에 한 남자가 나무 그림자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그는 짙은 갈색 머리에 평범해 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였다.
나이는 라울과 동년배로 보였으며, 상당한 근육질의 몸을 가졌다. 무장으로는 파츠 아머와 가죽 갑옷을 부위별로 나눠 입었는데. 어깨 뒤쪽으로 삐죽 솟은 어린아이 팔뚝만 한 대검 자루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에 대한 스캔을 마치는 순간.
“본단에서 오는 사람이 설마 자네였을 줄이야.”
이드는 싫은 기색을 다 감추지 못한 라울의 모습에 어쩐지 덩달아 골치 아파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마중입니까?”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출발 전에 본단에서 먼저 도착해 있다는 연락을 받은 상태라서…… 젠장. 자넨 도대체 왜 거기 숨어 있던 건가? 하마터면…….”
연락을 받긴 했지만, 그중에 저 플레타라는 사람이 끼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일까. 라울은 말을 하다 말고 방향을 틀어 상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정말이지 하마터면 바벨의 간부를 어이없이 잃을 뻔했다. 뒷말을 겨우 삼킨 라울이 이드를 힐끔 돌아봤다.
과연 이드가 플레타를 적이라 판단하고 손을 썼다면 그 결과가 어땠을까를 상상한 것이다.
‘어쩌길 뭘 어째. 단번에 몸이 반쪽 나는 거지.’
그간 라울이 보고 들은 이드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저렇게 바보처럼 등장하긴 했지만, 플레타도 보이는 만큼 어리숙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가 자랑하는 대검을 들고 휘두르면 그 앞에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통하는 상대가 있는 법.
그가 과연 이드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라울은 자신 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레타는 화를 내는 라울을 향해 순박하게 웃어 보였다.
“면목 없네. 기다리기 지루해서 살짝 장난을 쳐 본 것인데. 그만・・・・・・ 하하하. 여러분께도 초면에 실례가 되었습니다.”
“빌어먹을. 자네가 무슨 한두 살 먹은 앤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장난이라니! 난 이래서 자네가 싫어!”
“이거 어떡하지? 나는 그런 자네가 좋은데. 하하하.”
라울이 질색을 하건 말건 플레타는 껄껄 웃으며 라울의 어깨를 팔을 감았다. 라울은 질색하며 플레타의 팔을 털어 냈지만, 그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라울도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검후가 입을 열었다.
“라울 자작. 소개를 부탁하지.”
“이런 실례했습니다, 검후님. 소개하겠습니다. 플레타 제일. 저와 같은 바벨 소속으로, 이번 작전에 투입된 공격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번 작전의 대장은 자네가 아니었나?”
“검후께서 계신데 누가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특별히 맡은 임무와 함께, 검후님을 보좌하는 게 전부입니다.”
장어처럼 미끈거리는 대답에 검후는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누가 그에게 자신의 보좌 임무를 맡겼단 말인가.
잠시 라울을 노려보던 검후는 곧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플레타를 보았다.
그러자 플레타가 검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평민 플레타 제일이 검후님을 뵙습니다. 대륙 최강의 검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대륙 최강’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식어에 검후의 눈동자가 이드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전까지는 그야말로 당연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이드가 돌아왔고, 일리나도 숲에서 나온 이상. 더는 대륙 최강의 검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와 별개로 검후는 의외였다. 바벨의 초인이 이런 표현으로 존경심을 표하다니.
“일어나게, 플레타 제일. 자네도 검사인가?”
“그렇습니다. 타라툼을 익히고 있습니다. 검후님이 남기신 무언에 따라 한시도 이 녀석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지요.”
플레타가 허리 아래로 비집고 나온 검집을 툭툭 두드려 보였다. 거칠지만 상남자 특유의 애정이 담긴 손길이다.
“바벨 소속인데, 특이하군. 더욱이 타라툼이라면 익히는 사람이 몇 없는 대검술일 텐데.’
타라툼은 본래 어느 이름 없는 용병에 의해 만들어진, 용병의 검술이다.
그에 의해 용병 길드에 등록된 그 검술은 이후 용병들에 의해 서서히 발전되어 나가던 중, 이드가 뿌린 무공을 만나 완성되었다.
하지만 검후의 말처럼 정작 타라툼을 익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검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검사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타라툼은 그중에서도 타고난 힘이 강력한 장사만이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신체 조건이 되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검법이랄까.
바벨의 초인들 역시 무기를 사용하고, 그에 맞는 무기술을 익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무기는 어디까지나 보조다. 초인의 진짜 무기는 각자가 가진 초인기니까.
무기는 초인기를 좀 더 위력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로 다루기 쉬운 쪽을 선택하지, 타라툼처럼 입문부터 쉽지 않은 건 잘 고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 플레타라는 남자는 타라툼을 선택했고, 자신의 무기 또한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 않은가.
분명히 말해 초인으로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경우다. 물론 근육질의 몸만 봐서는 대검술이 잘 어울리기는 한다.
“평소 그런 말을 자주 듣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타라툼은 내게 운명이다.”
“운명?”
“그렇습니다. 운명. 제가 바벨에 들어 처음 무기를 선택하는 날. 이 대검이 절 불렀습니다. 그러니 운명입니다.”
“자네…… 제법 기사 같은 말을 하는군. 마음에 들어. 시간이 난다면 그대의 무공을 보아 주지.”
“대륙 최강의 검이 살펴 주신다면…… ᆞ제 인생의 가장 큰 영광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크으…… 저 멍청이가.”
감격한 플레타가 한 번 더 무릎을 꿇었다. 쉽게 굽혀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무릎이 검후 앞에서는 잘만 굽혀지는 것 같다.
그 모습에 라울이 조용히 이를 갈았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라니. 저게 어디 바벨의 인간이 할 소리란 말인가.
바벨의 간부라면 당연히 바벨의 인간이 된 것이 가장 큰 영광이어야지. 지금 하는 걸 봐서는 검후가 조금만 부추기면 당장이라도 그녀의 기사가 될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놈을 보낸 거야!’
자연히 상부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솟는다. 물론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는 벌써 답을 내놓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은가.
소드 팰러스와 바벨. 검후와 바벨은 조심스러운 관계다. 무엇보다 용서를 빌기는 했지만, 검후를 감금했던 전력이 있는 곳이 바로 바벨 아니던가. 그런 만큼 그녀와 함께하게 된 이번 일에 그녀와 원만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인물로 플레타가 선택된 것이리라. 바벨에서는 그야말로 가식 없이 진심으로 검후에게 존경심을 내비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것이다.
그리고 플레타의 이런 성향은 이어진 이드와의 인사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런 세상에! 마인드 마스터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후예를 직접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
장소만 달랐으면 그야말로 팬미팅으로 보일 것 같은 플레타의 반응이었다.
“적당히 하고 그만 움직이세.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가.”
결국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 라울이 플레타의 등을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