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84화
1319화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보다는 좀 더 시간 여유가 있지 않을지요.”
스폴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의견을 내놓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
검후가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어째서?”
“현재 타란 백작이 쫓고 있는 상대가 검왕이기 때문입니다. 검왕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니까요.”
검왕이 언급되자 검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래, 그랬지. 비록 충성심과 기사도는 썩어 악취가 진동할지언정, 놈의 실력만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고 있으니. 쉽게 뒤를 잡히지는 않을 것이야.”
검후와 은색 기사단이 알고 있는 검왕은 그런 남자였다.
수십 배가 넘는 병력에 뒤를 쫓겨도 며칠 동안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설령 따라잡히는 일이 있어도 언제든 제 한 몸은 빼낼 수 있는 실력자.
그게 검왕이다.
“남작은 이 의견을 어찌 생각하오?”
“스폴 경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타란 백작이 아무리 열심히 말을 달려도 쉬이 잡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죠, 검왕은 그러나 타란 백작에겐 검왕을 잡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날이 밝아 오면 타란 백작은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추격을 포기할지, 계속할지?”
“네. 그리고 타란 백작은 추격을 포기할 겁니다. 앞선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있는 그로서는 명령에 충실해야 할 테니까요.’ 라울은 잔에 든 꿀물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타란 백작은 아마도 영혼의 관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려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영혼의 관과 마스의 진지를 나누고 있는 결계가 있으니, 쉽게 접근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봤자 시간문제.
라울은 타란 백작이 영혼의 관의 문제를 파악하는 데 하루를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스의 전군이 움직일 것이다.
즉, 현재 상황으로는 영혼의 관을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는 마스와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벨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렇기에 검후가 다시 물었다.
만약 이렇게 해서 마스와 전면전을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제국이 아닌 바벨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끙, 어려운 질문입니다.”
때문에 라울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습격에서 결정권은 오직 그에게 있었다. 팔짱을 끼고서 고민에 빠진 라울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중간중간 멈춰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
머릿속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일까.
이드는 그에 대해 대략 짐작이 갔다.
전력적인 면에선 자신과 검후가 있으니,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이후의 전투에 얼마나 시간이 소모될지를 계산하고 있겠지.’
1층과 2층의 전력 차가 기준일 것이다.
몬스터, 인공 초인과 같은 상수와 네트나와 플로어 마스터라는 변수를 넣은 계산.
이드는 잘래잘래 고개를 저었다.
자신으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지도 않은 적을 어떻게 예단한단 말인가. 영 자신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선 라울의 두뇌는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미안하게도, 그의 계산은 어차피 틀릴 수밖에 없다.
바로 자신과 라미아의 존재가 그의 계산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물론 라울의 계산 안에 자신과 라미아가 들어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라울이 알고 있는 자신과 라미아는 ‘진짜’ 자신들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바벨이 파악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가상의 이드와 라미아라고 할까. 그렇게 나온 기준은 대략 쉐어 가든에서의 전력.
결코 자신이나 라미아가 가진 진짜 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혼돈의 파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후의 전투에 대해 라울이 아무리 정확하게 예측하더라도, 혼돈의 파편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것이 파탄 나고 말 것이다.
‘물론 혼돈의 파편을 대비해서 내가 있는 것이지만.’
처음 라울이 말했었다.
혼돈의 파편이 출현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대비로서 자신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의문이 들기도 한다.
과연 라울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쉐어 가든에서 있었던 메르시오와의 전투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일까. 자신과 혼돈의 파편의 전투가 시작된다면, 거의 확실하게 영혼의 관은 흔적도 없이 무너지리라.
그런데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음…… 어쩌면 지금은 그런 결과를 더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영혼의 관을 파괴하겠다는 목적은 이루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라울의 속내를 짐작해 보고 있을 때였다.
꿀물이 든 주전자를 기울이던 이드의 귓가로 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 님은 라울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으세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전음이었다.
이드가 검후 쪽을 돌아보니, 검후뿐 아니라 쉴라와 스폴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생각에 빠진 사이, 그 셋이서 라울이 어떤 결정을 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맥없이 물러나지는 않을걸.”
“역시 그렇겠죠?”
아무래도 검후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당연하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습격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미완의 마탑이 작정하고 숨어 버리면 바벨로서도 골치 아플 거고.”
현재 미완의 마탑은 마스와 한몸이 된 상태다.
미완의 마탑이 숨고자 한다면 마스도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이다. 마스 입장에서도 미완의 마탑의 자산들은 귀한 보물일 테니까. 꼭꼭 숨겨야지 않겠나.
“그럼 혹시 라울이 이대로 돌아간다고 한다면요?”
“그럼・・・・・・ 가라고 해야지.”
“가라고? 우리는 가지 않고요?”
이드는 검후의 ‘우리’라는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신과 은색 기사단은 이드와 함께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미완의 마탑이라는 것이 위험해 보여서 말이지. 여기까지 온거 이번 기회에 바이트 타블렛을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바이트 타블렛.
미완의 마탑의 보물, 동시에 혼돈의 파편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물건이다.
이드는 인공 초인과 네트나를 통해 바이트 타블렛이 혼돈의 파편이 바라는 형태로 완성되게 두는 것은 위험하다는 인식을 확실히 했다. 자신은 상관없다.
하지만 네트나와 같은 괴물이 대량으로 발생한다면?
그건 여러 가지 의미로 매우 위험한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이드가 계속 앞으로 가겠다고 한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혼돈의 파편. 이드가 바이트 타블렛에 느끼는 위험도를 올린 만큼, 혼돈의 파편이 가지는 바이트 타블렛에 관한 중요도도 동시에 올랐다.
과연 그런 바이트 타블렛에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방치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 방비를 했거나,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면? 그게 아니라도 바이트 타블렛의 이상을 알고 나타난다면?
꾸욱.
이드는 그런 생각에 뜨거워진 손을 서늘한 일라이져를 잡아 식혔다.
“운이 좋으면, 이번이 또 하나의 혼돈의 파편을 잡을 좋은 기회일 수 있거든. 이런 기회가 아니면 꼭꼭 숨은 놈들을 어떻게 찾겠어.”
“그렇기는…… 하죠.”
혼돈의 파편에 대한 말에 검후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혼돈의 파편이 등장한다면 그녀가 도울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녀를 검후라 칭송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강하다. 그러나 그 강함이 이드나 혼돈의 파편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전투에 개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과연 그 개입이 이드를 돕는 것일까.
솔직히 자신이 없는 검후였다.
‘내가 이렇게 무력한 인간이었던가.’
검후는 나오려는 한숨을 조용히 삼켰다.
혼돈의 파편. 그 이름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 그들과의 전투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드 팰러스를 세워 많은 기사를 가르친 것도 어찌 보면 이 싸움에 대한 대비였다. 무엇보다 열심히 갈고닦은 건 바로 스스로였다.
하지만 막상 그때가 된 지금에 와서 보니, 자신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드님.”
“말해.”
“만약 전투가 시작된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지금의 넌 충분히 강하거든.”
“…….”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그냥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지만…… 검후는 그 말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릴 적 오라버니께 칭찬을 들을 때면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이 들어서 주책이야, 정말.”
그런 생각에 검후는 쿡쿡 웃다가 헛기침을 했다.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저와 은색 기사단은 계속 이드 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의지하고 있다고.”
이드는 순간순간 변하는 검후의 얼굴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렇게 라울의 선택에 따라 바벨과는 여기서 갈라설 결심까지 한 이드 일행은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답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촉박한데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라울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영혼의 관을 파괴하는 게 먼저인 듯합니다.”
“그런가?”
“네. 아무래도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차후 지금과 같은 기회는 오지 않겠지요.”
“토벌이 있지 않나.”
“글쎄요.”
라울은 검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토벌로 영혼의 관을 정리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꺼내 놓은 말은 이드의 예상과 비슷했다.
특히 영혼의 관이 마스의 협력을 얻어 잠적해 버릴 가능성에 대해서는 걱정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