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78화
1313화
끼익. 쿵.
문이 닫히고, 문틈 사이로 비치던 이더비히 부관주의 모습도 사라졌다.
“……..”
닫힌 문을 말없이 바라보는 탑주.
그 너머로 멀어지는 부관주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일까. 잠시 후,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로 반짝이던 눈도 닫혔다.
동시에 탑주가 입술을 살짝 깨문다.
눈을 감는 순간 핑 도는 어지러움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
탑주는 새삼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기사처럼 전문적으로 단련을 한 것도 아니고 많이 낡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나가 가득 찬 몸이다.
원래라면 이런 어지러움은 느낄 일이 없어야 했다.
이상을 깨달은 순간 체내의 마나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다시 눈을 뜬 탑주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바이트 타블렛 앞에 앉았다.
그리고 훈련된 사냥개처럼 자연스럽게 그 위에 놓이는 두 손.
총기로 반짝이던 그의 두 눈은 어느새 많이 흐려져 있다.
거울은 없지만, 탑주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의 관에 닥친 위험을 전해 온 부관주의 말을 듣고도 자신도 모르게 바이트 타블렛에 손을 대다니.
‘탑주라는 자가 참으로 한심하구나. 새로운 진리를 세우겠다면서 일의 선후도 구분하지 못하고 욕망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문득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에 로브 안으로 거둬들인 두 손으로 주먹을 쥔다.
아무리 마법사가 호기심 덩어리에 마법 지상주의자라지만 자신은 철벽같은 정신 방벽을 높이 세운 고위 마법사가 아니었나. 그런데 이런 한심한 꼴이라니.
당장 방을 나간 부관주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자괴감에 이어 부끄러움이 치솟는다.
자신에게 자식은 없지만, 아마도 부모로서 자식에게 보이지 못할 꼴을 보이면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싶다.
그에 있어 부관주 이더비히는 딸과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부관주 역시 자신을 아비처럼 따르고 있음을 알기에 창피스러움은 한층 더하다. 그러나 한심하게도 이런 자괴감과 부끄러움 속에서도 마음 한쪽은 멈추지 않고 바이트 타블렛을 향해 달리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자신이 이렇게 유혹에 약한 인간이었나. 실로 한심하다.
“허허.”
문득 헛웃음이 샌다.
본인의 꼴이 꼭 마약에 취한 약쟁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들어서다. 약쟁이 고위 마법사라니.
차라리 광신자라면 몰라도 스스로를 약쟁이라고까지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누가 뭐래도 자신에겐 진리의 완성이라는 분명한 도달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욕망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의욕이 넘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아니, 분명 그렇다고 자신의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야 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일을 생각하면 그래야 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던 바이트 타블렛에서 손을 뗄 것.
그건 결코 부관주 때문도 아니었고, 침입자 때문도 아니었다. 조금 전의 자신은 그런 게 귀에 들어오는 상태가 아니었다.
‘부관주가 알면 실망하겠구나.’
씁쓸하게 속내를 삼키는 탑주.
사실 그를 불러일으킨 건 부관주가 아닌, 전혀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이제 그 목소리를 대면해야 할 차례다.
목표를 분명히 하는 순간, 탑주의 뇌를 어지럽히던 모든 상념이 사라지고 눈빛이 투명하니 서늘해진다.
“아직 거기 있소?”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를 찾는 탑주.
방을 나선 이더비히 부관주가 보았다면 결국엔 그가 미쳐 버렸다고 눈물을 쏟았을 광경이다.
영혼의 관이 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탑주가 머무는 방과 연구실은 그 보안이 가장 철저하다. 허락받은 자가 아니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부관주는 그 누구의 출입도 보고받은 적도 허락한 적도 없다. 그러니 누가 이곳에 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탑주는 마치 누가 있다는 듯 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탑주의 부름에 실제로 답하는 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물론이오. 탑주가 대답하길 기다리고 있었소.
방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마치 육합전성처럼 사방에서 들려왔다. 마치 출처를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하지만 탑주는 내심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좁은 공간에서 굳이 모습을 감출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 연구실은 온전히 탑주의 공간이다. 달리 말하면 탑주의 위장 속이라고 해도 좋다. 연구실 안을 날아다니는 먼지 하나까지 탑주의 인식 안에 있다.
그런 곳에서 몸을 숨긴다?
그건 드래곤이라도 불가능하다고 자신한다. 그렇기에 탑주는 확신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곳이 아니라, 연구실 밖에 있다.
“그대의 재주가 참으로 놀랍소.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이오.”
상대는 대체 어떤 놀라운 수단으로 수많은 방어벽을 뚫고 연구실 안으로 목소리를 집어넣은 것이며, 어떻게 연구실 안에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이 수법을 변형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위기감이 잠깐이지만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욕망까지 누르고 고개를 치켜들 정도다.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오. 나만의 능력이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않소?
“・・・・・・ 충분히 중요한 것 같소만.”
-아니지. 탑주가 내 대화 요청에 답한 건 그 때문이 아니잖소. 바이트 타블렛.
“……”
-내가 그것의 완성에 협조하겠소.
“이것의 완성은 나만의 권한이오. 협조는 사양하겠소.”
바이트 타블렛이 언급된 순간, 정체 모를 목소리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고 적대감이 탑주의 눈에 피어오른다.
그러자 마치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태도를 바꿨다.
-단어 선택이 적절치 못했던 모양인데, 사과하겠소. 다시 말하지.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하려는 당신을 도와주겠소.
“도움도 불필요하오. 이대로 세계를 구성하는 진리의 서에 조금만 더 접근하면 바이트 타블렛은 완성되오.”
-바로 그 접근에 필요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소? 조금 전 다녀간 부관주가 말하던 침입자 말이오. 그들이 저것의 완성을 방해하려 할 거요.
“쓸데없는 걱정이오. 부관주와 장로들이 있는 한 그들은 이곳까지 올라오지 못할 거요.”
-부관주의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 그렇지 않소? 그리고 내 확신하지. 그들은 탑주에게 충분히 닿을 수 있소.
“침입자들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침입자 중 일부와 제법 인연이 깊어서 그렇소. 덕분에 그들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도 잘 알지. 그대를 따르는 마법사들은 분명 대단하지만, 내가 말한 이들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거요.
“・・・・・・ 정체도 밝히지 않은 그대의 확신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만, 동시에 내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의 실력을 잘 안다는 듯 떠드는 그 태도가 상당히 불쾌하오.”
-이런, 실례했소. 내 정체라. 그건 굳이 감출 이유가 없소만, 원한다면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할 수도 있소.
마치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 중이었다는 듯 여상한 태도.
그에 탑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이 목소리의 목적이 무엇일까. 혹시 부관주가 말한 침입자들이 자신을 꾀어내려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닐까.
“어떻게 얼굴을 보자는 말이오?”
-허락한다면 내가 그곳으로 가겠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말하는 거요?”
-맞소.
“당신이 한 말.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탑주는 목소리가 꺼내 놓은 제안에 혼란스러웠다.
물론 방어벽을 뚫고 목소리를 전해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목소리를 전하는 일과 본인이 직접 방어벽을 넘는 일은 하늘과 땅 차이다. 목소리를 전달하는 게 종이에 바늘구멍을 내는 것이라면, 사람이 방어벽을 넘는 건 커다란 성벽에 높이 삼 미터의 구멍을 내는 정도의 차이였다. 이런 어려움을 차치하고라도, 그가 연구실에 직접 발을 들이는 것은 목소리를 듣는 정도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상대가 바이트 타블렛을 노릴 수 있다는 우려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이 연구실은 탑주의 위장과 같다. 이런 곳에서 자신의 허락 없이 바이트 타블렛을 탈취한다? 그건 설령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연구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목숨은 탑주의 손에 쥐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방어벽을 뚫어 낸 능력으로 도망을 친다 해도 결코 멀쩡한 모습으로는 보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시 말해 상대에겐 그만큼 불리한 장소라는 말이다.
마법사의 연구실이란 그런 곳이다.
-물론이오. 아무렴 마법사의 거처가 어떤 곳인지도 모를 멍청이 같소.
“그런데도 오겠다?”
-후후. 무해한 협력자를 이유 없이 공격하진 않을 거 아니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인가, 오만인가.
목소리는 거침이 없다. 오히려 고민은 탑주의 몫이 되었다. 과연 상대의 방문을 허락해야 할까.
상대의 의도는 무엇일까.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돕는 일이 상대에게 어떤 이익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침입자의 위협은 실시간으로 목을 조여 와 그 대응이 필요했고,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최악의 경우 자신이 나서야겠지만, 이젠 그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바이트 타블렛에 있는 이 공간에 목소리를 전달하고, 이제는 심지어 직접 들어오겠다는 자가 있다.
그런 자를 두고 어떻게 자리를 비운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유일했다. 목소리가 말한 ‘도움’을 받는 것.
“방문을 허락하겠소.”
이미 마법사의 거처가 가지는 의미를 아는 상대이기에 시시한 경고 따위는 하지 않았다. 탑주의 허락에 대한 상대의 대답은 짧았다.
-방문 허락에 감사하오. 지금 가겠소.
목소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실로 고요하던 연구실 안에 흐르던 마나가 갑자기 굳어 버린 듯 그 움직임을 멈췄다.
흐르는 물처럼 쉼 없이 움직이는 마나가 멈추다니.
콰우우-
그와 함께, 연구실의 한쪽 벽면이 쩍 갈라지며 벌어졌다.
벽에 금이 가고 무너졌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벽이라는 공간 자체가 갈라진 것이다.
그와 함께 나타난 검은 공간. 그 속에서 바람과 함께 하얀 손이 튀어나오고, 이어서 얼굴과 몸이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온전히 연구실에 서는 순간, 그가 나온 검은 공간이 닫히고 굳었던 마나가 다시 흐른다.
그와 함께 탑주의 얼굴도 놀라움으로 움직였다.
“존 워스, 철벽의 검왕. 어떻게 귀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