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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34화


1269화

벌떡.

잠들어 있던 타란 백작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선명하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 때문이었다.

“누구냐.”

“피오입니다, 주군. 죄송하게도,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새벽이 먼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

“제국 측 진지에 움직임이 발견되었습니다.”

“뭐라?!”

반쯤 몸을 세우던 타란 백작이 덮고 있던 이불을 떨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한쪽에 걸린 망토를 대충 몸에 걸치고는 급히 막사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자 문 앞에 피오 단장과 함께 그 뒤로 뿌옇게 번진 듯한 불빛들이 보였다.

“안개? 언제부터 낀 것인가.”

“좀 전부터 나타났습니다. 저희 근처뿐 아니라, 인근에 넓게 퍼진 것 같습니다.”

“그럼 제국 측 진지는? 아니, 내가 직접 가서 보겠다.”

시야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에 인상을 쓰던 타란 백작은 곧장 경계 초소를 향해 움직였다. 나무를 베어 만든 초소 아래에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내려와 있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백작은 그들의 인사를 받아넘기고는 초소로 올라갔다. 하지만 안개에 가려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타란 백작의 뒤를 따라온 피오 단장이 말했다.

“지금은 안개 때문에 불빛이 가려졌지만,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안개가 끼기 직전 제국 측 진지의 불빛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잘 못 본 것은 아니고?”

“병사들의 보고로 당직 기사까지는 확인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안개가 빠르게 끼기 시작해 저까지 확인하진 못했습니다만.”

병사들이 아니라 기사까지 보았다면 착각일리는 없다. 피오 단장의 말은 그런 의미였다.

거기에 동의하는 건 타란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야 힘든 밤샘 임무에 잘못 볼 수도 있고 불빛의 흔들림을 착각할 수도 있지만, 내력으로 밤눈을 밝힌 기사가 잘못 볼 일은 없다. 안개 너머를 향한 타란 백작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설마, 안개가 낄 것을 미리 알고?”

“우연이 아닐까요? 이곳에 안개가 끼는 것은 저희도 몰랐습니다.”

“장담할 수 없지. 검왕이 무슨 재주를 부렸을지 어떻게 알겠나.”

“…….”

검왕의 이름이 대단하긴 했다. 부정하던 피오 단장이 입을 닫았다.

타란 백작이 그런 피오 단장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명령했다.

“자네는 지금 바로 기사와 병사들을 준비시키게.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어.”

“그러실 것 같아 명령을 내려 둔 상태입니다.”

피오 단장의 대답에 그제야 소란스러운 진지 안의 소음들이 귀에 들어오는 백작이다. 그는 잘했다는 듯 피오 단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곧장 초소를 내려갔다.

“그럼 나도 서둘러 준비를 해야겠어.”

“주군께서 직접 나가시려고 하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저쪽에는 검왕이 있습니다. 자칫 위급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사들을 이끌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이네.”

타란 백작이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저었다.

“예?”

“갔다 오겠다는 자네의 그 말이 틀렸단 말이야. 가서 검왕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추적을 시작해야 해. 그리고 검왕이 있다면. 해야지. 그러자면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네. 검왕과 대화를 하려면 최소한 급을 맞춰야 예의가 아니겠나.”

전투를 코앞에 두고 대치한 상태에 예의랄 것이 있을까만은, 타란 백작의 생각은 달랐다. 혹시 병사와 기사가 잘못 본 것이라면? 검왕이 제국의 진지에 그냥 있다면?

있는 대로 대처를

그런 경우 기사들만 보냈을 때는 전투가 벌어지겠지만, 자신이 있다면 대화로서 상황을 무마시킬 수도 있다. 타란 백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에 비례해 위험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변경백의 자리는 지키지 못한다.’

어느새 막사 앞에 이른 타란 백작이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그리 알고 준비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갑주와 검을 가져와라.”

“예? 옛!”

막사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허둥지둥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타란 백작이 망토를 풀어내며 그 뒤를 따르자 피오 단장이 긴 한숨을 내쉰다. 그에 옆에 있던 타란 기사단 소속의 기사 하나가 어정쩡한 자체로 그를 돌아 보았다.

“단장,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 뭘 어쩌나. 주군께서 이미 정하신 일이야. 명하신 대로 준비시켜. 기사단과 병사들에게도 알리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영지에서도 항상 저희와 함께하셨던 주군이시지 않습니까.”

“나도 안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저쪽에 검왕이 있지 않나.”

“・・・・・사실 그 이름이 좀 무섭긴 합니다.”

무섭다. 감히 상사를 앞에 둔 기사가 적에 대해 쉽게 꺼낼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검왕은 그런 말이 나오도록 만드는 존재였다. “천하의 타란 기사단의 기사가 무섭다니. 헛소리 말고 빨리 가!”

“충!”

기사가 달려 나가고, 막사 앞에서 얼마를 기다렸을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막사가 다시 열리고, 타란 백작이 나타났다. 앞서 망토만 둘렀을 때와 달리 파츠 아머와 검을 꼼꼼히 장비해 완벽히 전투태세를 갖춘 모습이다.

“준비는?”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끝났습니다.”

“말은?”

“안개가 심해 말은 위험합니다.”

“그래도 마련해 두게. 정말 검왕과 제국의 기사들이 진지를 비운 것이라면 곧장 추적에 나서야 해.”

“그렇다면 간단한 군장도 함께 준비시키겠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10분입니다.”

“그럼 말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본대는 먼저 출발하지. 한시가 급하다.”

명령과 함께 타란 백작은 진지 앞에 모여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 앞으로 나섰다. 이미 무슨 상황인지 전파가 끝났기에 기사들은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잠시 후 전투가 시작될 수 있음을 인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겁먹은 기색은 아니다. 자칫 검왕을 마주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저 앞에 자신들의 주군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군을 앞에 두고 겁을 먹는다니. 그래서야 당장 기사를 때려치워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신속하고 은밀히 움직인다. 목적은 결코 전투가 아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전투로 이어질 수 있다. 1열은 기사들이 2열은 궁수, 그리고 3열은 창병들이 선다. 전진 중에 대열을 맞춰라. 가자!”

쿵쿵.

타란 백작이 ‘은밀히’라 했다.

그렇기에 대답은 없었다. 대신 작게 발을 구른 기사들이 타란 백작의 뒤를 따랐다. 그중 몇몇 기사들이 뒤로 빠져 병사와 궁수들을 지휘했다. 그렇게 타란 백작과 마스의 군 전력이 막 진지를 나서는 시각.

검왕은 막사를 나와서 서둘러 전투를 준비 중인 기사들을 보다 안개 너머 마스군이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안개를 틈타 공격을 해 올 줄이야. 타란 백작, 듣던 것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나?”

물론 그래 봐야 자신들의 붉은 뿔. 마르텔보다 급하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왕은 이런 타란 백작의 성급함이 결코 싫지 않았다. 아니, 내심 바라던 바였다.

“카논과 아나크렌의 전쟁이면 우리가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나?”

전날 떠난 존 워스의 말이 귓가에 생생하다. 곧장 뭐라 답해 주지는 못했지만, 존 워스의 그 한마디에 자신의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는 사실은 그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남은 자신의 행동이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는 것이지만.

“그나저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끌끌.”

검왕은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

철수 명령을 받았지만,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으니까. 물론 항명으로 인한 문제 정도는 어떻게든 해결할 자신이 있는 검왕이었다.

하지만 항명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단순히 명을 따르고 말고를 떠나 황제의 감정이 상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감정의 문제는 단순 항명보다 더 심각했다.

과열된 감정은 때때로 사람을 매우 비이성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감정적으로 나오면 누가 그걸 막을 수 있겠는가.

물론 검왕은 그런 반응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극한의 대립은 서로를 자연스럽게 갈라놓을 테니까. 그것이 바로 검왕이 바라는 바이고.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지금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적으로 인해 사라졌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후 하루.

그 시간이면 항명이라는 죄목도 아직 언급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불꽃이라도 제대로 타오르게 만들어야겠지.”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알려 오는 기사에 검왕이 성큼성큼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전신 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좋군. 모두 싸울 준비는 끝났나?”

“충!”

“좋다. 아무래도 우리와 마주하고 있던 친구들의 인내심이 오늘 다한 것 같다. 저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적을 피해 우리는 반대쪽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으득…… 죄송합니다.”

문득 우그라임이 한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죄송할 일이 무엇인가?”

“저희가 고작 마스 놈들로부터 검왕님을 도망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검왕님 홀로셨다면 감히 저 마스의 멍청한 놈들도 검을 들고 달려오진 못했을 것입니다. 저희가 검왕님의 위명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조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가만히 듣고 있던 기사들도 이를 악물었다. 과연 우그라임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검왕은 그런 우그라임의 모습에 자신의 기사와 눈빛을 나눈 후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는 우그라임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아무래도 자네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그리고 그건 자네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고. 누가 도망이라고 하던가?”

“……예?”

“나와 자네들이 하려는 것은 결코 후퇴나 도망이 아니다. 공격이다. 우리가 저들을 피해 이동하는 건 좀 더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을 찾기 위해서다. 적의 숫자는 우리보다 많다. 그렇다면 멍청하게 정면 대결을 해서야 되겠는가. 기사는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한다.”

“……머리를…………… 그럼?”

“모두 각오하도록. 게릴라전이다. 꽤 긴 전투가 될 것이다.”

“오오!”

누가 봐도 제국의 열세다.

하지만 검왕의 존재 때문일까. 그에 대해 전혀 위축된 모습은 없다. 오히려 검왕과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라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양측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산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완벽히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는데요.”

사람들 앞에는 라울이 만들어 낸 영상 두 개가 떠 있었다. 그 영상의 중앙에 있는 사람은 각각 타란 백작과 검왕.

그들의 그 모든 말과 행동은 처음부터 이드 일행이 쭉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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