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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86화


1321화

검후의 말에 난감해 어쩔 줄 모르는 라울.

그 모습에 이드는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

지금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검후의 뒤통수에다 든든하다는 눈빛을 뿌려 주었다.

역시 연륜은 어디 가지 않는 것일까.

바벨에 대가를 요구할 생각을 하다니!

이드는 아예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정확히는 요구할 것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혼돈의 파편 관련해서는 바벨이 이미 두 발 벗고 나선 상태.

그렇다고 재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가진 재산만 따지면 이미 이드 개인이 바벨보다 더 많은 재물을 쌓아 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검후는 달랐다.

물론 이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얻지 못할 건 딱히 없었다.

그녀는 검후이고, 제국의 가장 큰 어른이니까.

그럼에도 정확히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이 원만한 사회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인지, 혹은 바벨에 빚을 지워 놓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단순히 라울을 조롱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

하지만 이드는 순순히 응하려 한 자신보다 대가를 요구한 검후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어디 사람을 공짜로 부려 먹으려고.

따지고 보면 검후의 요구가 억지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라울이 부탁한 시점에서 검후와 이드의 역할이 완전히 달라진다. 라울의 부탁이 있기 전까지는 보험이자 서브였다면, 지금은 메인이 되어 달라는 셈이니까.

즉, 부탁에 따른 정당한 요구였다. 게다가 그렇지 않을지언정 지금의 라울에겐 그걸 조율할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애초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여 보기 위해 한 부탁이 아니었던가.

해서 결정은 빨랐다.

“이걸 받아 주십시오.”

말과 함께 그가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 든 것은 평범해 보이는 단검 두 자루였다.

라울은 그 두 자루의 검을 각각 이드와 검후에게 건넸다.

이드는 단검을 건네받아 살폈다.

단검은 첫인상대로 평범했다. 나름대로 중심은 잘 잡혀 있지만, 보석으로 장식된 것도 아니고, 검집이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용병이나 사냥꾼이 간단히 들고 다닐 것 같은 물건.

그렇다고 딱히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드는 문득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단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그러자 은백의 검신이 드러났다.

“역시.”

평범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단검의 검신은 서늘한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예리했다. 게다가 생김새 또한 특이했다.

한 뼘을 조금 넘는 검신의 중앙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렸고, 구멍을 중심으로 좁은 검신에는 콩알 크기의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 중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바벨의 달’이라는 구간뿐, 나머지는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무려 이드의 지식 창고에도 없는 문자,

그렇다면 이건 이전에 있었던 문자가 아니라고 봐야 했다. 이드의 지식은 그레이드론에게서 온 것이니까.

“이 단검은 뭡니까?”

“증거입니다. 두 분이 바벨을 도왔다는. 언젠가 바벨에서 그 빚을 갚겠다는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말입니다.”

차라리 용병이면 서로 편했을 텐데 말이다.

“이걸 보이면 바벨이 진 빚을 갚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무엇이건 필요한 것을 요구하시면 됩니다.”

“어느 정도의 요구까지 가능한 건가? 단순히 물질적인 수준인가, 아니면 바벨의 이름을 빌리는 정도인가.”

검후는 꼼꼼했다.

라울은 차분히 답했다.

그렇게 알게 된 단검의 가치는 상당했다.

플레타 부대와 같은 바벨의 주요 전력을 빌릴 수 있었고, 국가와 대립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바벨의 이름을 빌릴 수도 있었다.

또 금액으로 치면 최고 일억 골덴까지 바벨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물건이 바로 이 단검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 물건이지만, 검후의 감상은 퉁명스러웠다.

“그게 남작이 생각하는 내 가치라는 건가? 일억 골덴이?”

“…..”

라울이 내심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억 골덴. 분명 엄청나게 큰돈이다.

하지만 검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했을 때 ‘고작’ 그것밖에 나오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분명 검후를 움직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돈이다.

무엇보다 그 뒤에 걸린 조건도 무시무시하다.

어쩌면 바벨과 초인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위기를 넘는 대가로 일억 골덴.

“앞서 말씀드렸듯, 그건 증거입니다. 두 분께는 그 증거로 요구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두지 않겠습니다. 가령 검후께서 소드 팰러스로 복귀하실 때라거나.”

“아니, 그건 온전히 내가 해결할 일이네.”

검후의 소드 팰러스 복귀를 돕겠다.

다시 말해 바벨이 삼검왕과의 싸움을 돕겠다는 뜻이지만, 검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에 라울이 작게 혀를 차려는 찰나, 검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요구 조건에 대해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에 들었네. 만약 바벨이 내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경우에는?”

“……그때는 제 인생을 걸고 조건을 충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오호. 그것참 마음에 드는군. 이걸 잘 사용하면 자네를 내가 부릴 수도 있다는 거잖나. 아주 마음에 들어.”

“아니…… 그게 그런 말이 아닙니다!”

매우 위험하게 희번덕거리는 검후의 눈빛을 마주한 라울이 부정했다.

뱉어 놓고 보니, 자신의 말이 매우 위험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답지 않은 실수랄까.

그러나 좋은 건수를 잡은 검후는 그런 라울을 쉽게 놓아주지 않고 압박했고, 라울은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모습이 꽤 볼만해서 더 지켜볼까 싶던 이드는 문득 생각을 바꿔서는 검후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검신에 보면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뭐라고 새겨져 있는 겁니까?”

“아, 잘 물어 주셨습니다.”

“쯧.”

라울이 숨구멍을 찾았다는 듯 반가워하는 중에 검후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울이 급히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문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애초에 문자가 아니니까요.

“암호 같은 겁니까?”

“용도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의 용도는 오로지 그 단검의 진위를 구분하기 위한 게 다입니다.”

라울의 답에 이드는 단검을 다시 살폈다.

제법 신기했다.

단검에 새겨진 문자는 복잡하고 섬세하긴 했지만, 적정하고 위조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따라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문자가 어떻게 진위를 구분해 준다는 것일까.

‘하긴 바벨이니, 별별 희한한 초인기를 가진 초인들이 한둘일까.’

특이한 초인기 몇 개를 조합해 특별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을 터.

아무렴, 일억 골덴짜리 단검이다. 바벨에서 허투루 관리하고 있지는 않겠지.

단검에 대한 궁금증을 모두 해소한 이드는 단검을 라미아에게 건넸다.

과연 저걸 사용하게 될 일이 있을까.

이드는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라울을 향해 말했다.

“저는 좋습니다. 남작의 요청대로 이후의 전투에 있어 선두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아, 명예 후작님의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쯧, 명예 후작이 그렇게 결정을 했으니, 조금 부족한 듯하지만 나도 남작의 부탁대로 움직이도록 하지.”

조금 더 가지고 놀 수 있었는데.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까.

그런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검후가 말했다.

라울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그녀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다만 선두에 서는 것은 나와 명예 후작뿐이네. 은색 기사단은 해당하지 않아.”

“물론입니다.”

라울이 짧게 답했다.

그와 반대로 쉴라는 인정하지 못하고 나섰다.

“검후님. 은색 기사단이 두 분을 보좌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단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아. 하지만 모든 전투에 은색 기사단이 나설 수는 없다. 체력 관리를 해야지.”

아무리 은색 기사단이라도 이드와 검후의 페이스를 따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은색 기사단을 후방에만 두겠다는 의미는 아니네. 이번처럼 플레타 부대가 무력화 된다면 은색 기사단이 나설 것이니, 오해는 말고.” 

“오해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저희 부대와 은색 기사단이 번갈아 전투에 나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요.”

라울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투로 말했다.

만약 이후의 전투에도 계속해서 베이몬의 침묵이 사용될 경우, 플레타 부대는 뒤로 물러서서 은색 기사단에 전투를 맡길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은색 기사단의 체력 소모는 심해지고, 그만큼 하나의 전투가 끝난 후 회복을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야 이드와 검후를 선두에 세운 의미가 무색해진다.

바벨의 입장에선 이억 골덴을 의미 없이 태워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라울은 어지간해서는 찾지 않던 신의 이름을 외웠다.

그리고 그의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들은 것일까.

이드가 움직였다.

“기사들의 회복도 끝난 것 같으니, 다시 올라가시죠.”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워 낸 컵을 탁자에 올려 두고, 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회복에 전력을 다한 기사들이 어느덧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바빴던 라울이 이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쪽을 살피던 일부 기사들이 달려와 테이블과 의자 등을 정리했다.

휴식은 끝났다.

그 모습을 본 플레타 부대와 은색 기사단에 전의가 감돌았다. 특히 은색 기사단의 전투를 지켜보기만 했던 플레타 부대의 각오는 남달라 보였다. 그런 전의를 전달받은 것일까.

플레타가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왔다.

“제가 두 분과 함께 할 겁니다.”

“저희 부대가 세 분의 등 뒤를 단단하게 지키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그 뒤를 따르는 오탄의 눈빛도 심상치 않다.

아무렴 조금 전 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를 바로 옆에서 들었는데, 그라고 아무 생각이 없을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지금 그들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아차릴 수 있다.

그로서는 나름 정신 무장을 새롭게 한 상태인 것이다.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말과 함께 계단 쪽을 가리키는 플레타.

그에 이드가 그런 그를 제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입니다.”

그와 함께 이드의 손가락이 위를 가리켰다.

지금도 네트나와 철황파산포가 틀어박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천장.

“……뭐라고요?”

그에 플레타가 멍청한 얼굴로 반문했다.

바늘 끝처럼 뾰족하게 갈아 놓은 전의가 무참히 뭉개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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