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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30화


1265화

수풀을 헤치며 앞장서던 플레타가 어느 순간 속도를 높여 뒤따라오는 일행과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그에 라울이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뭐야?”

“뭐긴 뭐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둘이 조용히 이야기나 좀 하자는 거지.”

“이 정도 거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지 못할 사람은 여기 없다는 걸 알 텐데?”

“들으면 어때 욕을 하거나 음모를 꾸밀 것도 아닌데.”

그럴 거면 어색하게 거리는 왜 벌린 걸까?

“그나저나 말이야. 대단하잖아. 설마 진짜 꾀어 올 줄은 몰랐어.”

“무슨 말이 그래? 꾀어 오다니. 진지하고 솔직하게 협력을 요청했고, 그에 응해 주신 거라고.”

“그래도 어디 보통 거물들이냔 말이지. 사실 명예 후작은 몰라도, 검후가 나서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나?”

플레타가 진지하게 혀를 내둘렀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바벨과 검후 사이에 발생했던 일은 관계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

“알다니, 뭘?”

“뭐긴. 솔직히 저쪽에서 나서 줄 걸 알고서 요청한 거잖나. 바벨의 황금 눈깔은 가능성 없는 일엔 나서지 않는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단 말이지.” 

“황금 눈깔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 젠장, 관둬라. 더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프다.”

“낄낄낄. 잘 생각했어. 황금 눈깔, 얼마나 친근하고 좋아.”

낄낄거리는 플레타를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노려본 라울이지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별명으로 놀렸다고 칼질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보다는 원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저 입을 빨리 닥치게 만드는 것이 낫다.

“검후께서 왜 나섰냐고? 간단해. 나나 바벨보다 혼돈의 파편을 백배는 더 싫어하고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지.”

“나도 듣기는 했지만…… 그렇게나 위험한 놈들이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렇게 물으면 안 되지!”

혼돈의 파편은 그 가진바 힘 자체로도 충분히 위험하다. 하지만 그걸 차치하고라도,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버서커 현상을 생각하면 초인에게 더 치명적이란 사실은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정보는 바벨의 수뇌라면 응당 아는 사실.

즉, 당연히 플레타도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라울은 당장이라도 혼돈의 파편과 버서커 현상에 대한 조사 결과를 이 빌어먹을 놈의 머리에 박아 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러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나무와 수풀에 가려졌던 답답한 시야가 탁 트이며 나타난 공터에는 백 명이 조금 넘는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 편한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던 이들은 라울과 눈을 마주친 후 공터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정렬을 마친 사람들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잘 다녀오신 것 같군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역시 자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했거든.

“언제나 있는 일이죠.”

“젠장, 잘났다, 그래. 하지만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데 아무나 보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보시다시피, 귀빈들이시다.” 

플레타는 마치 자신이 초대한 손님인 양 우쭐해서는 그대로 부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너희들도 인사드려라. 평생에 한 번 뵙기 힘든 분들이다. 소드 팰러스의 검후님과 이드 명예 후작님이시다.”

“대륙 최강의 검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상관에 그 부하랄까. 앞서 플레타가 그랬던 것처럼 부대원들이 무릎을 꿇었다.

백 명이 넘는 대인원이 한 사람처럼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장관이다.

얼렁뚱땅 중간 과정을 생략해 버린 모습. 그 중간에 끼어 버린 남자는 익숙한 듯 덤덤하게 몇 걸음 물러나 기사의 예를 취했다.

“바벨 제2 공격대. 플레타 부대의 부대장 오탄과 플레타 부대가 귀빈들께 인사드립니다.”

이들의 모습에 검후가 이드의 등을 떠밀었다.

“명예 후작이 한마디 해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요? 검후께서 하지 않으시고요.”

이런 일은 보통 그 자리에 있는 최상급자의 몫이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 자리의 최상급자는 검후다.

이드의 진짜 정체를 밝히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마인드 마스터의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절레절레.

해서 미약하게 거부해 보지만, 소용없다. 결국 이드가 어정쩡하게 앞에 섰다.

“크흠. 그대들의 환대에 감사를 표한다. 동시에 이번 작전을 함께 함에 있어 그대들 플레타 부대의 활약을 기대하는 바이다.”

“귀빈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사가 끝이 나자 오탄이 부대원들을 해산시켰다. 해산이라고 해 봤자 공터를 떠나는 게 아니라, 조금 전처럼 편한 휴식을 하는 게 다였다. 다만 조금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들은 공터의 절반만 사용하고 있었다.

“은색 기사단의 기사분들께선 남은 공간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배려에 감사를 표하오.”

쉴라는 오탄을 향해 감사를 표하고는 은색 기사단에도 휴식을 주었다.


“뛰어난 부하들이로군.”

상급자들이 자리를 옮겼다.

공터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마련된 공간이었다. 앞서 공터와 마찬가지로 그곳도 플레타의 분대원들이 자리를 만들어 놓은 듯 막 베어 낸 것 같은 나무 향이 그득했다.

다만 앞의 공터와 다른 것이라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탁자 대용의 나무둥치가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숫자도 모자라지 않았다.

딱히 어디가 상석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당연히 검후가 제일 먼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이후 그녀를 중심으로 이드 일가과 쉴라, 그리고 반대편에는 라울과 플레타, 오탄이 자리했다.

“하하하. 제 사랑의 결정체들이죠.

“빌어먹을…… 제발 헛소리 좀 작작해.”

부하들에 대한 자부심은 이해하지만, 어쩐지 조금 잘못된 표현에 라울이 벅벅 인상을 썼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탄이 역시나 익숙한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보시는 대로 말실수가 잦으십니다. 부디 오해 없으시기를 바라며, 많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있을 실수에 대한 예고편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가, 오탄이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모습이 실로 재미있구나.”

보통 상관에 대해 저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던가.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을 한 검후가 관심을 보였지만, 오탄은 그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상관에 대한 존경심은 별로 없지만, 굳이 허물을 까발릴 정도로 의리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걸까.

대신 라울이 그런 오탄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다.

“자네도 이 멍청한 놈 때문에 참 고생이 많아.’

“다 제 업보지요.”

“……원하면 따로 신청하게. 언제든 다른 곳으로 발령 내 줄 테니까.”

당장 라울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는지를 고민하기도 전, 플레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살벌하게 말했다.

“어디 그렇게만 해 봐, 그날이 나 죽고 저놈 죽는 날이니까!”

“・・・・・・걱정 마십시오. 어디 안 갑니다.”

부디 가지 말라고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협박이라니. 그것도 진창에 빠진 연인들이나 할 법한 발언에 오탄은 무념무상의 표정을 하고서 답했다.

무감정하다기보다는 모든 걸 포기한 자포자기의 심정이 엿보이는 건 절대 착각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저게 정상적인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까.

나름 부하들이나 스폴과 격 없이 지낸다고 생각하는 쉴라조차 두 사람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기는 이드 역시 마찬가지. 꽤 흥미로운 관계를 지켜보던 이드가 라울에게 눈짓했다.

“굉장히 재밌는 분들이네요. 그런데, 사람은 마음에 듭니다만, 이번 일,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분명 실력은 뛰어나 보인다.

라울과 말을 트고 지낼 정도면 바벨에서도 낮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하나의 부대를 이끌고 있지 않은가.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간 보아 온 바에 의하면 바벨은 다른 무엇보다 실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무력이 높다고 일 처리도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이번 영혼의 관에 대한 공격은 빠르고 정확해야 했다.

놓치는 것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그러자면 진중하고 신중해야 할 텐데. 아무리 봐도 플레타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지 않는가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저렇게 보여도 막상 때가 되면 철저한 편입니다. 무엇보다 플레타의 모자란 부분은 오탄 부대장이 채웁니다. 그리고 그러고도 모자란 부분을 위해 제가 있는 것이고요.”

“……검후님을 보좌하겠다고 하시더니?”

“어쩌겠습니다. 검후님이 싫으시다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요.”

검후의 거절에 상처받았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던 라울은 곧 자세를 고치고는 지도 한 장을 펼쳐 보였다.

“자, 이후의 이동 방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저희의 위치는 여기. 그리고………….”

지도를 가로지른 라울의 손가락이 멈췄다.

“영혼의 관의 위치는 여기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이동해야 할 거리는 직선으로 39킬로미터.”

“넉넉잡아 반나절. 먼 거리는 아니로군요.”

이드가 간단히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사실 멀지 않은 거리는 아니었다. 일반 병사라면 하루 온종일 힘들게 걸어야 도착할 테니까.

그것도 개인 장비에 무거운 병장기까지 들고서 이동하자면 도착할 때쯤엔 녹초가 될 만했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에 평범한 병사는 없었다. 최소가 기사급 이상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올라는 힘들지 않을까요?”

물론 능력이 뛰어나도 그 방향이 다른 사람이 있기는 하다. 일리나의 말에 이드는 별 고민없이 답했다.

“힘들다고 하면 놓고 가죠. 아무래도 필요한 사람이 알아서 하겠죠.”

비올라가 필요한 사람이 가만히 입을 닫았다.

“그런데, 이 주변에 주둔 중인 마스 군은 해결된 겁니까?”

군은 영혼의 관 일대를 둘러싸고 있다. 영혼의 관에 진입하자면 결국 군을 넘어야 한다. 은밀히 넘든, 싸워서 넘든지 말이다. 그에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쯤이면 슬슬 이동을 시작했을 겁니다.”

“황제 폐하를 움직인 것 말입니까?”

“현재 마스 군과 대치 중인 검왕이 움직이면 마스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그사이 일을 끝내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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