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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85화


1320화

“잘 아시겠지만, 지금 마스의 행태로 봐서 언제 토벌이 시작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영혼의 관이 그때까지 이곳에 있기나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이놈들에게 더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울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했다.

그의 안에서 영혼의 관이 가지는 위험도가 그만큼 커졌다는 증거.

만약 이대로 물러나고, 그 후 영혼의 관이 잠적해 버린다면? 바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꼴이 된다.

아니, 그 이상으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 거의 확실했다.

잠적한 이들이 숨어 초인 마법을 완성했을 때 일어날 일을 상상해 보라.

굳이 멀리서 어렵게 찾을 필요도 없다.

당장 플레타 부대를 무력화시킨 ‘베이몬의 침묵’이라는 무시무시한 예가 있지 않은가.

만약 이 마법이 이대로 완성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지금처럼 영혼의 관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아닌, 일반 결계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초인이 가주로 있는 저택. 초인이 지키고 있는 요새. 그리고 초인 부대가 동원된 전쟁터까지. 마법이 사용된 순간의 결과는 그야말로 끔찍할 것이다.

초인을 초인일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의 붕괴. 그건 초인의 사회적 위치의 붕괴이기도 하다.

초인들에겐 그야말로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사태.

차라리 천재지변이면 다시 시작이라도 해 보지, 이건 실패가 약속된 도전이나 마찬가지라서 더 최악이다. 그야말로 모든 초인의 추락을 알리는 모래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한 상황.

당연히 모든 초인의 권익을 위해 존재하는 바벨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사태인 것이다.

사실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 있지만, 라울의 속은 후회로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영혼의 관이 초인 마법을 이렇게나 발전시킨 것을 알았다면.

영혼의 관의 초인 마법이 이렇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벨의 전력을 모조리 동원해 주춧돌 하나 남김없이 단번에 영혼의 관을 파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을 수밖에 없는 것.

라울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마 최소한 믿을 구석이 있어 다행이지.’

그는 검후와 명예 후작, 그리고 은색 기사단을 눈에 담았다. 실로 믿음직한 저들이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어쩌면 막막한 심정에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라울의 심정은 그 정도로 절박했다.

다른 초인 마법도 마법이지만, 베이몬의 침묵이 완성되는 일만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현 단계까지 완성된 것을 손에 넣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완성되었을 때 무력화시키거나, 대응할 방법이라도 찾아볼 게 아닌가.

지금 영혼의 관을 파괴하지 못한다면, 차후에 등장할 미완의 마탑에서 초인은 더욱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 무력이 뭔가.

어쩌면 미완의 마탑, 그때는 초인 마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의 마법사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잠적은 막아야 했다.

잠적한 후라면 이미 늦다.

아무리 바벨의 영향력이 전 대륙에 뻗어 있다고 해도, 한 국가가 전력을 다해 숨기는 영혼의 관을 찾기는 어렵다.

그때는 마스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바벨의 탐색을 방해할 테니까.

자국의 국토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마스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할 것이다. 바벨 입장에선 그런 마스의 벽을 넘는 일만 해도 골치 아플 터.

그렇기에 라울의 선택은 공격일 수밖에 없었다.

“마스와 싸워야 할 것이 거의 확실한데도?”

“바벨이 가진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습니다.”

“흐음. 바벨의 주인도 아니고, 이 정도의 사안을 자네가 결정한다고?”

“오히려 이 정도의 사안이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베이몬의 침묵과 같은 초인 마법의 위험성을 안다면 제가 아닌 그 누구라도 저와 같은 결정을 내리겠지요. 바로 이 땅의 모든 초인을 위해서! 바벨은 목숨 걸고 마스와 맞서 싸울 것입니다.”

“지금 그 말……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목소리를 높이는 라울의 모습에선 사내다운 기개가 넘쳤다.

기사의 용맹함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일까.

검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세상 돌아가는 법을 모르는 애송이도 아니고, 국가와 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다.

이 결정은 단순히 무력 충돌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가 아닌 거대 조직이 한 국가와 싸운다? 과연 지금까지 바벨이 자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용납하고 있던 국가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결코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런 모든 부담을 지고 마스와의 전쟁을 각오한 것이다.

이런 직간접적인 문제들보다 베이몬의 침묵이 가져올 사태가 훨씬 더 위험하다는 판단하에 말이다.

“어쩌면 마스는 제국보다 바벨을 먼저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쁘지 않아.”

“・・・・・・ 아직 마스와의 충돌이 확정된 건 아닙니다.”

좀 전의 기개는 어디 갔는지, 라울이 금세 죽는소리를 한다.

“그럴까? 그럼 방금 시간이 없다고 끙끙거렸던 사람은 누구지?”

“네. 접니다, 저. 그리고 그 문제로, 검후님과 명예 후작님. 두 분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드가 묻는다.

“제게 말입니까? 설마 마스와의 싸움에…………….”

“절대 아닙니다. 그래 주신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만,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부탁으로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죠, 그건.”

“그럼 부탁이라는 건 뭐죠?”

“그래. 나도 궁금하군.”

이런 이드와 검후의 반응에 라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곁에 앉은 플레타를 돌아봤다.

“왜?”

그에 으적으적 과자를 씹고 있던 플레타가 의아해했다. 그를 향해 라울이 부탁하듯 말했다.

“내 말에 괜히 흥분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알았지.”

“・・・・・・ 그거야 어렵지 않다만.”

승낙 비슷한 플레타의 말까지 들은 다음 라울이 부탁이라는 것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제 부탁은 이겁니다. 영혼의 관 최상층에 도착할 때까지, 두 분께서 전투를 주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투를 주도해라. 지휘를 맡아 달라는 건 아닌 거 같고. 선두에 서 달라는 말 같은데, 내 착각인가?”

‘지휘를 맡는’ 것과 ‘선두에서 군을 이끄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무엇보다 선두에 선다는 건, 아주 적극적으로 전장에 참여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가장 먼저 적을 베어야 하는 자리.

보통 기사단의 상급 기사나 수석 기사가 담당하는 임무다.

때론 단장이나 기사단의 주인이 직접 선두에 서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매우 드문 경우다.

전장의 분위기를 일시에 바꾸거나, 승패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점에서나 일어날 일이랄까.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상황과는 달랐다.

앞선 두 번의 전투는 큰 위기도 없었고, 다음 전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검후를 선두에 세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그걸 증명하듯 쉴라와 스폴의 눈초리가 대번에 흉흉해졌다.

어디서 감히 검후를 부하처럼 부리려 한단 말인가. 말이 좋아 부탁이지, 선두에 선다면 후방의 지시 또한 따라야 했다.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저나 플레타의 명령을 따라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저와 플레타 부대가 두 분의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야, 그걸……!”

라울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양 플레타가 성을 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진정하라는 라울의 손짓에, 앞서 그가 한 말을 떠올린 플레타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다음 말을 들어 보겠다는 듯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과자를 뱉어 버렸다.

지금은 과자 따위나 씹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이번 습격을 주도하는 건 어디까지나 바벨이지 않나? 남작도 그걸 분명히 했었고.”

검후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습니다. 지금은 습격이 어디의 주도로 진행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지. 그 시간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아직 바벨과 마스의 싸움이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요.”

라울이 노리는 바는 명확했다.

“저와 검후님을 선두에 세워 속전속결하겠다는 목적이로군요.”

“제가 알고 있는 두 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특히 명예 후작님이 쉐어 가든에서 보여 주신 능력은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쉐어 가든에서 있었던 사건은 바벨에 있어서는 패배의 기억이기도 하건만, 그에 대해 말하는 라울은 거침이 없었다.

그날 분명 바벨은 패배하고 검후를 빼앗겼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메르시오와의 전투는 바벨의 패배를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만들 정도의 것이었다.

바벨에 선 그날의 일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으로 분류한 지 오래였다.

“명예 후작님이 그때와 같은 실력을 보여 주신다면, 앞으로 몇 층이 남아 있어도 간단히 뚫고 지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드는 담담히 수긍했다.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고, 분명한 사실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당연하다는 이드의 반응에 플레타가 푹 하고 숨을 내뱉었다. 처음엔 기가 막혔고, 그다음에는 놀라워서였다.

짧은 시간 영혼의 관이 내보인 전력은 상당했다. 그걸 저리 쉽게 뚫어 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으며, 자신과 오탄을 제외하고 모두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놀라운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후까지 그러하지 않나.

쿡쿡.

마침 옆에 앉은 오탄이 옆구리를 찔러 돌아보니, 입 앞에 손가락을 세운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거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인마!’

플레타는 괜히 눈을 한번 부라려 주고는 입맛을 다셨다. 모두 그렇다니, 그런 줄 알아야지. 그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는 사이 라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재차 사정하듯 대답을 구하는 라울에 이드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바벨의 결정과 상관없이 영혼이 관을 오를 생각이지 않았던가.

“그러・・・・..”

“명예 후작의 답은 내가 대신하지.”

한데 검후가 나서서 이런 이드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라울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작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분명 가능성 있는 일이야.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와 명예 후작이 얻는 건 무엇이지?”

“…….”

공짜로 힘을 쓰진 않겠다.

그런 검후의 반응에 라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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