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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36화


1271화

“나도 지금부터 활이나 익혀 볼까?”

“그만둬! 저런 건 원래 불가능해!”

“내 초인기면 괜찮지 않을까?”

“・・・ 아니야. 안 괜찮아. 꿈깨!”

산 정상이 일순간 어수선해졌다. 눈앞에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왕을 맞췄다.

대륙 전체를 뒤져도 한 손에 꼽히던 강자. 그런 검왕을 수 킬로미터 밖에서 명중시킨 것이다. 원래라면 수 킬로미터가 뭔가. 코앞에서 쐈어도 맞출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기사나 초인들 가운데도 눈앞에서 쏘아진 화살을 막을 수 있는 실력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무려 검왕이다. 아마 쏴 보기도 전에 목이 잘려 나갈 것이 분명했다. 헌데 현실은 어떤가. 코앞은커녕 이 먼 거리에서 화살을 쏴 명중시키지 않았나.

지켜보던 이들은 갑자기 활이란 무기가 위대해 보이기 시작했다.

수 킬로미터 밖에서 화살을 날려 적을 죽일 수 있다면 무식하게 무기를 휘두를 이유가 있나 싶었던 것.

‘나도 열심히만 하면, 명예 후작님만큼은 아니라도 일 킬로미터 밖에서 한 방에 한 명씩 정도는!’

그들도 자신이 이드가 아니라는 건 안다. 알지만 욕심이 나고, 혹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욕심에 잠시 정신줄을 놓기 직전, 그래도 정상적인 동료들이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 줬다는 점일까.

그렇게 의도치 않게 한 발의 화살로 아군을 뒤흔들어 놓은 이드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또 한 번 화살을 쏘아 날렸다.

“라울 자작은 제국 측 진지 주변에 깔아 놓은 기척을 물려 주세요. 자칫 기사들이 성급하게 반격에 나서면 곤란합니다.

“이해했습니다.”

라울이 곧바로 통신을 연결하는 사이, 영상 속에서는 이드의 손을 떠난 화살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앞서와 달리 이드의 의지가 깃들지 않은 화살은 어느새 검왕을 둘러싼 기사들의 검에 막혀 아무도 맞추지 못하고 떨어졌다.

서걱. 서거거거걱!

“아, 아깝다. 조금만 옆이었으면 맞출 수 있었는데.”

“멍청아. 못 맞춘 게 아니라, 맞추지 않으신 거야. 그것도 구분이 안 돼?”

“우 씨, 나도 알거든? 한번 해 본 말이거든?”

어느새 놀람과 여유를 넘어 긴장까지 사라진 산 정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정상과는 반대로, 산 아래 영상 속 제국의 진지는 전의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불! 불을 꺼라! 불이 우리 위치를 알리고 있다.’

“소리를 죽여.”

“적 기척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화살로 우리 위치를 확인하고 물러나는 것 같습니다!”

우그라임의 명령에 기사들이 다급히 모닥불을 짓밟으며 상황을 보고했다.

그런 가운데 검왕이 안개 너머를 바라보다 어깨에 박힌 화살을 잡아 뽑았다.

“놈들. 설마 우리를 상대로 몰이를 할 생각인가.”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벌어진 살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검왕은 눈도 깜짝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기사들이 신속한 손길로 물과 포션을 붓고 붕대를 묶었다. 그리고 포션 한 병을 내밀었다.

“드십시오, 주군, 상처가 깊습니다.’

“지금 급한 건 상처가 아니다. 마스의 타란 백작. 이자가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설마 선공을 취할 줄이야.”

물론 바라던 바였지만, 그리고 안개를 틈타 접근한 시점에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 갑작스럽게 공격해 올 줄은 검왕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 텐데.

사실 검왕이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어깨를 찌른 화살. 적의 공격은 예상 범위였지만, 자신이 피를 볼 거라고는 티끌만큼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것.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피를 봤다는 사실이 마스의 선제공격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혹시 우리가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측한 것인가. 그래서?”

“주군. 어떤 식으로든 전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주군이 강건하셔야 기사들이 무사할 수 있습니다. 부디 우선 이 포션부터 드셔주 십시오.” 

홀로 생각에 빠진 검왕에 기사가 다시 한번 포션을 건넸고, 그쯤 되자 검왕도 두 번 거절하지 않고 단숨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응급 처치도 되었고, 이 정도 상처야 대단할 것도 없지만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옳다는 것 정도는 검왕도 알기 때문이다.

“후~ 즉시 움직여야겠다. 서둘러라.”

빈 병을 바닥에 던져 버린 검왕이 말하자, 기사들이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반격을 하는 것입니까?”

“반대다. 빠르게 후퇴해서 전장을 우리에게 유리한 곳으로 바꾼다. 정찰을 나온 놈들이 물러났으니, 곧이어 대군이 몰려오리라. 아무리 나라도 너희들을 모두 돌볼 수는 없다.”

“저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오직 주군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호위 기사의 말에 우그라임이 말을 보탰다.

“검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저희보다 검왕께서 무사히 돌아가심이 황제 폐하께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듣기는 좋으나 섣부른 말들은 그만두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나는, 그리고 자네들은 아직 저들에게 지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그만하고 서둘러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보아 둔 곳이 있으십니까?”

“내 기억으로 저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이동하면 다양한 크기의 산이 능선을 이루고 있더군. 그 아래 작은 숲도 있고. 소수의 인원이 몸을 숨길 곳이 많아. 대신 대군이 움직이기엔 불리한 지형이야.”

그야말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기엔 최적이란 말이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우그라임이 앞으로 나섰다. 그에 검왕이 말을 더 보태지 않고 허락하자 그는 성난 말처럼 땅을 박찼고,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뜨거운 전투를 즐길 수 있겠군.”

검왕은 가장 뒤에서 안개 너머를 한번 돌아본 후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후퇴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을 기다리는 용사의 그것처럼 당당해 보이는 어깨였다.

라울은 그 모습을 끝으로 영상을 거두며 혀를 내둘렀다.

“이야, 마지막 눈빛 보셨습니까? 직접 마주한 것이 아닌데도, 안광을 마주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괜히 검왕, 검왕 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 말・・・・・・ 날 들으라고 하는 소린 아니겠지.”

검왕에 대해 숨김없이 감탄을 늘어놓던 라울, 하지만 그를 향한 검후의 새침한 눈길을 마주하고는 잽싸게 말을 바꾼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깟 놈이 아무리 대단해 봤자 더러운 배신자일 뿐이죠. 그럼요. 그럼요.”

바벨 안에서도 정예라 할 수 있는 부하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은지, 전혀 부끄럼 없는 라울이지만. 사실 이런 그의 모습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영상 너머로 사라진 검왕을 대신해, 타란 백작과 그 뒤를 따르는 기사와 병사들을 살피기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상 속 타란 백작의 병력은 어느새 제국 측 진지까지의 거리를 절반이 넘게 줄인 상태였다.

보이지 않는 적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올바른 작전 태도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만큼 그의 마음이 급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렇게 서두르는 타란 백작의 태도는 이드 일행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양측이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상황은 금방 빠르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죠. 이미 화살 공격으로 공격을 확신한 제국 쪽과 달리, 마스는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텅 비어버린 진지를 확인하면 타란 백작도 다급해질 수밖에 없겠죠.”

이드가 쉴라의 말에 첨언했다.

그리고는 영상 속 타란 백작에게서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영혼의 관을 향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가 움직입니다.”

“통신 차단을 위한 장비를 든 요원들은 이미 영혼의 관 주변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부하들을 향해 이런저런 지시들을 바쁘게 내리던 라울의 말이었다.

그의 말처럼 마스 진지 근처에서 환영을 만들어 병사와 기사들을 착각하게 만든 초인들은 지금 자리를 옮겨 영혼의 관 주변을 둘러싸는 중이었다. 이런 인원은 그들뿐 아니었다. 제국 진지 근처에 있던 초인들도 이미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통신 차단 장비의 설치.

타란 백작과 검왕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면 이쪽에 신경을 쓰기 어려울 테지만, 그래도 혹시 정확한 상황을 알면 말머리를 돌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막기 위한 준비였다.

“즉석에서 나온 계획에 그런 준비까지 해 두신 겁니까?”

“하하하. 다른 분도 아니고 검후님을 모신 작전이 아닙니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요.”

“그렇게 말하기엔 한참 늦지 않았나?”

라울의 언급에 검후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런 검후의 반응에도 라울은 뻔뻔했다.

“어후~ 검후께선 유독 제게 빡빡하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는 약간의 실수일 뿐입니다. 누구나 하는 실수 말이지요.”

“하! 실수 두 번만 했다가는……………”

“두 번은 없습니다. 두 번은!”

“흥,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이드는 쉬지 않고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검후와 라울에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용서를 빌었다고 해도 감금당했던 사람과 감금했던 사람이 저렇게 말이 잘 통할 수 있는 것인지.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상당히 신기했다. 앙숙 같으면서도 잘 어울린다고 할까?

‘저러다 미운 정이라도 쌓이는 거 아냐?’

물론 딱 미운 정까지다. 그 이상은 생각지 않았다. 미운 정이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엔 두 사람의 나이 차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에이, 지금 이런 상황에 무슨………..?’

이드는 엉뚱하게 나가는 생각을 급히 수습했다. 아무리 그래도 라울과 검후라니. 검후가 알았다가는 칠색 팔색을 넘어, 칼춤을 출 일이다. 그렇게 어수선한 시간이 지나고.

“타란 백작이 제국 진지에 도착했군요.”

영상 속에서 타란 백작과 그의 병력이 제국 진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텅 빈 막사와 사라진 군장. 그리고 미미하게 열기가 남은 모닥불의 흔적까지. 

“놈들이 떠난 지 아직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부터 전력으로 추적에 나선다! 부관은 여기 남아 궁에 지금 상황을 보고한 후, 뒤를 따르라!”

“충!”

“가자!”

타란 백작이 바닥에 남은 흔적을 따라 말을 달렸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이 이상은 확인할 필요가 없겠군요.”

라울이 영상을 내렸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가 보죠. 영혼의 관으로”

이드는 말과 함께 산 아래를 향해 훌쩍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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