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90화
1325화
스스로 정예라고 자부하는 플레타 부대가 이런데, 일반적인 경우는 어떨까.
베이몬의 침묵이 대륙 곳곳에서 사용된다면?
그런 상상에 오탄은 진저리를 쳤다.
결코 없어야 할 일이다.
진짜 벌어진다면 그레센은 끔찍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대혼돈의 수렁으로 빠져들 것이다.
초인이 세상에 나오고 백 년.
초인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을 움직이는 확고부동한 힘의 한 축이다.
그런데 베이몬의 침묵으로 인해 그 축이 썩은 나무처럼 무너져 내린다면?
대내외적으로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여기저기서 각성으로 권력을 잡은 초인을 끌어내릴 것이고, 초인 전력 양성에 힘을 쓴 영지와 국가는 외부의 도전을 받아 흔들릴 것이다. 도전자들에 의해 기존 질서가 무너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면 세상 누구보다 골치 아파지는 것은 바로 바벨이다.
초인의 안전과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바벨의 입장에선 초인의 사회적 위치가 끝장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도 그때가 오면 숨 쉴 여유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라도 초인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 위기에 빠진 초인들을 돕기 이전에 바벨이 먼저…………….
‘아니지. 아니야. 베이몬의 침묵이 아무리 대단해도 바벨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오탄은 문득 떠오른 불길한 가능성을 서둘러 부정했다.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닌, 근거가 있는 부정이었다.
베이몬의 침묵에 당했을 때, 부대원들과 달리 플레타와 라울은 충분히 전투가 가능한 상태였다.
즉, 베이몬의 침묵에 저항이 가능했다는 것.
베이몬의 침묵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증거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그렇다면 두 사람처럼 강력한 초인의 경우 초인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외부의 적과 싸울 수 있다.
그렇다면 초인 중 최강이라는 바벨의 마스터는 어떨까.
어쩌면 마스터에게는 베이몬의 침묵이 전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스터가 있고, 무력화되지 않은 간부들이 있다면 바벨이 휘청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렴! 우리의 바벨은 영원불멸이란 말이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아직 어느 하나 확정된 바가 없다.
우선 가장 문제가 될 베이몬의 침묵이, 미완의 관이 만들어 낸 초인 마법이 세상에 나가지 않은 상태이니까.
그렇게 따진다면 현재 초인에게 있어 가장 좋은 상황은 이대로 초인 마법이 묻혀 버리는 것이다.
아예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은 이런 바람과는 반대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이 모자랐다. 애초에 이 정도의 전력만을 동원한 것이 문제였다. 베이몬의 침묵 하나만 해도 겨우 플레타 부대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도가 아니었던 것.
결국 이대로 놓치고 마는 걸까.
실패와 이후에 시작될 혼란이 무섭게 어깨를 짓누를 때, 해결 방법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이드 명예 후작이다.
정말 상상도 못한 방법을 제시했고, 지금은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 보여 주고 있었다.
초인들에게 찾아올 혼란을 막아 낼 가능성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라울의 사랑 고백도 지금은 충분히 공감이 갈 정도로,
자신의 마음 또한 그러하니까.
그런데 이 한심한 대장이란 인간은 그런 라울을 이상한 놈으로 몰아간다. 라울이 이상하면 자신도 그렇다는 말이 아닌가.
“쯧쯧쯧, 사람이 공감할 줄을 몰라요.”
“뭐, 인마?”
플레타가 눈을 부라리지만, 오탄은 콧방귀를 낄 뿐이다.
부대원들은 본 척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상관이 저러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하지만 불만은 없다. 가끔 철없이 행동하긴 해도, 두 사람은 능력 있고 존경받을 만한 상관이었으니까.
과연 부대원들의 믿음대로 두 사람은 금방 신색을 바로 했다.
그리고는 돌관작업이 이어지는 구멍 안을 노려보았다.
“저거, 나머지 층도 곧 뚫릴 것 같지?”
“이미 한 층을 뚫었잖아요. 그걸 보고도 아직 못 믿으세요?”
“그게 아니라, 마법사 놈들이 저 꼴을 그냥 보고만 있겠냐고.”
영혼의 관에 속한 마법사들.
그들에 관한 말에 오탄은 곧장 답하지는 못했다. 그런 오탄을 대신하려는지 라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연히 기겁을 하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하는데.”
“시간. 명예 후작이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강기로 이뤄진 구조물이라는 건 알지. 강기의 강도는 너도 알 거고.”
뭇 기사들보다 더 진지하게 무공을 익히고 있는 플레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속도라면 최상층까지 일 분 내외. 과연 그 짧은 시간에 강기를 파괴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저 앞에 대기 중인 마법사도 없을 텐데.”
이런 곳에서, 적이 갑자기 바닥 한가운데를 뚫고 올라올 거라고 생각해 대기 중인 마법사가 누가 있을까. 심지어 자신들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인데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걸리면 결국 방법은 찾아낼 수 있는 거 아니냐?”
“무슨 상관이야. 그땐 이미 우리가 전부 최상층에 도착해 있을 텐데. 저 통로가 부서지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지.”
“역시 그렇겠군. 그럼 준비해야지.”
라울의 확답에 고개를 끄덕인 플레타가 오탄을 돌아본다.
“…..뭐요? 말을 하셔야 알지.”
“끄응. 그 정도는 좀 알아들어라. 부대 전투 준비시켜.”
“전투 준비입니까?”
오탄이 자신이 받은 명령을 확인했다.
“그래, 라울 놈 말 들었잖아. 최상층이 열리면 바로 올라간다. 그리고 우리가 선두다. 베이몬의 침묵에 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
“정확히 말해서 선두는 명예 후작님과 검후님이신데요.’
“…..”
팩트로 플레타의 말에 틀린 부분을 꼬집어 준 오탄이 실실 웃으며 부대원들에게 전투 준비를 알렸다.
플레타는 베이몬의 침묵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친다고 했지만, 적이 이미 베이몬의 침묵을 깔아 놓고 있으면 의미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부대원들이 무력하게 두 손 놓고 있는 상황을 플레타는 상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그의 부대원들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야말로 그 대장에 그 부하들이라고 할까. 그렇게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마지막 층이 곧 열립니다.”
이드의 목소리에 2층이 고요해졌다.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콰드득!
무언가 갈려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그것이 충격으로 온몸을 흔들었다.
“격! 마지막 층이 열렸습니다. 먼저 가죠. 따라들 오세요.”
그 속에서 들려오는 이드의 목소리.
직후 이드의 몸이 빨려드는 것처럼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뒤를 따르는 검후.
“우리도 간다!”
한발 늦게 플레타가 고함을 지르며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의 부대원들이 와악! 하고 소리치며 그 뒤를 따랐다.
“상승 능력이 없는 동료들을 챙겨!”
“내가 먼저 간다!”
“제일 마지막에 올라오는 놈이 일 년 동안 식사 당번이다!”
“이번에야말로 멋지게 활약해서 기사님께 점수를 딴다!”
“이 목적 확실한 새끼!”
분분히 몸을 날리는 초인들이 서로의 전의를 북돋웠다. 물론 그 사이에는 엉뚱한 목적을 뻔뻔하게 밝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걸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게다가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들은 누가 봐도 하나같이 빼어난 여인들이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부대원 중 뭔가 잘해 보려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임무에 사심을 더해 전의를 북돋운 부대원들이 단숨에 통로를 통과했다. 어두운 통로를 나서는 순간, 환한 빛이 그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부, 부관주!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여기까지 뚫리고 맙니다. 대책을!”
목소리를 높이는 마법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세상에나, 설마 천장을 뚫고 올라올 줄이야.
그것이 얼마나 단단한데, 그사이에 얼마나 꼼꼼하게 마법들을 설치했는데 그걸 뚫고 올라온단 말인가!
더욱이 다른 곳 보지 말고 헷갈리지도 말라고 잘 보이는 곳에 계단까지 설치해 뒀는데, 그걸 깡그리 무시하고 천장을 뚫다니!
게다가 돌관 속도가 너무 빨라 그 짓을 막을 방법을 찾기도 어려웠다.
무조건 공격 마법을 때려 박아 강기의 진행을 막아야 했을까. 하지만 수없이 작은 강기의 결정은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파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것이 가능한 마법사들도 저기에 있지 않았다.
검강의 고리를 막기 위해서는 최상층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고위 마법사들이 나서야 했는데, 당장 달려가는 데만 해도 적잖은 시간이 소모된다.
침입자가 마법이나 초인기를 이용해 층간 이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준비한 게 자신들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마법사들은 답답하고 난감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라울이 예측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가 당혹한 것은 아니었다.
절반 이상의 마법사들은 냉정함을 유지하고서 이어질 상황과 대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마법사들의 중간에 있는 인물이 바로 부관주
이더비히다.
“침입자들이 어디까지 뚫고 들어올 것 같으십니까.”
부관주의 물음에 호들갑을 떨던 마법사들이 가란의 거울 앞에 선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에 그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지, 바로 답이 나왔다.
“아마도 최상층 바로 아래층까지 뚫릴 것 같습니다. 분석에 따르면 적의 강기 구조물의 형태가 각층의 마나 구성에 따라 바뀌고 있습니다.”
“마법도 아니고, 검강으로 그런 재주가 가능하다고?”
“조용!”
“그걸 볼 때 네트나의 생명이 끊어지던 시점에서 층간으로 흡수된 마나를 역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몇몇 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도 아니고, 변화하는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 무공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듣도보도 못한 경우였다.
하지만 이미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과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는 특별하군요.”
“…..”
조용히 감탄중인 부관주,
그에 반해 마법사들은 조용히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이 적의 대단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