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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41화


1276화

일단 탑주가 언급되자 그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말이 나온 김에 탑주께도 현 상황에 대해 알려야지 않겠습니까?”

“굳이 이런 사소한 일을……………”

“침입자가 결계를 넘었고, 검왕에 제국까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 어떻게 사소하단 말이오. 알려야 합니다.’

“그래도 막상 침입자는 저들뿐이지 않소. 충분히 저희 선에서 처리 가능한 사안으로 탑주님의 연구를 방해하는 것은 아닐지.”

“그 말씀이 옳아요.”

보고를 해야 한다. 방해하면 안 된다.

둘로 나뉘어 옥신각신하는 마법사들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같이 탑주를 위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흐뭇한 모습.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이더비히의 기분은 착잡했다.

연구에 몰두한 탑주는 이들의 이런 마음을 티끌만큼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알 생각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현재 그의 모든 신경과 정신은 오로지 바이트 타블렛에 가 있으니까.

차라리 광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거기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지켜본 건 자신뿐이다.

연구에 깊이 심취한 마법사의 모습은 기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하지만 항상 단정한 탑주만을 보아 온 이들에게는 충격적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침입자가 발생한 지금 같은 때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떨까.

“현 상황을 알리는 건 제가 판단하도록 하지요. 당장은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으니까요.’

“과연. 저희와 달리 부관주님은 종종 탑주님을 찾아뵙기도 하시니,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글쎄. 과연 자신의 말이라고 탑주가 이성적으로 들어 줄까.

내심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도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더비히였다.

“일단은 현 상황에 대응부터 하도록 하지요. 남은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고 나면 적들이 영혼의 관으로 발을 들일 겁니다. 그에 대해 매뉴얼대로 대응해 주세요.”

“예, 부관주.”

“맡겨 주십시오. 무한성에 발을 들인 초인 놈들에게 지옥을 보여 주겠습니다.”

무한성의 초입을 맡은 마법사 셋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어 그들은 이더비히의 손짓에 따라 즉시 자신들이 맡은 구역을 향해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보던 이더비히는 곧 다른 마법사를 향해서 명령을 내렸다.

“무한성의 방어를 맡은 분들께서도 각자의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아직 적의 정확한 전력을 알 수 없는 상태인 만큼, 함부로 위치를 옮기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타란 백작과 마스에 연락을 넣을 방법을 찾으세요.”

“굳이 그들이 없어도…….”

왕궁에 연락을 해 봤자 당장 달려올 수 있는 병력은 없다.

마찬가지로 타란 백작의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와 봤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마법사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마법보다 강할 거라고 티끌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이더비히의 눈빛에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제가 방금 뭐라고 말씀드렸죠? 절대 방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죄송합니다.”

“침입자가 발생한 이상, 우리는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초인 마법에 입문한 마법사들은 하나하나가 귀한 자원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한시라도 더 빨리 초인 마법이 완성될 수 있는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 주세요. 연락이 되는 즉시 타란 백작과 군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달하라는 말입니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냉기를 담은 이더비히의 시선에 뻣뻣하게 얼어 있던 마법사들이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가 모르긴 몰라도 쉬지 않고 통신 수정구를 문질러 댈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된다.

이더비히는 그 뒤로도 남은 마법사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을 명령했고, 그때마다 마법사들은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마지막 마법사까지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

그녀는 조용히 수인을 맺었다. 서로 겹치지 않는 다섯 개의 형상이 마나를 인도하는 순간.

스르륵.

그녀의 복장이 바뀌었다. 입고 있던 로브와 잠옷이 사라지고, 풍성한 치마에 가죽 상의라는 평소의 옷차림이 된 것이다.

이더비히는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틀어 올리며 창밖의 상황을 살폈다. 전투는 그야말로 막바지.

그녀의 눈이 향했을 때는 마지막 남은 몬스터의 목이 막 떨어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이더비히의 눈에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저 몬스터들은 힘없는 병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것. 제대로 된 전투력을 가진 초인이나 기사를 막을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다.

진짜 전투는 저들이 무한성 안에 발을 들인 후 시작될 터였다.

“저들이 이 시점에 나타난 게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수일 전 보았던 탑주는 그녀에게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확신했다. 그녀의 불안과 의심은 차치하고라도, 그런 중대한 고비를 앞에 둔 시점에 마치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한 듯 절묘하게 나타난 침입자들.

이더비히는 이 흐름이 그저 우연이 아닌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 철벽의 검왕의 의도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데.”

존 워스가 바이트 타블렛의 레플리카를 들고 나타났던 그 날을 떠올린 이더비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날의 일만 없었다면, 그리고 그 후 만났던 검왕의 반응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는 않을 것을.

하지만 이런 고민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쉼 없이 변하는 흐름 중 그녀가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존 워스를 찾으려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탑주님의 바이트 타블렛은 무조건 완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어떤 불순한 의도라도 떨치고 전진할 정도로 완벽한 완성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그녀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침입자를 막고, 나아가 물리치는 것. 우선은 그것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전장을 정리 중인 침입자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본 이더비히는 곧 다른 마법사들과 같이 몸을 돌려 안으로 사라졌다.


심장이 부서진 오우거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 주변에 멀쩡히 서 있는 다른 몬스터는 없다.

“이놈이 마지막인가.”

“마지막은 아니지만, 대장이 상대할 몬스터는 더 없습니다.”

플레타는 오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전장을 쓱 둘러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전 부대 주목! 우리가 모든 적을 쓰러트렸다. 부상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겨우 몬스터 놈들 따위에 다치면 내 손에 죽지.”

곧장 돌아온 대답에 플레타가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오탄은 그런 플레타를 대신해 부대원들을 다시 정렬시키고는 소리쳤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각자 무기와 방어구를 정비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한다.”

“재정비!”

겨우 오크 따위를 베고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 따위는 없었다. 잘 훈련된 부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검에 묻은 피를 닦고, 방어구 끈을 다시 조였다.

플레타는 이런 부대원들을 두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던 이드 일행에게 다가섰다.

“저희 전투는 잘 보셨습니까.”

“부대원들이 매우 용맹해 보였습니다.”

“그대 부대원들도 모두 초인일 텐데, 하나같이 무기술이 매우 뛰어나 보였소. 평소 얼마나 열심히 단련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오.”

“다른 분도 아니고, 명예 후작님과 검후께 그런 칭찬을 받다니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하.”

“절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었소. 매우 잘 훈련된 대원들이오.”

검후가 재차 부대원들의 실력을 칭찬하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플레타의 입이 귀에 걸려 내려올 줄을 몰랐다.

자신이 땀 흘려 키운 부하들의 실력을 다른 이도 아니고 검후에게 인정받았으니. 플레타가 아닌 누구라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화려하게 전투를 치렀는데도 조용하군요. 기분 나쁠 정도로.”

스폴이 말했다.

그 말에 이드가 영혼의 관을 올려다보았다.

밖에서 바라본 영혼의 관은, 거대한 저택과 그 중앙에 높이 솟아 있는 탑이 하나가 된 모양이었다.

당연히 입구에는 문이 있었고, 창문도 적당히 달려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몬스터를 해치울 때까지, 누구 하나 저 창을 열어 밖을 살피는 사람이 없었다. 무한성이라는 것이 발동하고, 몬스터까지 나타난 시점에서 자신들의 침입 사실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들어와서 보자는 뜻인가?”

“거기에 더해서 자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이드가 자신의 혼잣말에 답한 플레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보통 이런 환영 인사까지 준비해 놓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에겐 몬스터들이 환영 인사 대신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좌우간 앞서 비올라나 그의 말처럼, 진짜는 영혼의 관 안에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적이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영혼의 관을 아래위로 훑었다.

할짝.

그리고 입술을 살짝 적신 찰나. 그 모습을 보던 일리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방금 이드가 어쩐지 악당처럼 보였어요.”

“하하. 그렇게 보였어요? 좀 쇼킹한 상상을 해 보긴 했는데. 티가 났나 보네요.”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들어가지 않으면요?”

의아한 표정을 한 일리나.

이드는 그녀를 한번 보고는 탑을 가로지르며 스윽 수도를 그어 보였다.

“밖에서 두드리면 어떨까 싶어서요. 탑이 무너지면 안에 있던 놈들이 다 튀어나오지 않겠어요?”

탑이 무너지면 설마 그때도 안에서 버티고 있을까?

그러자 뒤에 있던 라미아가 두 사람 사이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설마 저들이 그런 대비도 하지 않고 들어앉아 있겠어요? 그에 대한 대비는 아마 제일 철저하게 했을걸요?”

“하기야 했겠지. 하지만 그 대비가, 나나 널 상대로도 통할까?”

12대식이나, 10클래스 이상의 마법들.

과연 그 앞에서도 영혼의 관의 수법이 통할까? 영혼의 관에 대한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까?

그런 뜻을 가진 이드의 말에는 과연 라미아도 즉답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완전히…… 통하지 않지는 않겠네요. 하지만…… 잘못하면 공간이 일그러지는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당장 저 무한성이라는 것도 그렇고, 외부 공격에 대한 마탑의 방어 시스템은 대부분이 공간 계열에 해당하거든요.”

자칫 영혼의 관이 조각조각 나뉘어 이계 공간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이드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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