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35화
1270화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돌아본 이드.
거기엔 팔짱을 낀 비올라가 영상 속 검왕과 타란 백작을 향해 오만하게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이드는 영상과 비올라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우습냐?”
“우습죠. 천하의 검왕이 저렇게 멍청했다니. 간단한 속임수에 저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잖습니까.”
산 위에서 내려가 보고 있어서일까. 비올라는 상대를 격하로 취급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저 검왕을 말이다.
면전이 아니라도 그를 바보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할까? 하물며 검후조차 검왕을 그렇게 취급하진 않는데 말이다.
“보세요. 초인기로 환상 만들고, 안개 뿌리고, 또 초인기로 그럴듯한 기척 좀 만들었다고 몽땅 속아 넘어갔잖아요.”
이런 작업에 투입된 초인들이 하나같이 바벨의 정예들이고, 마법을 담당한 것은 라미아이거늘.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개.
“그럼 넌 저 안개를 보고도 의심할 거란 말이지? 사방 수 킬로미터를 뒤덮는 안개를 본 순간 이건 마법이다! 하고 소리칠 자신이 있다는 소리지?”
“……”
“그래. 라미아의 포그 폴 마법을 보고 턱이 빠지게 입을 벌린 당사자면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지. 그렇지?”
“……”
대답은 없다.
대신 오만하게 꼬고 있던 팔짱을 푼 비올라가 슬그머니 쉴라 뒤로 숨었다. 사내놈이 비겁하게 여자 뒤로 숨다니.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언제 저렇게 가까워졌나 싶을 뿐이다.
‘여기 일이 끝나면 스폴을 잡고 한번 물어봐야겠다.’
이드는 그렇게 뒤에 해야 할 일을 하나 정해 놓고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안개의 바다뿐이다. 그 속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마스의 군이 들고 움직이는 불빛 정도.
이드는 안개를 꿰뚫고 그 아래 타란 백작과 그의 병력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속도가 너무 느린데, 저쪽도 급해 보이지 않고.”
연이어 제국 쪽 진지를 바라본 이드가 말했다.
“좀 더 속도를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가 뜨기 전에 최소한 영지 밖으로는 밀어내야 할 것 같은데요.’
해가 뜨면 안개도 거둬야 한다.
그 전에 서로가 멈추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점점 영혼의 관과 멀어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해가 뜨려면 3시간이 채 남지 않은 상태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스의 진군 속도를 높일 수 있도록 길목을 정리시키겠습니다.”
“전 안개를 거둬서 시야를 넓힐게요.”
이드의 말에 라울과 라미아가 바로 반응했다.
라울은 골든 아이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초인들을 움직였고, 라미아는 자신의 포그 폴 마법을 조종해 타란 백작의 시야를 트여 줬다.
그래 봤자 한정적이었지만, 안개 속에 숨어 있는 초인들은 여전히 철저히 감춘 상태였다.
그녀의 포그 폴 마법은 시야를 가릴 뿐 아니라 기척을 차단하는데도 대단한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초인들이 그 속에 숨어 마스와 제국 진지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던 것이다.
“바람에 안개가 잠시 흩어진 듯하다. 이 틈에 최대한 속도를 높인다!”
이렇게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자 타란 백작이 이끄는 병력의 이동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제국 측은 여전히 느긋하다.
아직 검왕과 그의 기사들은 진지조차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짐을 챙기고, 세워 놓았던 설비 따위를 부수고 있다.
과연 적을 코앞에 두고 저럴 여유가 있는가 싶지만, 검왕의 행동은 여유로웠다.
“아무래도 마스의 군을 본 뒤에 움직이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이러면 저희가 만든 기척만으로 저들을 몰아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검왕으로 하여금 마스의 군이 공격해 온다고 착각하게 만든 기척.
그건 모두 바벨의 초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즉, 실체가 없는 가짜라는 말이다. 진짜는 아직 수 킬로 떨어진 상태로, 열심히 거리를 좁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이 이상 기척을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것도 어렵다.
“그랬다간 자칫 검왕이 눈치를 챌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속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니까요.”
이드는 곤란해하는 라울에 고민 없이 손을 들었다.
“음. 그럼 그건 제가 해결하죠.”
“명예 후작님께서 어떻게…….”
“일단 보시죠. 라미아, 화살이 좀 필요한데.”
“마스 궁병들이 사용하는 화살이면 되는 거죠?”
“정확해.”
화살의 형태는 대륙 어느 나라를 가던 비슷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모양이나 디테일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정신이 없다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검왕이라면 분명 알 것이다.
그러니 라울의 말처럼 미리미리 주의할 부분은 조심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이런 이드의 요구에 라미아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마스의 진지에서 화살 한 묶음을 간단하게 전송해 왔다.
어차피 텅텅 빈 진지였기에 화살이 사라진 것을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라락.
“여기요.”
“고마워.”
이드는 라미아가 건네는 화살 한 줌을 받아 들고는 산 정상 끄트머리로 가서 섰다. 그 모습에 비올라가 반짝이는 머리를 쓰다듬고는 물었다.
“설마 여기서 그걸 던질 생각은 아니시겠죠?”
“왜 아닐 것 같아?”
“아니・・・”
• 화살로 겁을 주려는 거면 아래 내려가 있는 사람들에게 쏘도록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각도 자체가 다르니까.
“그래도 되지. 하지만 이건 단순히 겁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야.”
슈르르르르-
말과 함께 화살 하나가 이드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을 시작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끝에 달린 화살촉이 묘하게도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할까.
하나 그건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펄떡펄떡.
화살촉을 시작으로, 화살은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펄떡였다. 언제부터 화살이 살아 있는 생물이 되었던가.
여기저기서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중에 이드가 목표물을 찬찬히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 목표는 명중이야. 단순히 겁을 주는 수준을 넘어서 검왕이 부상을 입도록 만드는 거지.”
“여기, 이 거리에서요?”
“어.”
“화살로?”
“그래. 문제 있어?”
누가 들으면 목표가 수 킬로미터가 아니라 수 미터 앞에 있는 줄 착각할 것 같은 이드의 당당한 태도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비올라는 일단 꾹 참았다.
“……그런데, 꼭 검왕을 노리는 이유가 있습니까? 술래잡기하도록 하는 게 저희 목적 아니었습니까? 상처를 입으면 오히려 싸우자고 덤빌지도 모르잖습니까.”
검왕 체면이 있지, 눈먼 화살에 부상을 당했다고 오히려 자존심 상해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러기엔 전력으로 너무 밀리잖아. 거기다 방금 들었겠지만, 게릴라전을 펼친다고 하는데, 이 근처에서 그러고 놀면 우리가 곤란하지 않겠어? 될 수 있으면 멀리멀리 가서 싸워 주는 것이 편하지.”
아무리 사소해도 부상을 당하면 조심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그렇지 않아도 전력이 밀리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할 터였다.
그렇게 부상을 회복한 후 싸움을 시작하려면 제법 시간을 벌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자연히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하게 될 게 아니겠는가. 물론 포션을 사용했을 때는 이 거리가 좀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 닥치고 가만히 보고 있어.”
“넵.”
그렇게 비올라의 입을 닥치게 만든 이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화살의 방향을 잡아 갔다. 옆에서 봐서는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은 미묘한 변화. 하지만 그 미세한 각도의 차가 수 킬로미터를 날아간 후에는 얼마나 벌어질지, 화살을 한 번이라도 쏴 봤다면 모를 수가 없다.
그렇게 목표에 대한 정확한 각도가 잡히는 순간.
슈슈슉!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이드의 손바닥 위에 있던 화살이 사라지듯 쏘아져 나갔다. 그건 하나가 아니었다.
슉! 슈슈슈슈슉!
모두 합해 여덟 개. 이드가 쥐고 있던 모든 화살이 쏘아지는 데 걸린 시간은 눈 세 번 깜빡일 정도면 충분했다.
“・・・・・・ 저건 무슨 무공일까?”
“화살을 저렇게 쏠 수 있으면 이제 활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겠어.”
“바보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서 검왕을 맞춘다고 하셨잖아. 그 거리가 얼만지 알아?”
뒤에서 복잡한 마음이 깃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드는 멀리 날아가는 화살의 꼬리를 좇았다.
그와 함께 다른 사람들은 영상에 비치는 검왕과 기사들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 화살이 저기까지 날아갈까? 정말 검왕을 맞출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처음 이드의 손에서 사라진 화살이 제국의 진지 한가운데 떨어진 것이다.
“왔다!”
“화살이다. 막아라!”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영상 속 검왕의 크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나머지 일곱 개의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나머지 화살들은 거의 동시에 그 주변에 있는 기사들을 노렸다.
티팅!
처음 두 개의 화살은 검왕과 기사들의 검에 막혔다. 그와 함께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는 역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도 이건 어렵구나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감정이 채 자리 잡기도 전.
“아악!”
한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곧 그 뒤를 따라 불꽃이 번쩍이더니 검왕이 묵직한 신음 소리를 냈다.
“으음!”
“주군!”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과 발소리.
“헉…… 정말 검왕을 맞추셨어.”
아연한 목소리와 함께 영상 속 검왕은 어깨 깊숙이 박힌 화살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검왕의 모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기사들이 성벽처럼 단단히 검왕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거지?”
눈을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한 누군가의 말을 들은 것일까.
라울이 손을 까딱거리자 영상이 변했다. 그건 화살을 맞기 전 검왕의 모습이었다. 그는 막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화살을 검으로 걷어 내고 있었다. 그 순간 영상은 매우 느릿하게 흘렀다. 느려진 영상 속 검왕의 검은 화살의 화살촉을 정확히 베어 내고 있었다.
화살이 통째로 반으로 갈라질 찰나.
빙그르르,
마치 화살이 살아 있는 듯 펄떡이며 화살촉이 회전했다. 그건 마치 검술의 와자결을 보는 것 같았다. 검날을 타고 회전한 화살은 방향을 살짝 틀어 검왕이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그의 어깨에 틀어박힌 것이다.
“저게…… 가능하구나.”
누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