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0화
527화
슈슈가 돌아본 곳에는 처음 보는 흑발 흑안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어머, 젊은 남자?”
슈슈는 자신이 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실력에 그가 소드 팰러스의 선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리 나이 차가 나지 않는 남자로 보였다.
‘어머나, 그런데 혹시 이 남자 내가 소리치는 걸 들은 거 아냐?”
슈슈는 큰 목소리로 욕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남자가 봤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드는 탐색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저기 두 사람 상당히 열이 오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남자의 탐색과 자신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려던 슈슈가 그 말에 아차 하고는 급히 연무장을 살폈다.
다행히 연무장 위의 두 사람은 여전히 팽팽하게 검을 겨루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처음 뵙는 분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수는 없죠. 아마, 기사님이 곧 오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슈슈는 얌전한 말투로 대답했다. 말하는 중에 살풋 늘어진 머릿결을 만지고, 새침한 표정도 지었다. 방금 전까지 던져 놓고 있던 내숭의 고양이 가면을 다시 뒤집어쓴 것 같았다. 처음 네리베르를 보좌하며 등장할 때의 늠름한 모습이나 조금 전 악바리처럼 소리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것이 슈슈의 매력인 듯했다.
그녀가 이제는 확실히 붉은기가 도는 뺨을 한 손으로 감싸며 부끄럽게 말했다.
“그런데 혹시 아까 제가 하는 말을 들으셨나요? 조금 전엔 급해서 그만 소리를 치고 말았는데.”
‘아주 잘 들었지. 귀가 쩌렁쩌렁하게. 크큭.”
분위기가 확확 바뀌는 슈슈의 모습에 이드는 내심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솔직히 그렇다고 답할 정도로 눈치도 없는 바보는 아니었다.
“글쎄요. 전 검격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무슨 문제라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호호.”
슈슈가 짤랑거리며 웃었다.
그녀도 자신이 얼마나 큰 목소리로 소리쳤는지 알기에 상대가 정말 듣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말을 맞춰서 못 들은 척해 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소드 팰러스의 검사이긴 하지만 그녀 역시 예쁘고 싶은 여자다. 괜찮아 보이는 남자에게 흉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얼굴도 잘생겼잖아.’
어느 순간부터 다급하게 반짝이던 연무장의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이 옅어져 버린 슈슈였다.
[이~드, 설마 지금 그 아가씨를 꼬시는 거예요? 우리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저 뒤에 ‘죽고 싶어요?”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다. 확신한다.
반짝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슈슈의 눈에 곤란해할 때, 머릿속을 울리는 라미아의 말을 듣고 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절대 아니라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도 그러네. 거기서 내가 나오고 싶어 나왔니? 등 떠밀려서 나왔지. 지금이라도 당장 두 사람을 보내라구.’
이드는 대답과 함께 방금 전 자신이 떠밀려 나온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빼꼼히 내밀어진 얼굴들이 있었다.
이드는 그중에서 에단과 록의 얼굴을 보고는 인상을 써 보였다.
하얗게 드러난 네리베르의 살결에 휘파람을 부는 록의 뒤통수를 갈긴 에단이 이드를 찾았다. 그는 두 사람의 대결이 위험하다며, 아무래도 중단시켜야겠다면서 이드를 연무장으로 밀어냈다.
록은 사무직이라 검 실력이 두 사람보다 떨어지고, 에단도 두 사람을 무리 없이 갈라놓을 만한 실력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마스터만 믿습니다!’ 하면서 이드의 등을 떠밀었다. 그의 초인기인 간파의 눈을 사용하면 크게 어렵지 않을 일인데.
이드도 눈치가 없지는 않다. 그의 믿는다는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것은 아마 록이라는 친구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내 라이벌의 지지자라고 했던가?”
이드는 에단이 자신의 라이벌이라면서 언급한 게일이라는 기사의 이름을 떠올렸다.
‘에단은 록에게 내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소드 팰러스에서 흔들리는 이드의 주가를 끌어 올리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이드 입장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소드 팰러스를 손에 넣으려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란다.
처음 에단에게 들었을 때는 황당했더랬다. 이드는 그저 오래전 귀여워했던 꼬마를 찾으러 나왔을 뿐이다. 그의 머리에는 소드 팰러스 따위는 들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과 달리 소드 팰러스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드를 이용한 소드 팰러스의 안정이었다.
이들이 이드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검후가 실종된 지 몇 달이 지난 때였다. 검후의 생사를 논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흐른 뒤였던 것이다. 이미 그때 소드 팰러스, 정확히 긴급 대책위는 검후를 포기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저 에단조차도 말이다.
검후의 실종 후 급조된 긴급 대책위는 검후의 실종에 흔들릴 소드 팰러스를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소드 팰러스와 검후는 이름은 달랐지만 하나였다. 검후가 없으면 소드 팰러스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긴급 대책위는 검후의 실종을 감추고, 대책 마련에 끙끙 골머리를 앓았다. 소드 팰러스 안에서 이미, 검후의 뒤를 이어나갈 인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소드 팰러스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한 그들의 잘못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거대한 검후의 그림자에 파묻혀 있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들은 검후가 실종되기 전까지 검후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 사실을 파악하고 게일이라는 존재를 다시 인식했을 때 들려온 것이 바로 이드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빨랐다. 그들이 보기에 ‘검후의 유일한 제자’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에 반해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타이틀은 나이를 초월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드의 출연에 환호했고, 그를 찾기 위해 은밀히 노력했다.
하지만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은 그들의 상상외로 거대했다.
그의 안전을 위한 퍼포먼스가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목격해 버린 것이다. 단 하루 만에 강철 검 같던 소드 팰러스가 유랑극단의 공연에 열이 오른 계집아이들처럼 들떠 버렸다.
그들은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을 피부로 느꼈다.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막대한 영향력이라면 소드 팰러스가 그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 혹시나 하는 염려에서 벌어진 결과가 바로 이드와의 첫 대면에서 보여 준 적대감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계산 끝에 이드라는 존재를 적대하고 있는 긴급 대책위와 다르게, 소드 팰러스에는 순수하게 이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이 가진 영향력을 생각하면 존재하기 힘든 기적과 같은 존재. 그들이 바로 게일을 따르고 지지하는 게일 일파다. 그들에게는 이야기 속 존재인 마인드 마스터보다 직접 보고 느낀 게일에 대한 호감이 더욱 컸다. 오히려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만으로 굴러온 돌이라는 생각에 이드를 밉게 보고 있었다.
솔직히 이드 입장에서는 귀찮게 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건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 돌려 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등짝에다가 ‘절대접근금지’라고 써 붙여 놓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이드는 에단의 얼굴에 그가 했던 말들이 한꺼번에 생각이 나면서 심통이 났다. 자신이 어째서 록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움직여야 하는가. 이드는 한층 살벌함을 더하고 있는 네리베르와 케마란을 확인하고는 슈슈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오신다는 기사분을 더 기다리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예?”
나름대로 내숭을 떨고 있던 슈슈는 이드의 말에 번쩍 정신이 들어 연무장 위의 두 사람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짧은 사이에 두 사람의 몸에 두 세 개의 검상이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제가 낯설어서 그런 거라면 알 만한 선배분께 부탁하는 방법도 있어요.”
“네, 선배라니요?”
슈슈는 낯설어서 그런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드의 말에 되물었다.
이드가 모퉁이에서 눈만 내밀고 있던 두 사람을 정확히 지목하고는 나오라고 손짓했다.
“빨리 나오세요. 여기 후배분들이 도움을 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끄응. 이게 아닌데.”
에단은 이드의 부름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리고 이드의 표정을 보며 그가 무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괜한 짓이었나?”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같았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소드 팰러스가 떠들썩하지만 실제로 이드는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다.
아무리 자신과 격의 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보통이라면 말도 함부로 붙이기 힘든 상대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상대에게 솜씨 자랑을 하라고 했으니.
“………………실수다.’
에단은 자신의 섣부른 행동을 후회했다.
“어떡하냐?”
‘이게 다 이놈 탓이야.’
에단은 빤빤한 록의 얼굴에 부아가 치밀었다. 이 약삭빠른 놈이 자신이 마스터를 밀어 낸 이유를 모를 리가 없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돌아보는 것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어떡하긴, 마스터가 부르시는데 당연히 나가야지. 나가, 임마!”
에단은 말과 함께 록의 엉덩이를 대차게 차서 밀어내고는 그 뒤를 따랐다.
“우리도 갈까요.”
일리나가 마지막으로 말하며 라미아와 함께 모퉁이를 나왔다.
그리고 텅 비어 버린 공간은 조용히 걸어온 또 다른 인물이 채우더니, 그 역시 조금 전 이드들처럼 연무장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록 선배님?”
슈슈는 넘어질 듯이 튀어나오다 급히 중심을 잡은 인물을 알아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거기서 훔쳐보고 있으셨던 거예요?”
슈슈의 목소리가 묘하게 뒤틀려 나왔다. 훔쳐보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성에게 좋은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 듯했다. 무엇보다 슈슈는 록을 크게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야하하하. 어, 어쩌다 보니 말이야. 보통 보기 힘든 싸움이잖아. 아무래도 내가 나가면 싸우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나름대로 두 사람의 실력 향상을 생각한 거라고.”
록을 바라보는 슈슈의 눈길이 차갑다.
록이 딱딱하게 웃다가 결국 그대로 굳어 버렸다.
슈슈는 록의 뒤를 따라 나오는 한 남자와 그 뒤의 아름다운 여성을 확인하고는 다시 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너도 록과 같은 놈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이드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일리나를 가리켜 보였다.
“제 일행은 저기 여성분이죠. 이 두 분은 이 앞에서 만났답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함부로 나서기가 꺼려지더군요. 그리고 바로 자리를 비우기에는 두 분의 실력이 너무 대단해 보여서 말입니다.”
연무장 위 두 사람의 실력을 칭송하는 이드의 말에 슈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연무장도 공개된 곳이기 때문에 보셔도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뭐냐………… 왜 똑같이 훔쳐봤는데 반응이 왜 이렇게 다르냐, 후배님아…………….”
슈슈의 대답에 록이 작은 목소리로 궁시렁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이어지는 슈슈의 말에 록은 조용히 입을 닫고 쭈그러져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록 선배님께 부탁드리기는 힘들 듯하군요. 실례일지 모르지만, 두 동기의 실력이 록 선배님보다 상. 당. 히 높아서요.”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여기………….”
이드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단의 어깨를 잡고 내미는 순간이었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적지 않은 피가 뿌려졌다. 그 중심에는 케마란의 옆구리에 큰 자상을 내고 비켜난 네리베르의 애검이 번쩍였다.
동시에 부상 중에도 끈질긴 근성을 보이며 네리베르의 어깨를 노리고 섬광처럼 떨어지는 링스피어의 섬뜩한 도광이 번뜩였다.
누구나 동시에 위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을 향해 쏘아지는 커다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으아악! 마, 마스터. 저 오늘 검을 안 가지고 나왔다구요.”
바로 이드에 의해 던져진 에단이었다.
“에엑!”
그리고 에단의 비명에 같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