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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37화


1272화

이백의 검은 인형이 산을 내달리는 모습은 꽤 장관이다.

산을 쓸어내리는 그림자의 파도가 마치 산사태 같았기 때문이다.

미끄러지듯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그대로 마스 진지 한중간을 가로질렀다. 진지 안에는 일부 남은 병사와 기사들이 있었지만, 이드 일행을 막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아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기절하거나 잠든 상태로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드 일행보다 앞서 진지를 가로지른 초인들의 솜씨였다.

쓰러진 이들 중 싸움의 흔적이 있거나 죽은 이가 하나도 없으니, 앞서간 초인들의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는 증거다.

그렇게 진지를 지나자 이번에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그곳은 주인을 잃고 텅 비어 있었다.

“유령 마을이네.”

창백한 달빛 아래 생기를 잃은 마을의 모습에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마 유령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일까. 하지만 여기도 이번 일이 끝나고 영혼의 관이 사라지면 다시 주민들이 돌아오리라.

그렇게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마을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갔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나무 한 그루 없이 초라한 민둥산 하나. 민둥산 주변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

그야말로 두 번 돌아볼 것도 없는 버려진 땅.

그 앞에 일행들이 멈춰 섰다.

이드는 가만히 민둥산과 그 일대를 둘러보았다. 그런 이드의 눈이 투명하게 반들거렸다.

“정교하네요. 웬만해서는 여기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리기 어렵겠어요.”

“민망하지만 저는 보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쉴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면을 노려본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푸른 안광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내력을 쏟아 안력을 높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있는 것은 단순히 안력만 높인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드가 이 요령을 어떻게 알려 줄까 하고 고민할 때였다.

언제부터였는지 쉴라 옆에 있던 비올라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볼 수 있는 게 특별한 거고, 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이건 흔해 빠진 결계하고는 차원이 다른 수법입니다. 어지간한 중견 마법사들도 알아차리기 힘든 걸 기사인 쉴라 경이 몰라보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가요.”

위로 같지 않은 위로의 말을 꺼내는 비올라에 이드는 내심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간 보았던 비올라의 성격대로라면 눈앞에 있는 것도 몰라본다며 대놓고 비웃음을 날리거나, 초인 마법의 위대함을 떠들었을 텐데.

‘몰라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크크큭.’

“그리고 이 결계의 대단한 점은 환영 마법이 아닙니다. 진짜는 음차원 마나로 형성된 역장입니다. 그게 생명체로 하여금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켜 접근을 막는 거죠. 중간계의 생명체라면 무조건입니다. 그러니까, 흔해 빠진 인식 저해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자신의 마법을 자랑하듯 비올라의 음성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음차원 마나라. 하지만 지금은 딱히 거부감 같은 건 생기지 않습니다만?”

음차원의 마나라면 쉽게 말해 마계의 마나가 아니던가. 마족이 사용하는 기운. 마족이라면 쉴라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선 그 섬뜩한 기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올라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결계의 일부 기능을 봉해 둔 것 같습니다. 바로 근처에 마스 군이 진을 치고 있으니, 조심한 걸 테지요. 뭐, 오히려

잘됐습니다. 결계를 깨려면 조금이라도 약해진 상태인 것이 나으니까요.”

“비올라 마법사에게 묻겠소. 혹시 영혼의 관에서는 경계를 서지 않는 거요?”

어느새 조용해진 가운데,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라울이 물었다. 그러자 스폴이 그의 말에 덧붙였다.

“그러게요. 지나치게 조용한 게. 아무래도 안에서는 저희의 존재를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요.”

“마법사 놈들은 경계도 세우지 않는 걸까요?”

중요한 곳일수록 경비는 기본이 아닌가.

그에 비해 영혼의 관은 너무 조용하다. 이백이 갑자기 몰려왔음에도 말이다. 이드 일행이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사람이 있다면 못 볼 수가 없는 인원인데 말이다.

“다른 마탑은 모르겠고. 일단 저희……..큼. 미완의 마탑은 경비를 세우기보다는 마법을 이용합니다. 한 번에 한 방향밖에 보지 못하는 경비보다 마법이 더 완벽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마법사의 입에서 나올 만한 대답이었다.

또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 마법은 인간보다 뛰어난 도구일 테니까. 인간과 달리 마법은 졸지도 않고, 용변을 볼 필요도 없으며, 심심하다고 딴짓을 하지도 않는다.

이런저런 이점만 보면 수백의 경비병을 세우기보다 마법을 깔아 두는 것이 분명히 나았다.

“거기에 지금은 저렇게 대신 지켜 주는 수천의 경비병까지 있지 않습니까. 굳이 안에서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는 거죠.”

슬쩍 마스 진지를 턱짓하는 비올라에 사람들은 바로 납득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마스의 병력부터 상대해야 할 테니, 영혼의 관에서는 마음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영혼의 관은 마스를 너무 믿었다고 할 수 있었다.

“뭐, 우리 입장에선 잘된 일이로군요.’

그 말이 옳다.

안에 경비가 있어 일행의 접근을 알았다면 그에 대해 준비를 할 테고, 그리되면 진입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결계만 넘으면 진입까지 손쉽지 않겠는가.

“그럼 더 시간 끌 거 없이 서두르죠. 결계. 저희가 엽니까?”

이드가 라미아를 옆에 세우고 물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라미아가 나설 것이다. 라미아의 마법 실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대부분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 여러분께 수고를 끼칠 수는 없지요. 여긴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라울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스무 명의 인원이 뛰어나와 결계에 달라붙었다.

“전부 공간 계열 초인기를 가진 초인들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마법이라도 저들이 나서면 쉽게 뚫어 낼 수 있지요.”

“저들에 대한 자작의 자신감이 대단한 것처럼 들리는데, 착각인가?”

“제대로 보셨습니다, 검후님. 저들은 모두 바벨의 일급 인재들입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야지. 두 번 실망하고 싶지는 않군.”

“하하하. 이것 참…..”

그녀의 말이 다름 아닌 검왕에 대해 말하는 것임을 안 라울이 이마를 긁었다.

그렇게 일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벨의 일급 인재들이 결계에 간섭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먼저 도착한 초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통신 방해 장치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호기심이 솟아오른 비올라가 접근하려다 제지당했다. 중요한 작업 중에 괜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작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스폴이 슬그머니 이드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입을 가리고는 속닥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라미아 님이라면 저 결계, 충분히 뚫으실 수 있겠죠?”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해졌지?”

“말 그대로 만약을 대비하는 차원입니다. 혹시 급하게 병력을 물려야 할 때, 바벨의 초인들이 없거나 하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

그 말에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일까. 현명한 질문이다.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 후퇴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과 라미아, 그리고 일리나를 제외하더라도 검후와 은색 기사단. 그리고 라울과 바벨의 정예가 이백이나 모였다. 영혼의 관이 미완의 마탑에서도 정예만 모였다고 하지만, 실제 규모는 정신의 관의 반도 되지 않는다. 그런 걸 생각하면 패배를 떠올리기보다 승리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스폴은 그런 중에도 후퇴를 생각하고, 그때 진입을 막는 이 결계가 벽이 되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앞을 보면서도 뒤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지휘관의 기본이다. 실제로 그걸 모두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 기본을 평소 털털하다 못해 덜렁이에 개성 강한 그녀가 지키고 있다는 점이 의외였다.

“저런 결계는 필요하다면 언제든 창문 열 듯이 열 수 있지. 라미아뿐 아니라 나도.”

“으흐흐,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역시 저 대머리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는 거라니까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대머리라서 비올라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

“설마요. 부모님 다음으로 사랑하는 제 숙부님도 머리카락이 없으시거든요. 대머리는 죄가 없어요.”

스폴의 가문에 대머리 유전자가 있었다니. 몰랐던 사실이다.

“힘내. 열심히 내공을 쌓으면 대머리는 막을 수 있어.”

반사적으로 나온 말에 스폴의 눈이 살벌하다. 통제하지 못한 입방정에 이드가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대머리가 죄가 아니라면, 비올라는 왜 그렇게 싫어해?”

“대머리라서 싫은 것이 아니라…… 저 대머리가 우리 단장을 노리고 있으니까 싫은 거예요.”

“단장 옆에 서는 건 최고의 남자여야 해요! 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저 마법에 미친 대머리가 우리 단장 옆에 서는 꼴은 용서 못 해요!” 주먹을 불끈 쥔 스폴의 눈이 파랗게 번뜩인다.

정말 어지간히도 비올라가 싫은 모양이다. 정확히는 비올라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쉴라와 가까워지려는 비올라인 것 같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스폴의 이런 반응은 그녀가 유별나서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우리・・・・・・ 라고 했단 말이지. 몇 번이나.’

그 말은, 스폴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은색 기사단에 한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드는 문득 쉴라 옆에 선 비올라의 안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은색 기사단의 칼에 찔리게 될지도?

“쉴라 경 그러니까 영혼의 관에서는 제 말을………….”

‘아니, 어쩌면 오늘 영혼의 관에서 찔리게 될지도?’

뭐, 그렇다고 굳이 경고해 줄 생각은 없다. 아름다운 여인을 얻기 위해서는 그 정도 고난은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그 좋은 증거이지 않은가.

일리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십수 년의 시간을 지나 차원을 넘어서 돌아왔으니까.

그렇게 스폴이 비올라를 향해 살기를 벼르고 있을 때였다.

“결계. 열립니다!”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자세로 한참을 결계 앞에 붙어 있던 초인 중 하나가 나지막한 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외쳤다.

스스스스슥

다음 순간.

흐려지는 민둥산에 겹쳐 높이 솟은 마탑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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