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831화


1266화

누가 들으면 심부름 얘기인 줄 알겠다.

그 정도로 라울의 말은 매정하리만치 간단했다. 뭐든 말이 가장 쉽기는 하지만, 목숨을 건 전투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흐음. 보통 사안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풀릴까요?”

“그래서 다 상황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누가? 바로 제가 말입니다!”

헛바람 가득 든 정치인처럼 턱을 치켜올린 모습이 상당히 꼴불견이다.

“……사기꾼?”

“어허! 사기꾼이라니요!”

누군가 속닥거리는 소리는 또 어떻게 듣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라울이다.

앞의 모습에 더해 그런 모습이 신뢰를 주긴커녕 의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굳이 그걸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라울의 계획대로만 된다면야 어려울 게 없었다.

게다가 그의 말 자체가 틀린 것도 아니다. 황제를 통해 검왕을 움직인다면, 그와 대치하고 있는 마스 군도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할 테니까. 그리고 그건 아마 검왕을 견제하며 그를 따르는 형태일 터였다.

자연히 영혼의 관이 있는 뒤가 허술하게 비게 될 테니, 일행은 그 틈을 이용하면 된다.

큰소리 뻥뻥 치는 라울의 모습이 꼴 보기 싫기는 하지만, 굳이 그걸 막을 정도로 헛소리를 한 것도 없다.

해서 라울을 제외한 사람들은 가만히 그의 작전 계획을 들었다.

사실 그 자체는 복잡할 것도 없었다. 자세하게 짜려고 해도, 영혼의 관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영혼의 관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계획은 있지만, 그 이후는 그야말로 임기응변.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풀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비를 마친 일행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자 이드와 일행들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은색 기사단과 플레타 부대를 이끌고 곧장 블레인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루트였기에 길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일행의 발길을 느리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산길을 평지처럼 달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중간중간 짧은 휴식 시간, 그리고 라미아의 회복 마법까지 더해졌으니.

가끔 운 나쁘게 마주치는 몬스터 몇 마리를 베어 내며 달리기를 수 시간.

새벽이 밝아 오기까지 네 시간 정도 남았을 때,

일행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적지였던 영혼의 관에서 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어느 이름 없는 산꼭대기에 멈춰 선 것이었다.

휘이이이-

차가운 바람이 정상을 휘감고 지났다.

그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곧 벌어질 전투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아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침묵한 상태로 한 사람을 돌아보고 있었다.

정상의 분위기가 유독 음산한 이유는 절대 차가운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들의 불신 가득한 눈초리 때문이었다.

처음 말문을 연 것은 이드였다.

“설명해 보시죠?”

“그렇게 자신하더니,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마스가 검왕을 따라 군을 움직였을 거라며? 영혼의 관 근처가 빈다며? 그럼 저기 있는 것들은 뭔데?”

검후와 플레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세 사람처럼 대놓고 말만 하지 못할 뿐. 지위고하를 떠나 눈에 불신과 의심이 그득하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사기꾼을 노려보는 피해자의 눈빛. 사실이 그러했다. 라울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달려왔는데, 눈앞에 보이는 게 군진 사이사이 밝혀 놓은 모닥불이라니.

심지어 그 개수가 최소 수십 개는 될 것 같지 않은가.

다시 말해 마스 군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 기가 막힌 것은, 마스에서 한참 떨어진 저 먼 곳에서 작게 보이는 불빛들.

“마스만이 아니라, 검왕 쪽도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철수하지 않았어요.’

“・・・・・・・ 이런 미친놈들. 왜 여기 있는 건데!”

사실을 재확인해 주는 오탄의 말에 라울이 결국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어 냈다.

“그걸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아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은..”

재차 추궁하는 검후지만, 라울이라고 딱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사실 현재 이 자리에서 가장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사람을 뽑으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라울이었다.

당연히 검왕이 물러나고, 마스도 그를 따라 움직였어야 했는데.

마스는 고사하고 검왕조차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설마…

하셨을리는 없겠지요. 암요. 다른 분도 아니고 검후께서 직접 행차하시는 일에 얼마나 신경을 쓰셨겠습니까.”

“황제께서 제 요청을 무시.. “

황제에게서 일차적 책임을 찾으려던 라울은 심상치 않은 검후의 눈빛을 보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

말을 하고 보니 그랬다. 황제와 검후는 이미 화해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 황실의 제일 큰 어른이 직접 나선 작전을 허술하게 처리할 리가 없다. 그때 이드가 마스 군 넘어 저 멀리 떨어진 불빛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검왕이라는 거겠지요. 황제께서 내린 명령을 무시하고 저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그이니.”

“이런 미친 인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비집고 나왔다.

지금 검왕의 행동은 명백한 항명이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명령에 대한 항명. 어쩌면 누군가는 반역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반역이었다. 돌아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무시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검왕의 이런 행동은 존 워스가 정신의 관에서 일으킨 사건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정신의 관에서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는 결국 기사와 병사들 정도. 결과적으로 토벌은 잘 마무리되었다. 이후 출석하여 해명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긴 했지만, 결국 그뿐. 종합적으로 보면 우발적인 사고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존 워스의 초인 혐오는 워낙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철수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무시한 검왕의 행동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단순한 사고나, 감정적인 사건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히 말해 명령 체계를 무시한 처사이며, 정치적인 항명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저 미친놈은 무슨 생각인 겁니까. 철벽의 검왕이 벌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인간이 황제 폐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라울이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그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답답해서 해 본 소립니다. 답답해서. 그래도…… 혹시 저 검왕이 왜 저기 있는지 짐작이 되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를 가장 잘 아는 이는 검후님 아니겠습니까.”

“라울 자작님. 그런 말씀은…….”

“괜찮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으냐.”

중간에 끼어드는 쉴라를 검후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이드 옆으로 다가섰다.

“명예 후작. 뭐가 좀 보이십니까.”

‘보일 리가 있나.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뜬금없는 검후의 물음에 라울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저 멀리 희미한 불빛도 밤이기에 볼 수 있었지, 만약 낮이었다면 저곳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마스가 왜 움직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한참 궁리해야 했으리라. 하지만 이런 라울과 사람들의 생각을 비웃듯, 이드가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검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사들과 기사들은 보입니다. 복장은 분명 아나크렌의 것이고요.”

‘……그게 보인다고? 어떻게?’

믿을 수 없는 말에 몇몇 기사와 초인들이 내공과 초인력을 끌어 올려 눈을 부릅뜨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에 관심 가질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기만책도 아니라는 말이로군요.

사람이 남아 있는 척 불을 피우고 은밀히 철수를 시작했을 경우, 마스에서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지금 이드의 말로 사라졌다.

검후는 가만히 서서 이드의 눈이 향한 곳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런 검후의 모습에 모든 이들이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검왕은 커다란 야망을 품고 있지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명분에 굉장히 집착하는 편이기도 하지요. 사실 그가 지금처럼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는 건 쉽게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검왕이 평소의 그와 달리 행동할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패턴이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그걸 패턴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 돌아보면 동료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동료라면, 삼검왕의 두 사람 말입니까?”

검왕에게 있어 동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검후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이드의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검왕의 이런 행동에 존 워스가 연관되어 있을지 모르겠어요. 마르텔도 가끔 엉뚱한 짓을 하지만, 그의 성격상 이런 복잡한 일이 낄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존 워스는 달라요. 그는 대부분 조용히 검왕의 결정에 따르지만, 가끔 의견을 내놓기도 하죠. 검왕도 그때는 존 워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존 워스라면 당연히 확인을 해야지.”

이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조금 목소리를 높여 검후를 향해 말했다.

“확인할 것이 있어 잠시 실례를 좀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드가 라미아와 일리나에게 눈짓을 하고는 옆의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사람들의 눈길이 사라진 걸 확인한 이드가 그대로 하늘 높이 뛰어올라, 하늘을 달리기 시작했다.

부운귀령보.

흐릿한 귀신 그림자가 저 멀리 하늘을 날았다.

하늘을 달리는 이드의 앞에 거칠 것은 없었다. 검왕이 진을 친 곳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아래쪽에서 기척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그중 눈이 가는 기운은 하나.

물이 가득 찬 댐 같은 기운. 호수처럼 잔잔한 내력의 주인. 바로 검왕이다. 그 외의 기척은 없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혼돈의 파편이라면 이드의 기감을 피할 수도 있다.

이드는 곧바로 차원의 인을 꺼내 들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