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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40화


1275화

“바벨이 확실한가요?”

“현재로선 가장 가능성이 큽니다.”

가능성이라고 말하지만, 저런 대답이 나올 정도라면 거의 확실하다 봐야 하리라. 이더비히가 탑 아래를 향해 눈을 돌렸다. 퍼퍼퍼퍽!

꾸엑!

화르르륵!

퍼펑!

방음 효과 덕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눈으로 보이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때마침 클레타 부대원이 고속으로 쏘아 낸 얼음덩이를 얻어맞은 그레이트 오크의 머리가 터져 나간다. 그뿐이 아니다. 길게 늘어진 전장 전반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마법과 참 많이 닮아 있는 능력.

초인기.

초인기와 초인, 바벨은 본래 삼위일체, 한 몸이 아니던가. 저 많은 초인을 보면 누구라도 바벨이라 말할 것이다.

이더비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타란 백작은? 마스에서 배치해 놓은 군은 왜 아직 보이지 않는 거죠?”

적이 침입한다면 가장 먼저 막았어야 할 마스의 군이었다.

마스가 무능해서 침입을 알아 차라지 못했다 해도, 지금쯤이면 연락을 받고 달려와야 했다.

“설마 저들에 당한 건가요? 그러기가 쉽지는…………..”

아무리 바벨이라도 일국의 수천 전력을 쓸어버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답하는 마법사의 표정이 곤혹스럽다.

“차라리 그런 전투라도 있었다면 저희도 저들이 결계를 넘어 들어올 때까지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은…………… 바벨이 통신까지 차단하고 있는 건가요?”

“말씀하신 대로 기본 회선에 심각한 노이즈가 발생 중입니다. 대신 고정 회선은 살아 있습니다만, 반응이 없습니다.”

“받지 않는 겁니까, 받지 못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지.”

“이유는요?”

“현재 마스의 진지가 텅 비었습니다. 모든 병력이 빠진 상태입니다. 최소한의 기사와 병사들이 남아 있는 걸 확인했지만, 그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래도 저 아래 있는 바벨 놈들의 짓이겠지요.

만약 라울이 들었다면 눈이 삐었냐고 비꼬았을 말이다.

일부러 신경 써서 죽이지 않고 재워 놓았는데, 그걸 몰라주고 몰살범으로 몰다니.

하지만 이 자리에선 쓰러진 기사들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사실은, 현재 진지가 비어 있다는 것.

“저녁까지는 멀쩡하던 자들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자리를 비웠다면, 그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건데, 무슨 일일까요?” 

애초에 알면 고민하지도 않을 걸 왜 묻는 것일까.

그때, 침묵하던 마법사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한가지 가능성을 짚었다.

“혹시….. 유인책에 당한 건 아니겠습니까?”

“바보도 아니고, 그런 데 당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전 병력을 끌고 갈 정도면 대체 뭘로 유인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잠시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유인’이라는 말을 들은 이더비히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신이 본 타란 백작은 늑대 같은 사람이었다. 사납지만 엎드려야 할 땐 엎드릴 줄 아는 영리한 늑대.

그라면 뻔한 수법에 당할 멍청이는 아니다. 하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병력을 동원해 뛰어나가야 할 상황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남자.

그것이 이더비히가 본 타란 백작이었다. 다시 말해, 뻔해 보이는 유인책일지라도 미끼가 대단하다면 알고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란 백작으로 하여금 영혼의 관에 연락을 취할 여유도 주지 않고 뛰쳐나가게 만들 수 있는 미끼로는 무엇이 있을까.

뛰어난 두뇌는 앞뒤 상황을 고려해 몇 가지 가능성을 펼쳐 보였다. 머릿속을 스치는 그림들에 내심 고개를 흔들던 그녀.

‘잠깐, 이거라면!’

한 인물의 얼굴과 대략적인 사건의 예상 스케치에 본능과도 같은 직감이 발동했다. 그와 동시에 이더비히의 눈이 마스의 진지를 지나 더 먼 곳을 향했다.

“검왕의 진지는 어떤가요? 그곳도 비었던가요?”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공격을 받았으면 내 편부터 찾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 아니던가.

“당장 확인하세요. 검왕의 진지도 비었는지,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검왕이 있는지를 알아 오세요. 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마법사가 이유를 물을 이유도 없이 허둥지둥 뛰어나갔다.

그리고 이런 명령의 이유를 짐작한 마법사들이 서로 눈빛을 나눴다.

“부관주는 타란 백작이 검왕을 쫓아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떨 것 같나요?”

“・・・・확실히, 마스에서 검왕을 노리고 있기는 했습니다.”

“그래요. 검왕을 잡기에는 지금만 한 기회도 드물지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검왕이 움직이는 걸 봤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당연히 쫓아가야지. 입장이 바뀐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말을 아꼈다.

이더비히의 말이 옳다면, 검왕이 고작 미끼로 사용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저 검왕을 미끼로 쓴다니.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럴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제국의 황제라도 그러지는 못할 거다.

고정 관념이지만,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더욱이 저 말대로라면 지금 검왕과 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바벨이다.

하지만 과연 검왕이 바벨의 뜻대로 움직여 줄까? 바벨과 소드 팰러스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문제다. 정말 검왕이 바벨과 손을 잡았다면, 그 검왕이 저 아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개운치 않은 문제에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던 시점에서, 명령을 받고 밖으로 나갔던 마법사가 돌아왔다.

그는 못 볼 걸 본 듯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비었습니다. 검왕은 물론이고, 기사들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또 진지가 엉망으로 파괴되었는데, 그 주변으로 수많은 말과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마스 군이 그 위를 지나간 모양입니다.”

“아아, 젠장.”

“이러면 사건이 가볍지가 않게 되는데.”

“이미 적들이 결계 안이 들어온 시점에서 가볍게 처리할 사안은 아니지요.”

혹시나 하던 일이 사실로 밝혀지자 마법사들이 혀를 찼다.

이더비히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검왕. 언제부터 이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인가요.”

검왕의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그는 하나였고, 영혼의 관과 마스의 군은 강력했다. 그래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를 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며 오만이 된 것이었을까.

결판을 지으려면 빨리 행동해야 했다. 그저 때를 기다린다고 보고만 있었던 게 지금의 결과로 돌아왔다.

사실 지금도 잘 믿어지지는 않는다. 저 검왕을 단순한 미끼로 쓸 줄이야.

“이것 참, 일이 곤란하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부관주,”

“곤란할 것이 있나요? 일은 이미 벌어졌고, 우리는 적을 물리치면 되는 겁니다.”

“물론 침입자는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 검왕이 관련되어 있다면, 바벨의 침입은 그들의 독단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은?”

“네. 이번 공격은 아나크렌과 사전에 조율한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바벨뿐 아니라 아나크렌도 본 관을 노리고 공격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듭니다.”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하지만 제국의 토벌은 멈춘 상태가 아닙니까. 제국이 다시 토벌에 나서려면 전쟁이 먼저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검왕을 움직였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저 아래 있는 침입자 말고 추가 병력이 올 것인가.

그것도 제국이 작정하고 밀어 넣는 병력이라면? 천하의 영혼의 관도 무사하기는 힘들다.

이더비히는 탑 아래 전장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전투는 거의 일방적이었다. 어느새 소환한 몬스터의 절반이 당한 상태.

그것도 침입자들이 속도를 내어 몬스터를 자근자근 갈아 내지 않아 그런 것이지, 뒤에 움직이지 않는 전력까지 처음부터 함께했다면 모든 몬스터가 벌써 정리되었을 터였다.

“제국 쪽 전력은 이미 들어와 있을 수도 있겠군요.”

“부관주, 그건 무슨 말씀이오?”

“침입자들의 후방에 선 기사들 말입니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제국의 인물들일 테지요.”

“바벨의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오?”

“확인하지 않은 이상 확신할 순 없죠. 하지만 바벨에 소속되었다면 저렇게 보고만 있지는 않겠죠.”

바벨에서 영입한 마법사와 기사는 결코 얌전히 모셔 두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마법사와 기사들 역시 그런 이유로 나서야 할 땐 적극적이다. 

“제국의 기사라.”

“설마 황실 기사단?”

“검왕이 움직인 만큼, 소드 팰러스의 오색 기사단 중 하나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소.”

“흥, 그래서, 무서우니 도망이라도 가자는 거요?”

“없는 말 만들어 내기 있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요?”

어느새 마법사들의 대화가 다툼으로 변하려 할 때였다.

짝.

이더비히의 가볍게 손뼉을 쳐 마법사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 뜻을 모르지 않기에 마법사들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번 일에 제국이 함께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침입자들이 더 있을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요. 중요한 건, 상대가 누구라도 영혼의 관을 지켜 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싸움을 준비하세요.”

“부관주의 말씀대로요. 지금은 누가 말이 옳은가 하는 사소한 일로 다툴 때가 아니라, 싸움을 시작할 때지.”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무한성이 정상 작동 중입니다. 누구라도 본관에 발을 들이기만 한다면 절대 멀쩡히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감은 좋습니다. 하지만 자만하지는 마세요. 생명의 관과 정신의 관이 어떻게 당했는지 잊지 않으셨겠죠?” 

각각 이드와 제국에 의해 무너진 곳들.

그 두 곳에서 도망쳐 온 마법사들도 적지 않게 합류한 상태였기에, 당연히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법사들의 얼굴엔 자신감이 있었다.

“자만한 것이 아닙니다. 본관은 생명의 관이나 정신의 관과는 다릅니다.”

“맞습니다. 본 관이야말로 진짜 미완의 마탑이 아니겠습니까.’

“암요, 암요. 머지않아 초인 마법이 완성되면 곧 미완이라는 말도 떼어 버리게 될 겁니다.”

“지금만 해도 보다 완벽해진 초인 마법으로 마법의 위력이 강해졌으니, 이 모두가 탑주님의 은혜이지요.”

탑주에 대한 말이 나오자 마법사들의 얼굴에 한층 더 자신감이 꽃폈다.

이 순간 탑주는 이들에게 신이고 믿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연구에 몰입한 탑주가 쏟아 낸 결과물들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 하나하나가 마법사들의 마법을 발전시켰으니. 마법사들 입장에선 하루하루 세상이 달라 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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