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10화
1345화
라울은 고민했다.
이제라도 바벨이 영혼의 관의 모든 것을 온전히 손에 넣을 적당한 방법이 없을까?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서 말이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명예 후작과 검후를 속여야 했다. 그런데 과연 그 두 사람을 따돌리는 것이 가능할까? 솔직히 자신 없었다.
머리를 스치는 몇 가지 계획도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가능성이 높지가 않다.
바로 모자란 전력 탓!
“젠장, 바벨이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놓쳐야 한다고?”
아무리 계획이 있으면 무엇하나 그걸 실행할 손발이 모자라면 말짱 꽝인데.
아니다. 이것도 다 자신이 무능한 탓이다. 치솟아 오르는 짜증에 라울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그렇게 신경이 팔린 덕분에 알지 못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눈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반짝이는 눈이 반달을 그리며 웃었다.
“누후후후후!”
“뭐, 뭐야? 그 변태 같은 웃음소리는.”
징그러운 웃음소리의 주인은 검후였다.
이드는 난데없는 웃음에 기겁했다. 얼마나 놀랐으면 영혼의 관에 들어서고 계속 높이던 말투까지 잊을 지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후는 좀처럼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저 낯짝을 보고 어떻게 웃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누구? 라울?”
이드는 검후가 누굴 보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니면 누구겠어요? 아주 대놓고 아까워 죽겠다는 낯짝인데. 낄낄. 어이쿠 저러다 질질 짜는 거 아닌가 몰라.”
이어지는 말에 이드는 알쏭달쏭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보기에 라울의 표정은 굳어 있긴 해도, 굳이 따지면 무표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도저히 질질 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보여? 내가 보기엔 그냥 무표정인데. 일리나도 그렇죠?”
“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옆에 선 일리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을 꿰뚫어 보는 하이 엘프라도 사람의 속마음을 읽지는 못한다는 것이 다시 증명되는 순간이었지만,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아무튼,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도 검후의 확신은 굳건했다.
“정말 걱정이네요. 두 분 다 사람을 그렇게 보실 줄 몰라서 어떻게 하시려고. 딱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영혼의 관이라는 보물을 온전히 자신들이
가질 수 있었는데, 신중하지 못한 결정으로 그 기회가 날아가서 후회가 가득한 그런 아주 욕심 가득한 표정인데.”
라울이 지금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오싹한 공포에 빠졌을 것이다. 검후가 자신의 마음속을 완전히 읽고 있으니까.
맹세코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뻔하게 읽힌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라울이었다.
더욱이 표정만 보고 속마음을 알았다?
어쩌면 당장 그날부터 가면을 쓰고 살겠다고 맹세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검후는 ‘절대 네 놈 뜻대로는 못 해 주지.’ 하고 강한 반발심을 내보였고.
이드는 이런 그녀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넌 그걸 어떻게 읽고 있는 건데? 속마음이 얼굴에 써진 것도 아니고. 결국 짐작이잖아.”
“그걸 굳이 확인을 해야 하나요? 뻔하잖아요. 저 인간도 저처럼 부관주에 대해서 들었을 거 아니겠어요. 그럼 그런 욕심이 드는 건 당연하죠. 안 그래요?”
“그렇기는 하지.”
이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 관심이 없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연계되는 초인기가 얼마나 큰 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무렴 초인이라면 이런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바벨이라면 그런 초인들만 모여 있는 조직.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드는 그런 욕심을 딱히 배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떠한 현상에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인 이상 인지상정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한 욕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에 대해 죄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했다는 이유로 죄를 묻는다?
아마 신이 인정한 성자를 제외하고 모든 인간을 죽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이드도 굳이 먼저 이러쿵저러쿵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욕심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땐 그때 가서 그에 대한 대가를 몇 배로 받아 내면 될 뿐이다.
이드에게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좀 귀찮아지긴 할 터였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수습하는 편이 가장 좋을 것이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그보다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 네가 한 말은 그걸 따져서 나온 게 아니지? 진짜 저 라울의 표정을 읽고서 말한 거지?”
“그럼요. 저 뻔한 얼굴을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겠어요?”
“……”
보통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말을 삼킨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의 표정을 읽는다? 말이야 쉽다. 감정이 크게 드러난 상태라면 실제로 어렵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반대로 한번 감정을 감추려 한다면 무엇보다 읽기 힘든 것이 바로 표정이다.
그걸 깨고 본심을 파악하려면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반 관상가가 된 사람이거나, 그게 아니면 상대와 극히 깊은 친분을 나눈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상대에 대해 잘 알수록 그 표정을 살피는 일은 쉬워질 테니까.
과연 검후는 어느 쪽일까?
굳이 따지면 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족으로서 긴 시간을 보낸 그녀가 상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더욱이 그녀는 대륙에 무공을 널리 알린 검후다.
그녀가 가르친 기사들이 몇이고, 그로 인해 만난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상대했다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반 관상가라고 해도 될 일.
그런데 이상하지. 지금 검후의 모습을 보면 그쪽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부부 일심동체라고, 이런 생각은 이드만 드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마침 눈이 마주친 일리나와 라미아의 눈빛도 이드와 비슷하다.
‘이거 혹시, 그거 아냐?’
‘이드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죠? 혹시 스톡홀름 신드롬?’
‘스톡홀름 신드롬? 그게 뭔진 모르지만, 그건 아닐 거 같은데요?’
‘맞아요. 그건 아니죠,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린 검후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죠. 차라리 좀 더 떠볼까요?’
‘해봐요!’
‘전・・・・・・ 위험할 것 같은데요? 눈치챌 거예요. 다른 것도 아니고, 저 라울에 마음이 있냐니. 아무리 이드라도 찌르려고 할걸요?’
눈빛을 타고 오가는 대회가 참 섬세하다.
부부라서일까.
‘일리나 말이 옳네요. 이런 건 좀 조심할 필요가 있죠.’
호기심을 키우던 이드는 일리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검후에게 찔리는 것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아무렴 검후가 찌른다고 순순히 찔려 줄 마음도 없지만.
지금은 말을 꺼내 봤자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나긋한 분위기에서 꺼내는 편이 옳다.
다만, 한편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생각이 없는 이드이기도 했다.
표정만으로 상대의 생각을 읽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정과 관심이 없고서야 힘든 일이지 않은가.
나이는 많지만 검후의 신체는 젊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도 많이 남았다. 그 긴 시간 홀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그래도 검후의 스승으로서 이드는 누군가 그녀의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준에서 라울이라는 인물은 나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생겼지, 신체 건강하지, 머리 좋지, 골든아이라는 초인기로 정보와 전투에도 능통하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굳이 따진다면 신분일까?
하지만 그것도 바벨이라는 배경을 계산하면 크게 밀리지도 않는다.
사실 검후라는 이름 앞에 밀리지 않을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럴 수 있는 상대라면 아마 각국의 왕과 황제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그들을 제외하면 결국 거기서 거기.
무엇보다 검후 역시 이드만큼이나 상대의 배경이나 위치를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
‘네 마음만 확실하면 내가 전력을 다해서 팍팍 밀어줄 테니까, 힘내라. 너도 행복해져야지!’
응원의 마음을 담은 이드의 눈빛은 매우 따스했다.
다만 정작 그 대상이 된 검후의 입장은 달랐던 모양이다.
“뭐예요, 그 섬뜩한 눈길은? 제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요?”
“너! 섭섭하다.”
“갑자기?”
이드의 입술이 쌘쭉하게 늘어졌다. 라울의 표정은 그렇게 잘 읽으면서 어떻게 스승의 이 애틋한 마음은 알아주지 못하는지.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점점 사람들이 가까워집니다. 대화에 조심을…….”
때마침 개입한 쉴라의 말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졌다.
과연 그녀의 말처럼 상황 파악이 끝이 났는지 라울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부관주를 향해 눈을 번뜩인 라울이 이드의 수고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번에도 역시 명예 후작께서 해결해 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수백 번 다시 생각해도 이번 작전에 명예 후작님과 검후님의 도움을 구한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했을 일입니다. 게다가 사실 바벨의 전력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이드는 대답과 함께 힐끗 검후를 돌아보았다.
앞서 그녀가 읽은 라울의 생각과 지금 입에서 나오는 라울의 말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하긴, 속에 감춘 생각을 그대로 뱉어 내는 것도 멍청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과한 겸손이십니다. 적의 강력함은 저기 무너진 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또 플레타를 통해서도 충분히 전해 들었습니다. 뿐입니까. 라미아 명예 후작 부인이 아니셨다면 어떻게 합류했을지. 솔직히 까마득했습니다.”
스스로의 모자람을 숨기지 않는 라울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과한 칭찬과 스스로의 모자람을 숨기지 않는 모습이 수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욕심을 접었구나.’
이드는 라울의 언행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치솟아 오르던 욕심을 정리한 담백한 느낌.
‘제법이네.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접었다기보다는 포기했다고 봐야 할 테지만, 욕심이란 것이 그런가. 가능성이 없어도 놓기가 쉽지 않다.
괜히 ‘스스로의 모자람을 알고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용기’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라울의 태도는 제법 감탄을 자아낼 만했다.