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32화
1267화
차원의 인은 조용했다.
혼돈의 파편이 있었다면 벌써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흐음.”
그에 잠시 고민하던 이드는 곧 증폭기를 꺼내 들었다. 증폭기의 사용 횟수가 아깝기는 하지만, 라미아의 말대로 쓸 땐 아끼지 말고 써야 했다. 검후에게서 존 워스의 이름이 나온 이상,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쩝. 아깝네.’
그러나 아쉽게도 증폭기는 팔목 주변을 회전할 뿐 반응이 없다. 바로 달려왔는데도 이미 늦은 걸까.
그게 아니면 검왕의 이번 결정에 존 워스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직접 방문하지 않고 통신구를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진짜 그가 관계된 일이라면 그런 걸로 떠들 정도로 가벼운 일이 아니긴 한데. 아, 모르겠다.’
이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검왕이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아직 이곳에 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존 워스가 이곳에 없는 것은 확실해졌다.
혼돈의 파편이 없다면 이제 이곳에 더 볼일은 없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이드는 문득 막사 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발아래 검왕이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그 존재는 이드에게 하등 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저런 사건 뒤에 숨어 있는 흑막 중 하나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후에도 그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제국에 해가 될 인간이라는 건 분명하다.
다른 걸 다 떠나고라도, 소드 팰러스를 파내서 제국에서의 독립이라는 야망을 품고 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그것에 대해 딱히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제국의 명예 후작이긴 하지만, 그뿐. 딱히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대신 많은 제국인들과 친분을 쌓기는 했다.
거기에 검후를 배신한 원수이며, 현재도 서로를 죽고 죽여야 하는 관계에 있는 것도 사실.
차라리 여기서 저 검왕을 처리해 버리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검후가 한결 편해지지 않을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 이드는 잠시 일라이져를 만지작거렸다. 검후를 배신하고 모른 척하던 뻔뻔한 얼굴이 떠오르자 제법 마음이 혹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역시 내 몫은 아닌 거지?”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젓고 만다.
분명 지금 검왕의 숨을 끊어 두면 두루두루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검후의 실망은 크리라. 검왕의 목을 가장 베고 싶어 할 사람이니까.
그녀라면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검으로 검왕의 목을 날리려 할 것이다. 즉, 지금 자신이 검왕을 처리해 버린다면 오히려 검후의 원망을 받을지도 모른다.
왜 자신의 몫을 빼앗아 간 것이냐고 말이다.
“자고로 남의 집 가정사에는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물론 엄밀히 말해 검후와 검왕이 가족은 아니지만, 군사부일체라 하지 않던가.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 사이였으니 그리 말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해서 이드는 결심했다. 검후가 대놓고 검왕의 목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바에야 먼저 손을 쓰지는 않겠노라고.
“내가 다시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것이오, 검왕.”
물론 검왕으로서는 이드가 다녀갔는지도 알지 못하니 기도할 기회도 이유도 없겠지만, 아무튼, 이대로 돌아갔다가 다시 올 일이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검왕이 죽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들과 함께 막사를 내려다보던 이드가 이내 멀리 산 정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스르르륵,
그와 함께 이드의 모습이 허공에서 지워졌다. 부운귀령보의 공능이었다.
그렇게 검왕의 막사 상공에서 사라진 이드는 잠시 후 일행이 모여 있는 정상에 다시 나타났다. 사라질 때처럼 나무를 헤치고 나온 이드의 곁으로 라미아와 일리나, 그리고 검후가 다가섰다.
“증폭기, 사용한 거죠?”
“아깝게도 허탕이었지만.”
“제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닐까요?”
증폭기가 무언지 들어 알고 있는 검후가 자책하자, 이드는 쓸데없는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 쓰라고 만든 증폭기라고 써야 할 때 쓰지 않을 물건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오히려 잘 말해 줬어.”
“그런데요, 이드, 증폭기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면 영혼의 관에도 혼돈의 파편이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검왕의 막사에서 영혼의 관까지 거리는 대략 십 킬로미터.
증폭기를 더하면 아슬아슬하게 탐색 범위 안에 걸쳤다. 그러니 반응이 없다는 건 그 안에 혼돈의 파편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일리나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혼돈의 파편이 어떤 놈들인데요. 항상 저 안에 들어앉아 있지는 않지 않겠어요? 정식으로 한자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임승차 중일 텐데. 계속 숨어 있지는 못할 거예요.”
그게 아니라도 영혼의 관 자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마법을 처발라 두고 있다. 그런 마법 중에 증폭기의 출력을 떨어트리는 요소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 정확한 건 영혼의 관에 진입해 봐야 알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게 아니라도 영혼의 관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하면 뭐라도 반응을 할 겁니다.”
“정신의 관 때처럼요?”
“그런 거죠.”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랬다. 분명 처음엔 그 안에서 혼돈의 파편이 탐색되지 않았다.
그러다 토벌 막바지에 가서야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그걸 보면 어떤 식으로든 관의 상태를 살필 방법을 마련해 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제국 측 진영으로 가 봤는데.”
힐끔.
말문을 연 이드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검후의 고개가 갸웃한다.
“기사들뿐 아니라 검왕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고.”
“그렇겠죠. 검왕이 아니고서야, 황제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당장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걸요.”
사실 검왕이 있어도 그렇다.
황제의 명령이 철수라면 당장 철수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검왕이 철수 시기와 방법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없이 기사들뿐이라면 더더욱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알지. 그래도 검왕만 있는 걸 알고는 좀 망설였다. 아예 여기서 처리해 버리는 편이 여러모로 낫지 않을까 싶더라고.”
“…….설마 놈의 목을 베고 오신 건 아니시죠?”
순식간에 살얼음이 끼듯 사늘하게 굳어지는 검후에 이드는 역시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처리해 버리면 어떨까 싶었다고. 그런데, 어쩐지 네가 이렇게 나올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왔지. 어쨌든 검왕은 네 몫이잖아.”
“……감사해요..”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내가 한 번 더 다녀올 수 있는데.”
“어림도 없어요. 방금 그놈의 목은 제 몫이라고 해 놓으시고는, 꿈도 꾸지 마세요.”
어느새 표정을 푼 검후가 강아지처럼 앙앙거린다. 내 것이니 탐내지 말라는 듯.
“뭐지?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역시 볼일을 보고 온 건 아닌 거 같지?”
“……당연한 소리를.”
플레타의 말에 라울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는 양 쏘아보았다. 이 시점에 볼일이라니.
사람인 이상 먹고 싸는 거야 지극히 정상적인 신체 활동이지만, 이 중요한 시점에 자리를 비울 정도로 조절하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 뭘 것 같아? 자리를 비운 시간도 짧지 않은데.”
“아마도 살피고 온 거겠지.”
“살펴? 뭘?”
복잡하게 말꼬리 늘이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 보라는 듯한 플레타의 재촉에 라울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눈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발동된 초인기 골든아이에 불가 주변을 서성이는 아나크렌 제국의 기사들이 보였다.
존 워스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갑자기 자리를 비운 이드다.
그리고 존 워스는 혼돈의 파편과의 관계가 의심되는 인물. 이미 혼돈의 파편을 쫓고 있다고 밝힌 이드라면 그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이 산 정상에서 제국의 막사까지 제법 거리가 있고, 또 중간에 마스 군도 있지만, 라울은 이드의 실력이라면 그런 것들은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골든아이로 열심히 살피기도 했지만,
‘정말 다녀온 것이 맞나? 어째서 골든아이에 명예 후작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거지?’
스스로 짐작한 사실에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은 그 증거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플레타에게 정확히 답해 주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당장 중요한 일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 검왕이 저렇게 주저앉아 있으니….?’
라울은 제국 측 막사 하나하나를 살피며 벅벅 이를 갈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큰소리를 뻥뻥 쳐 놨는데, 막상 도착하니 저 노망난 검왕 때문에 자신의 말대로 된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망신도 망신이지만 저 마스의 군을 어떻게 넘어 영혼의 관을 공략해야 할까. 라울은 복잡한 머리를 애써 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내놓은 작전이 실패했으니, 최소한 대안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궁리에 빠진 라울을 향해 이드가 다가왔다.
“일단 라울 자작님의 작전은 실패한 것 같은데. 대안은 있습니까?”
“・・・・・・ 면목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자가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라울에서 검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 폐하를 통해서 다시 한번 재촉하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검왕이 거역할까요.”
“저 검왕이 항명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무어라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희 입장에서야 항명이지만, 검왕이 철수 작전을 세웠고 시기를 보고 있다고 답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집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말 그대로 아직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철수를 준비 중이라고 하면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검왕과 추적대는 현재 마스의 군과 대치 중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 무작정 등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걸 이유로 적당한 시간을 보고 있다면 당장 반역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황제 폐하를 통하는 방법은 큰 의미가 없겠고.”
“이대로 마스의 군을 피해서 영혼의 관에 침입하는 건…………….”
“곤란합니다. 영혼의 관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마스 군이 당장 달려올 겁니다.”
슬쩍 말을 꺼낸 플레타에 라울이 딱딱하게 말투로 일축했다.
“제가 괜히 검왕을 움직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스 군을 영혼의 관에서 떨어트려 놔야 합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라울의 말에 이드가 저 멀리 제국의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